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한 장면
적어도 예술 작업의 컬래버레이션에 대해선 이력이나 작업 햇수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설교하거나 앞뒤 다른 태도를 가지면 안 되는 것이겠다. 섣부른 결과 예측보다 가능성의 가슴을 열어젖히는 것. 88세 영화감독과 33세 사진작가의 ‘콜라보’에 대한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보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명제를 떠올렸다. 누벨바그 전성시대를 이끈 88세의 감독 아녜스 바르다(Agnes Varda)뿐 아니라 <타임스>가 ‘2018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한 33세 아티스트 JR(Jean Rene)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서로의 작품에 경의를 갖던 88세와 33세 예술가가 만나 의기투합하면서 시작한다. 카메라 부스와 즉석 출력기가 내장된 ‘카메라 트럭’을 타고 두 사람은 프랑스 전역을 떠돈다. 마을과 풍경, 얼굴들을 찾아서.
‘우연은 예술의 조력자’라고 믿는 바르다와 팀과 함께 꼼꼼히 작업 방식을 검토하는 JR은 스타일은 조금 다르지만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 다닌다. 트럭의 부스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은 금세 출력된 자신의 흑백사진을 보고 놀라고 감동한다. 그 대형 사진이 벽에 붙는 순간, 그곳은 특별한 전시장이 되는 것이고, 자신에게는 인생의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탄생하는 것이니까.
오래된 마을, 철거된 광산촌, 800헥타르 농장, 염소 목장, 주민들이 떠나 빈집이 모인 듯 보이는 해변, 바르다의 추억이 새겨진 해안, 항만 남성 노동자의 파업 사연이 들리는 항구, 그리고 바르다가 젊은 시절 운명적으로 만나 영화를 찍었던 배우 장 뤽 고다르가 은둔해 살고 있는 스위스까지, 두 예술가는 내달린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는 자연이 준 나이 때문에 생기는 세대의 격차가 거의 없다. 유머와 배려, 토론과 열정 때문에 숫자를 잊는다. 아, 맞다. 자신들이 작업한 공장 대형 물탱크의 물고기 사진을 잘 보기 위하여 옥외 나선형 계단을 33세 JR은 끝까지 뛰어 올라가고 88세 바르다는 조금 힘겹게 중간까지 오른다. 일주일치 운동은 다했네,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던 바르다가 선 자리에 JR이 다시 내려와 “여기서 보는 풍경도 좋군요” 말을 건네며 함께 감상한다. 왜 그들이 더불어 작업하는가에 대한 답이 있는 태도.
정말이지 JR은 거장 바르다를 치켜세우거나 아부하지도 않고, 바르다는 생기발랄한 JR을 가르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공동 작업, 우정의 커플이 분명하다.
영어 제목은 Faces Places, 프랑스어 제목은 Visages Villages. 한국어 제목도 ‘얼굴’이 핵심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의 얼굴. 만나서 특별한 얼굴이 되고,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얼굴들. 조금씩 시력을 잃어가는 바르다의 세상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실천된다. “이제 우리는 친구네요” 자신의 얼굴 벽화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광산촌의 마지막 남은 사람 자닌을 안아주며 바르다가 남긴 말이다.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한 장면
JR은 바르다의 눈과 두 발을 크게 찍고 화물열차에 바른다. (아재개그 본능이 꿈틀. 정말 그들은 사진을 풀로 ‘바른다’, 그래서 ‘풀로 바르다가 그 얼굴을 사랑하게 되는’...... 죄송합니다.) 바르다의 눈과 발이 화물열차를 통해 더 멀리 더 넓게 세상을 보고 다니라는 기원이 담긴 은유인 것일까.
그 많은 사진 벽화는 어떻게 되느냐고? 비와 바람에 사라지겠지. 그러나 그들이 작업했던 순간의 기록, 찍힌 대상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남는다. 원작 미술품으로 예술사에 남는 것이 아니라 그 작업의 기록으로 가슴에 남을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어서 이미지로 남기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바르다 감독다운 연출이 영화를 이음새 느껴지지 않는 한 편의 인생 콜라주로 만들었다.
“서로의 상상력을 인정하겠다.” 눈망울에 호기심이 가득한 할머니 예술가 앞에서 나는 오늘 하루는 다소 시시했어도 내일을 기대한다. 적어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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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찻잎미경
2018.08.10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sunkinn
2018.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