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거리는 지방선거로 요란하다. 흔히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종이 한 장에 개인의 정치적 소견을 표현하여 거대한 정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선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선거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이지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가끔 지나치게 가볍게 여겨지기도 한다.
30여 년 전 대한민국은 민국(民國)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국민의 선거권이 당연하지 않았다. 국민의 뜻이 아니라 총칼로 일어선 군부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거권을 제한했다. 독재자들은 선거로 표출되는 국민의 견제를 폭력과 공포로 겁박한 채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권력을 나눠 가지며 뼛속까지 부패했다.
31년 전인 1987년 6월, 사람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독재의 질곡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말이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거센 열망은 결국 제한받았던 선거권을 쟁취하는 승리로 끝이 났다. 그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 <1987>(감독 장준환, 2017년 작)이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영화 <1987>은 1987년 1월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서 고문을 받다가 죽어간 대학생 박종철(여진구 분) 고문치사사건에서 시작한다. 수배 중이던 대학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쫓던 수사관에게 연행된 박종철(1964~1987)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하고 사망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군화발로 짓밟고 권력을 획득한 전두환 정권은 7여 년 간 수많은 민주투사들을 불법 연행하고 고문했다. 이 시기에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가 수두룩했다. 수사 당국은 박종철의 죽음도 그렇게 묻으려 했다.
당시 독재정권의 광기어린 억압과 횡포는 임계점을 넘고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독재정권이 휘두르는 폭력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 반응과 양심 덕분에 세상에 드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사체를 본 의사, 사체 보존명령을 내린 검사, 부검에 참여했던 검사, 국과수 부검의, 이 사건을 보도한 기자들이 질식할 듯한 사회 분위기에 숨통을 틔워주듯이 차례로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 영화는 실존 인물들에 영화적 캐릭터를 덧입혀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대체로 실제 사건과 인물을 그대로 보여준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중에도 수사당국에 의해 끝없이 은폐, 조작되었다. 박종철의 죽음을 더 이상 쉬쉬할 수 없었던 치안본부장 강민창(우현 분)은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졌다.”고 발표하며 고문 사실을 숨기려 하였다. 당시 강민창의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져”라는 말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오랫동안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잇따른 양심선언으로 박종철이 전기고문과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을 숨기기 어렵게 된 경찰은 서둘러 고문 당사자는 조한경(박휘순 분) 등 2명의 수사관이라고 발표하며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 또 그 와중에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해버렸다.
실제 박종철을 고문한 수사관은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 당시 치안본부 5차장이던 박처원(김윤식 분)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고 2명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이다. 이후 2명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는데, 같은 영등포교도소에 복역하고 있던 민주화 운동가 이부영(김의성 분)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교도관 한재동(유해진 분)과 김정남(설경구 분)을 통해 사건의 내막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에게 전해지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축소 조작에 대한 세상의 분노는 컸다. 분노는 당시 국민적 열망이었던 개헌 문제와 연결되면서 1987년 6월 국민적 요구를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사사건의 조작과 은폐를 밝히는 장면을 보도한 <동아일보>(1987년 5월 22일자)
호헌철폐! 독재타도!!
애초 전두환은 악법 중 악법이던 유신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대통령이 되었다. 일명 체육관선거라고 조롱받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된 것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란 1972년 유신헌법에 따라 설립된 헌법기관으로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2000명 이상 5000명 이하로 구성된 대의원들을 말한다. 명목은 통일 관련 업무를 추진하는 것이었지만, 실체는 국회의원 3분의 1과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박정희 독재를 뒷받침할 목적의 기관이었다. 이미 친여당 인물이 대의원으로 뽑히도록 했고, 대통령 후보는 박정희 단 한 명이었다. 대의원들은 장충체육관에 모여 줄을 서서 찬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박정희는 유신헌법 제정 이후 8대 대통령선거에서 전체 대의원 2,359명이 참석한 가운데 2,357표(무효 2표)를 얻어 대통령에 선출되어 손쉽게 독재를 이어갔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를 반대할 대의원은 없었다.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이런 손쉬운 방법을 바꿀 리 없었다. 그 또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 선거를 통해 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이 된 이후 유신헌법이 악법이라며 개헌을 했는데 그때 독재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대통령 7년 단임제를 정했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신 대통령선거인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선거인단은 이름만 바꿨을 뿐이지 전신인 통일주체국민회의와 다를 바 없는 단체였다. 전두환은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해 체육관 선거로 1년 만에 다시 1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전두환이 7년간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고 나면 그의 군부 후계자가 또 다시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될 판이었다.
