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동화에 등장하는 백설공주는 몇 살일까? 연극은 벌써 17돌을 맞았다. 연극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말이다. 지난 2001년 5월 4일 초연된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가 17주년을 맞이해 2018년 5월 4일부터 다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초연 당시 어린이를 위한 수준 높은 연극을 지향하며 탄탄한 스토리와 아기자기한 무대, 뮤지컬에 버금가는 춤과 노래, 기발하고 코믹한 장면 연출을 선보인 덕에 지금까지 200여 개 도시에서 4,500회가 넘는 공연을 통해 150만 명의 가슴을 울린 그야말로 명작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만 들여보내는 여느 어린이 공연과 달리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자녀와 함께 작품을 관람하는 엄마들의 모습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와 엄마는 공연을 보고 난 소감이 분명히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보면서 문득 어른의 시선에서 동화를 비튼 ‘남자 버전의 신데렐라’ 어른이 뮤지컬 <난쟁이들>이 생각났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각 작품의 ‘난장이’와 ‘난쟁이’가 함께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를 봤다면 나눴을 법한 얘기들을 각색해 보았다.
난쟁이 : 표준어 바뀐 지가 언젠데 아직도 ‘난장이’래?
난장이 : 그쪽은 ‘어른이’가 뭐야, 유치하게!
난쟁이 : 언어의 유희로 생각해줘(웃음). 제목부터 내용까지 원작을 비튼 재미가 없었다면 성인 관객 중에 동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누가 보러 오겠어?
난장이 : 우리 작품엔 꾸준히 성인 관객들이 온다고. 아이와 함께 오는 부모님은 물론이고, 사랑을 키워나가는 커플 관객도 많아.
난쟁이 : 일곱 난장이가 살고 있는 안개 숲에 아름답고 착하지만 바보스러울 만큼 순진한 백설공주가 찾아온다, 그런 백설공주를 말 못하는 막내 난장이 반달이가 사랑한다, 반달이는 새엄마 왕비 때문에 위기에 처한 백설공주를 매번 목숨을 던져 구해낸다, 하지만 백설공주는 키스로 자신을 주술에서 풀리게 한 이웃나라 왕자와 결혼한다, 반달이는 고백조차 못하고 서서히 숨을 거둔다... 너무 답답하지 않아? 차라리 <난쟁이들>의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처럼 좀 영악하고 솔직한 게 낫지 않느냐고.
난장이 :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기본적으로 어린이를 위한 연극이야. 대본부터 무대 연출, 음악까지 워낙 탄탄하다 보니까 어른 관객들도 좋아하는 거라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반달이의 순수한 사랑이 아름답게 빛나야 해!
난쟁이 : ‘어린이를 위한 수준 높은 연극’은 인정할게. 특히 이 작품이 17년 전에 초연된 걸 감안하면 대단해. 동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다양한 소품이며 의상도 눈에 띄지만, 백설공주가 풍랑에 휩쓸리거나 반달이가 헤엄치는 장면 등을 무대에 구현한 모습은 정말 기발해. 난쟁이 분장은 우리 작품이 더 기발한 것 같지만(웃음). 그리고 대사 한 마디 없이 모든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내는 반달이, 또 마지막 안개꽃 더미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장면은 정말 멋있어.
난장이 : 사실 반달이의 시린 사랑과 죽음이 있어서인지 원작 동화와는 달리 작품 전체적으로 다소 슬픈 기운이 있는데, 곳곳에 동화적인 장치와 코믹한 요소를 가미해서 균형을 잘 맞추고 있지. 그래서 수많은 아이들 속에서 어른 관객들도 까르르 웃고 주르르 울 수 있다고.
난쟁이 : 인정해! 하지만 동화와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 알지? 요즘 세상엔 반달이처럼 헌신적으로 사랑하면 진짜 헌신짝 된다고.
난장이 : 그래도 ‘사랑’이라면 그 모든 걸 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 같은 세상에도 말이야. 반달이는 정말 온 마음으로 백설공주를 사랑하잖아. 특히 반달이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절절한 사랑이 극대화되는데, 독이 묻은 사과를 먹고 쓰러진 백설공주를 구하기 위해 반달이가 이웃나라 왕자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나지. 갖은 고생을 하다 마침내 만나게 된 왕자가 자신의 몸짓을 알아봐줬을 때 오열하는데, 관객들도 그 부분에서 많이 우는 것 같아. 대가가 없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마음, 사랑이 아니면 어떻게 경험하겠어.
난쟁이 : 그렇게 사랑하지만 백설공주는 그 마음도 몰라주고 이웃나라 왕자랑 결혼했잖아. 내 아이가 반달이처럼 가슴 아픈 사랑을 하면 좋겠어? 난 반댈세, 조금 덜 순수하고 덜 뜨겁더라도 서로 주고받는 편안한 사랑이면 좋겠어. 백설공주와 이웃나라 왕자처럼 말이야. 사람들이 10살 때 읽었던 동화를 20살에는 읽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리뷰를 봐도 ‘아름답고 재밌는데, 예전에 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내가 달라진 것 같다’는 글이 꽤 있다고.
난장이 : 크면서 자연스레 사랑에 대한 생각도, 사랑하는 방식도 달라지겠지. 성인이 된 뒤에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또 변할 테고. 오래 전에 좋아했던 영화나 책을 오랜만에 다시 볼 때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드는 이유도 같지 않을까? 영화나 책의 내용은 그대로이니 달라진 건 세월 속의 나겠지. 하지만 여전히 많은 성인 관객들이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를 찾는 이유는 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이 아닐까? 힘들다는 걸 알지만, 반달이처럼 순수한 사랑을 꿈꾸고, 또는 지키고 싶은 거겠지.
난쟁이 : 그러니까 왜 어릴 때 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느냐고. 좀 더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해야지.
난장이 : <난쟁이들>에서도 왕자가 되고 싶었던 ‘현실적인’ 찰리가 힘든 여정을 다 겪고 마지막에는 인어공주와 함께 다시 난쟁이 마을로 가지 않던가? 참, 인어공주 역시 헌신적인 사랑의 아이콘이지(웃음).
난쟁이 : 대신 찰리는 인어공주를 얻었잖아. 반달이가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을까? 아니, 적어도 작가는 그 사랑에 보답을 해주고 싶었어. 그래서 훗날 백설공주가 진실을 말하는 거울에게 묻게 한 거야.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거울의 대답, 그리고 그 장면이 만들어내는 벅찬 아름다움을 엔딩으로 삼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그렇게나마 반달이의 사랑을 백설공주에게 전해주지 못했다면 반달이도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하고 관객들도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했을 거야. 사랑에도 어떤 식으로든 대가가 있는 거야!
난장이 : 꽤나 가슴 아픈 사랑을 해본 적 있나봐? 아픈 경험이 없는 난쟁이들은 사랑에 대해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을 걸? 어린이들은 이 연극을 보면서 울지 않잖아. 그냥 예쁜 이야기라고 재밌게 볼 거야.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른들이지. 그런 차원에서 올해는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다시 한 번 볼까(웃음)?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