서울예술단의 신작 가무극 <나빌레라> 가 5월 1일부터 12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됩니다. ‘나빌레라’는 ‘나비’와 ‘-ㄹ레라’가 합쳐진 ‘나비일레라’의 준말로 ‘나비와 같다’는 뜻인데요.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가 등장하는 조지훈의 시 <승무>를 통해 익숙한 표현일 겁니다. 창작가무극 <나빌레라> 의 원작은 최종훈(HUN) 작가가 이야기를, 지민 작가가 그림을 작업한 동명의 웹툰인데요. 70대에 오랜 꿈이었던 발레를 시작한 덕출과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슬럼프에 빠진 20대 발레리노 채록이 함께 하는 이야기입니다. 공연에서는 덕출 역에 진선규 씨가 캐스팅돼 화제였는데요. 그런데 덕출은 발레를 배우는 입장이고 채록은 전문 무용수이니, 얼마든지 화려한 테크닉을 표현할 수 있는 만화와 달리 무대 위에서 채록을 직접 연기해야 할 배우가 걱정되더군요. 그래서 채록 역을 맡아 열심히 스트레칭 중인 서울예술단 강상준 씨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웹툰처럼 발레를 많이 하지는 않아요(웃음). 일단 공연에서는 채록이 발레를 포기하려는 시점이 부각돼요. 짧은 시간 안에 드라마를 강화하기 위해서 채록이 부상 때문에 춤을 추기 힘든, 그래서 더 방황하는 모습으로 담아내거든요.
현란한 동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세를 비롯해 관객들에게 진짜 무용수로 보여야 할 텐데요.
맞아요. 그래서 <윤동주, 달을 쏘다.> 공연 중반부터 발레 연습을 병행하면서 기본기를 다지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봉산탈춤 전수자거든요. 발레는 팔이나 다리를 잘 뻗어줘야 하는데, 한국무용은 곡선의 미학이 중요해서 ‘굴신’이라고 짚고 가는 동작이 습관적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런 부분을 극복하는 게 가장 큰 과제였어요. 한편으로 발레는 중력을 거스른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오히려 중력을 인정하는 것 같아요. 중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밸런스를 맞추고 서 있을 수가 없거든요. 점프하면 100% 떨어지니까 착지를 잘해야 하고요. 이번에 발레를 배우면서 많은 걸 느끼고 있어요.
발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유연성이죠.
무술보다 익히기 힘든 게 발레가 아닐까 싶은데요.
강상준 씨는 어떻게 극복했는지 영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죠!
채록은 어떤 인물인가요?
집안 사정 때문에 부모님의 온전한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성장한 아이예요. 금전적인 어려움도 있고, 좋아하는 발레도 혼자 해나가다 보니 스스로도 헷갈릴 때가 있고요. 극 중 채록이가 스물세 살인데, 저와 나이 차가 많지 않아요. 돌이켜보면 저도 연기를 전공하면서 행복했고 열망은 뜨거웠지만, 이 일을 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컸거든요. 누구도 명확한 얘기를 해주지 않는데, 주위 사람들도 응원해주지 않는다면 폭발하기 직전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도 꿋꿋하게 자기 길을 걸어가는 걸 보면 책임감 있는 청년이기도 하고요.
강상준 씨는 안양예고, 중대 음악극과를 졸업했으니 길을 헤매지 않고 잘 걸어온 거 아닌가요?
그 시기에는 저도 혼란스러웠죠. 고등학교 때 국악도 배웠고 랩도 배웠는데, 국악 전공한 동기들은 창극단에 들어가거나 판소리나 민요를 하고 있어요. 이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쭉 그 길을 걸어와서 미래에 대해 확신이 있었죠. 또 당시 기리보이나 스윙스 등과 랩을 같이 했는데, 지금 이 친구들도 유명해졌고요. 채록이도 어릴 때부터 축구도 하고 수영도 하고, 그런데 다 4등, 애매한 실력이었어요. 채록의 대사나 가사에 이런 말이 많거든요. ‘내 인생은 늘 애매했다, 애매한 발레단에 애매한 실력...’ 남들은 잘한다고 말해주지만 자신의 성에는 안 차는 거죠.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었고 연기를 통해 다가갈 수 있는 점이 좋아서 배우를 선택했지만, 애매함이란 불안감도 있었고, 그냥 치기어린 열정이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도 컸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좋게 생각하면 이것저것 다 잘하는, 다재다능함인데요(웃음).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한국사회에서 남자들이 군대 제대하고 23살에서 26살 사이에 가장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다행히 저는 학교 교수님이 많이 잡아주셨고, 저희 공연에서는 덕출 할아버지가 길을 안내하죠. 채록이보다 발레는 모르지만, 이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빛을 발견하고 옆에서 말해주고, 크게 날아오를 것이라고 확신을 주거든요. 불안한 청춘을 다독이는 어른, 그 어른을 닮아가고 성장해가는 채록이. 관객분들에게도 그 지점이 닿는다면 따뜻함이 느껴지실 거예요.