1987년 전두환의 7년 독재를 경험한 국민들은 더 이상 독재세력에 정권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민과 야당은 국민들이 제대로 된 선거권을 갖기 위한 개헌을 요구했다.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력이 쉽게 권력을 연장할 방법을 포기할 리 없었다. 전두환은 4월 13일 기존의 헌법을 보호한다는 선언을 했다. 이른바 호헌선언이다. 그러자 국민들은 기존 헌법을 철폐하고 국민의 선거권을 돌려달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호헌철폐! 독재타도!!’이다.
영화에서 전 시대의 폭력 정권에 아버지를 잃고 자기도 모르게 공포에 짓눌려 있던 연희(김태리 분)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대 무리에 의도치 않게 섞이면서 이한열(강동원 분)을 만난다.
또 한 명의 청년, 이한열의 안타까운 죽음
영화에서 연희는 이한열이 속한 만화 동아리에 장밋빛 로맨스를 꿈꾸며 갔다가 1980년 광주를 기록한 영상을 보고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실제 이 영상은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인 힌츠페터가 찍은 <기로에 선 한국>이다. <기로에 선 한국>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암암리에 상영되었고 많은 학생이 그날의 진실을 접하고 분노했다. 영상을 본 후에도 연희는 폭력정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벗어던지지 못했고, 시위대의 구호를 멀게 느낀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가상의 인물은 연희가 유일하다. 연희는 당시 정치 사안에 거리를 두려고 했던 일반 대중의 모습을 체화한 캐릭터이다. 그러나 그녀는 독재정권이 발포하는 최루탄 가스를 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열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영화 말미에 연희는 시위대의 현장에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이한열의 죽음을 목도하고서야 자신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연희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이한열(1966-1987)은 실존 인물이다. 영화에서처럼 그는 만화사랑이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이한열은 연희보다 조금 앞서 독재정권의 실체를 파악하고 민주화를 위해 행동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보다 두 살 많은, 사회에서 만났다면 어깨를 겯는 동료였을지 모를 박종철의 죽음을 애도했고, 박종철을 고문 살해하고 이를 은폐 조작하려 한 정권의 후안무치에 분노했다.
1987년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6.10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신촌 연세대학교 앞에서 열린 시위에서 이한열은 전투경찰이 ‘조준 사격’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진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만 2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한열의 죽음은 박종철에 이어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성과 잔혹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사람들은 또 다른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도도한 역사의 물결에 동참한다.
1987년 6월 9일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가 입고 있던 옷과 신발(출처: 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이 쓰러진 다음날 있었던 6.10 시위에서 이전까지 심정적으로만 시위대를 지지한 사무직 회사원들, 일명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힘겹게 이끌어가던 민주화 운동이 국민적 규모로 확장된 순간이었다. 시위는 6월 10일 이후 20여 일 동안 매일 계속되었고 전국으로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독재정권의 압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민주화운동을 애써 외면해왔던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터트렸다.
1987년 6월항쟁 때 은행협동조합 등 직장인으로 구성된 ‘넥타이 부대’가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결국 6월 29일 전두환 정부는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했다. 대통령 직접선거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 구금된 민주화 인사들의 석방을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이 바로 6월항쟁의 승리로 개정된 헌법이다. 이 헌법의 골간은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이다. 민주주의를 열망한 국민들이 쟁취해낸 장하고 자랑스러운 민주헌법인 것이다. 그러나 지난 31년간 한국 사회는 변했다. 독재를 방지하고자 한 대통령 단임제는 원활한 국정 수행을 어렵게 하는 측면도 있다. 남북 간 화해 분위기 속에서 남북 관계를 새롭게 설정할 필요도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개헌 논의가 대두되었다. 이해득실에 따라 각 당이 주장하는 개헌 내용과 시기 등에 대해서는 잡음이 있지만, 1987년 민주주의의 승리가 가져온 헌법이 이제 그 역할을 다했음은 많은 국민이 공감하고 있다. 독재정권 타도와 독재의 재발을 방지하는 헌법이 아니라 국민 주권 시대에 알맞은 새 헌법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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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이화여자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 『한 번에 읽는 역사인물사전』, 『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 『천추태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한국사 영화관』 등을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