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지난 여름, 좀 이상한 일을 겪었다. 은행 업무를 보고 밖으로 나오다 뙤약볕에 놀라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길을 나서기 겁나는 더위였다. 건물 유리문에 코를 박고 서서 우선 에어컨 바람을 맞았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유리문 안쪽에 매달려 신호등 색이 바뀔 때까지, 혹은 몇 번 더 바뀌더라도, 이쪽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유치원생 무리가 줄맞춰 걸어오는 게 보였다. 스무 명 가량의 아이들은 인솔 교사를 따라 지나가지 않고,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들은 유리문 안쪽에 기대어 신호등을 노려보던 나를 보더니 웃기 시작했다. 처음엔 바가지 머리를 한 남자 아이 하나가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이어서 양옆에 있던 여자 아이 두 명이 발을 구르며 웃었다. 순식간에 주변 아이들까지 나를 보며 ‘우르르’ 따라 웃었다. 내가 동물원 원숭이도 아닌데, 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웃고, 웃고, 또 웃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영어로(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인 듯) “Stop!”을 외치고 “Look at me, come on!”을 외쳐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며 박장대소했다.
나는 유리창에서 이마를 떼어내고, 얼굴에 뭐가 묻었나 살피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보았다. 아이들은 더 웃었다. 안 되겠어서 최대한 근엄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이들은 더 웃었다. 눈썹을 치켜세우고 얼굴 근육에 힘을 주며 눈을 부릅떴다. 그랬더니 그 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발을 구르며 더 크게 웃었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허둥댔다. 처음엔 당황했고, 그 다음엔 화가 났고, 왠지 좀 부끄러웠다. 아니 이 콩알만 한 것들이! 어른을 보고! 어디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유리문을 밀치고 나가 화를 내볼까 생각하다 그만 두었다.
뭐라고 화를 낸단 말인가? 웃지 말라고? 세상에, 그보다 찌질한 어른은 또 없을 것이다. 미소를 지으며, 인자한 어른인 듯 그들의 웃음에 동참할까? 그런 여유까지는 없었다. 나는 얼굴을 문지르다 머리를 긁적여 보고, 화난 표정을 지어보다 선생님께 도움을 호소하는 눈빛도 보내며 짧은 순간 진땀을 뺐다. 아이들은 좀처럼 지나가지 않았고 내 앞에 머물러있었다. 그때 신호등이 바뀐 것을 알아챈 나는 유리문을 밀어재끼고, 재빨리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 허둥대며 길을 건넜다. 사실 ‘도망갔다’는 표현이 더 알맞겠지만.
누군가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것, 그것은 웃는 자가 웃음을 받는 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전제한다. 가령 새로 한 머리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친구, 상사의 난해한 옷차림을 보고 뒤돌아 웃는 부하직원, 티셔츠를 입다 머리가 끼인 아이를 보고 웃는 엄마,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배꼽을 잡는 시청자를 생각해 보라. 웃는 위치에 선 자는 작은 ‘권력’을 쥐고 있는 자다. 적어도 이 순간, 자신은 저 ‘웃음을 받는 사람’보다는 나은 위치에 있다는 확신. 사람들은 종종 무시 받았다고 느낄 때 “내가 우스워?”라고 묻지 않는가.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이 국감 자리에서 한참 논쟁이 일었던 ‘사살된 퓨마’ 이야기를 하려고, 퓨마 대신 고양이를 데려와 쇼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 내가 배꼽을 잡은 것도 같은 연유에서일 것이다. 나는 그가 설사 고양이가 아니라 정말 퓨마를 데려왔다 해도 웃었을 것이다(본질을 흐리는 튀는 행동, 유치한 심리 아닌가! 게다가 고양이는 또 무슨 죄인가.)
일찍이 웃는 자의 우월감에 대해 알아본 보들레르는 “웃음은 악마적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매우 인간적”이라고 말했다.
“가장 우스꽝스러운 동물들은 가장 진지한 동물들이다. 원숭이들과 앵무새들이 그렇다. 게다가 만약 인간이 창조력을 상실한다고 가정해 보시라. 그렇다면 더 이상 코미디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동물들은 자신들이 식물에 비해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식물들도 광물에 비해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적 차원의 천민들을 나는 바보라고 표현하는데, 바보들에 대한 우월감의 표시인 웃음은 현자들에 대한 열등감의 표시이고 명상을 하는 현자들은 그 정신이 맑아서 어린아이에 가깝다.”
(샤를르 보들레르, 『화장 예찬』 , 평사리, 135-136쪽 )
지나치게 진지한 것, 그것은 어딘가 우스워 보인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도 지나치게 진지한 상황 앞에서 혼자만 웃음이 터질 때가 있다. 어둠 속에서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지만 어쩌랴, 웃음이 터졌는데! 한 번 터지면 꿰매기 어려운 게 웃음이다. 그 악마 같은 꼬맹이들을 다시 만나 그때 나를 보고 왜 웃었는지 물어본다면, 이런 대답이 돌아올지 모른다. “웃기니까요!” 아이들의 웃음, 그건 정말 못 말린다. 탓할 수도 없다. 아이들은 웃음도 울음도, 절제하지 않는 존재니까. 그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외칠 수 있고, 위엄이 겉모습과 크게 상관없다는 것도 ‘그냥’ 아는 존재다. 아마 그 여름, 심각한 표정으로 유리문에 기대 있던 나는 아이들에게 세상 진지한 동물, 그래서 웃긴 동물, 더위에 지친 원숭이나 앵무새 따위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사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간을 떠올려 보면, 그게 좀 웃긴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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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예찬샤를르 보들레르 저 / 도윤정 역 | 평사리
관객을 웃기는 피에로는 바보가 아니면서 동시에 바보처럼 보여야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예술가의 양면성, 나아가 보들레르 미학의 이중성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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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찻잎미경
201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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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위의 글쓴이가 겪은 에피소드와 함께 진진하게 고민하며 수용합니다.
그리고 이제 함부로 웃을 수도, 진지할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