강상준(채록) 진선규(덕출)
진선규 씨와 서울예술단의 최정수 씨는 각각 어떤 덕출인가요?
스타일이 많이 다르시죠, 외적인 느낌도 다르고. 일단 정수 선배님은 원래 무용을 하셨던 분이라 더 각이 있고 남성적인 느낌이 있어요. 목소리도 저음에 중후하고요. 그래서 고된 인생을 단단하게 버텨온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들어요. 반면 선규 선배님은 고된 인생을 다 겪으면서도 그때마다 유쾌하고 유연하게 잘 넘겨온 할아버지 같고요. 그래서 정수 선배님과는 깨지기 일보직전의 채록에게 어떤 단단함을 잘 보여주는 어른으로서, 선규 선배님과는 생각을 좀 바꾸면 그 열정이 더 피어오를 수 있다는 걸 제시해 주는 어른으로서 보일 수 있도록 담아내면 이상적일 것 같아요.
앞서 학창시절의 고민을 얘기하셨는데, 그런 차원에서 서울예술단은 가장 잘 맞는 곳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해 입단하셨는데 <신과 함께_저승편>, <꾿빠이, 이상>, <칠서>, <국경의 남쪽>,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윤동주, 달을 쏘다.>, <나빌레라> , 또 6월에 개막할 <신과 함께_이승편>까지 짧은 기간 서울예술단의 주요 작품에 주조연으로 참여하고 있고요.
재작년 인턴, 작년에 정단원이 됐어요. 정말 감사하죠. 예고 다닐 때 부전공으로 탈춤을 췄는데 그때부터 한국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도 많이 했고요. 전통적인 게 꼭 한국적인 것은 아니니까. 그런 차원에서 서울예술단이 지향하는 지점이 저의 신념과 맞닿아 있죠. 전통적인 것을 소재로 삼는 것부터 한국인이 더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삼는 것도요. <나빌레라> 역시 발레가 소재지만 한국인이기 때문에 더 뜨겁게 공감할 수 있는 거잖아요.
고등학교는 김도빈, 대학은 조풍래 씨와 인연이 있어서 두려움 많은 앞날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고요(웃음).
맞아요. 형들한테 의지를 많이 했고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선배 배우로서 연기적인 도움도 많이 주셨지만, 비슷한 길을 걸어간 누군가가 멋지게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됐거든요. 채록이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불안한 거잖아요.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존재만으로도 힘을 얻을 텐데. 무대 위 채록이가 저보다 더 어린 관객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예술단 안팎에서 해보고 싶은 작품, 캐릭터가 있나요?
뮤지컬에서는 <마틸다>의 트런치불이나 <킹키부츠>의 로라 같은 독특한 걸 해보고 싶어요. 이미지가 고정되는 것도 배우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이런 독특한 캐릭터는 연기하는 재미가 클 것 같아요. 저에게 있는 이미지는 좋은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도전할 수 있으니까 변신을 많이 해보고 싶어요.
<나빌레라> 가 20대와 70대의 교감을 다룬 작품이잖아요. 먼 얘기이기는 하지만, 작품 준비하면서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 많이 해요. 일단 연기를 오래하고 싶은데,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직업이든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경지에 이르면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노련해지잖아요. 그러면 어느 순간 딱 거기까지만 하게 되는 게 아닐까 두렵기도 해요. 제가 배우라는 일을 하려는 초심과 다르거든요. 끝없이 성장한다기보다는 계속 새로움을 추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덕출 할아버지가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나이에도 발레에 도전하고 몸을 극복하잖아요. 저도 덕출 할아버지처럼 늙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