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독자] 할란 엘리슨을 소개합니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저자와 출판사들이 각자의 언어로 책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서점에 놓인 책들은 아직 한국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읽는 사람은 번역자일 것이다. 그리고 번역자야말로 한 줄 한 줄 가장 꼼꼼하게 읽는 독자이기도 하다. 맨 처음 독자, 번역자가 먼저 만난 낯선 책과 저자를 소개한다.
글ㆍ사진 신해경(번역가)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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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작가를 선호하는 번역가와 죽은 작가를 선호하는 번역가가 있다. 하지만 이 사소한 취향은 본인들조차 거의 존중해주지 않는다. 나로 말하자면 죽은 작가를 선호하는 부류에 속하지만 산 작가와도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 애쓰는 편이다.

 

‘할란 엘리슨 걸작선’ 번역 일정 논의를 끝내고 편집자에게 말했다.

 

“할란 엘리슨과 잘 사귀어보겠습니다. 사귀기 힘든 빙퉁그러진 할아버지 같지만.”

 

이왕에 산 작가이니 이메일이라도 주고받으며 작업에 도움을 받겠다는 의미였다. 편집자가 다급하게 답했다.

 

“아니, 사귀지 마세요!”

 

작가와 연락하는 걸 편집자가 말린 일은 처음이었다. 할란 엘리슨은 그런 작가다.

 

할란 엘리슨은 휴고와 네뷸러, 로커스, 브람스토커 등 유명 상들을 수도 없이 받은 명실상부한 장르문학의 그랜드 마스터요, 서적은 물론, 영화, TV, 만화, 게임, 잡지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창작활동을 펼친 의욕 넘치는 실험가이다.

 

그러나 할란 엘리슨은 악명으로 더 유명하다. SF 팬들이 팬덤 외부의 사람들에게 ‘우리 장르가 이렇게 이상하고 독특하다’라는 걸 설명할 때 불려나오는 단골이다. 작문 실력을 지적한 교수를 때리고 대학을 그만둔 뒤로 20여년 동안이나 작품이 나올 때마다 그 교수에게 꼬박꼬박 한 부씩 부쳐준 사람이고, 계약 내용 때문에 갈등을 빚던 편집자에게 벽돌 더미와 죽은 땅다람쥐를 소포로 보내는 사람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군가를 비난하며 싸움을 걸기도 하고, 자기가 주빈인 대형 행사를 난장판으로 만든 적도 있으며, 오랜 세월 지지치도 않고 수많은 영화제작사와 TV방송국과 개인에게 저작권 침해 소송을 걸어댔다. 할란 엘리슨은 아무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아무것도 잊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까칠하고 독한 사람이다.

 

독하기는 그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할란 엘리슨의 세계는 이미 멸망했거나, 멸망으로 치닫는 중이거나, 오지 않는 멸망을 갈구하고, 그 속의 신과 인간 혹은 ‘지능’들은 끊임없이 자신 이외의 존재들을 통제하며 궁극적으로는 창조하고 파괴하는 신 노릇을 욕망하여 저마다의 지옥을 만들어낸다. 그 부조리한 고통과 절망의 순간을 작가는 건조한 시선으로 남들보다 오래 관찰한다. 피와 살점이 난무하고 살인과 고문이 자행되는 출구 없는 지옥의 모습은 할란 엘리슨 세계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아니, 그렇다고 알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1,7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으니, 사실상 할란 엘리슨이 다루지 않은 소재와 주제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본디부터 기성의 것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좋아하는 작가니만큼 문체나 구조 면에서도 여러 실험을 거듭해왔다. 작품들을 읽다 보면 이 작가가 간결하고 상징적인 문장과 한없이 길고 수사적인 문장을 필요에 따라 얼마나 자유자재로 구사하는지 혀를 내두르게 된다. 글의 긴장감이 문장의 어떤 구조에서 피어오르는지, 단어를 어떻게 반복하며 의미와 감정을 점층법적으로 고양시키는지 살펴보는 맛도 쏠쏠하다.

 

그래서 이번에 출간된 걸작선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작가의 모습을 접한다. ‘독한’ 작품들이 워낙 충격적이고 파격적이라 뇌리에 강하게 남을 뿐, 그의 작품 세계는 훨씬 넓고 깊고 실험적이다. 특히 이번 걸작선에서 눈에 띄는 할란 엘리슨은 유한한 시간을 따라 뚝 끊겨나간 오래된 관계들의 거친 단면을 어루만지며 상실의 비애를 감당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단편 몇 개 말고는 한국어로 옮겨진 적이 없는 이 전설적인 작가를 걸작선으로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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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란 엘리슨은 올해 만 83세다. 심장 수술을 받았고 몇 년 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해졌다. 수많은 세계를 창조해내고 숱한 아이디어로 영화계와 게임계 등에 영감을 주고는 독한 소송전을 벌이며 꼼꼼하게 ‘이름’을 남긴 할란 엘리슨이 없는 세계는 조금 심심할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거부부터 하고 시작했던 자타공인 ‘똘아이 천재’ 할란 엘리슨이라면 죽음 또한 거부한 채 신이든 시간이든 아무나 붙잡고 송사 한번 제대로 벌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할란 엘리슨은 그런 작가다.



 

 

제프티는 다섯 살 할란 엘리슨 저 / 신해경, 이수현 공역 | 아작(디자인콤마)
“여기, 진짜가 나타났다.” 중단편만으로 휴고상, 에드거상, 네뷸러상, 브람스토커상, 세계판타지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을 60여 차례나 수상한 SF, 판타지 소설계의 대부이자 살아 있는 전설, 미친 천재 할란 엘리슨의 국내 첫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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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티는 다섯 살 #작가 #출판사 #번역자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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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7

우와- 이 글이 좋아서 책을 읽고 싶어졌어요!!! *.* 진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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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경(번역가)

더 즐겁고 온전한 세계를 꿈꾸는 전문번역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공공정책학을 공부했다. 생태와 환경, 사회, 예술, 노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혁명하는 여자들』, 『사소한 정의』, 『내 플란넬 속옷』,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공역), 『아랍,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버블 차이나』, 『덫에 걸린 유럽』, 『침묵을 위한 시간』, 『북극을 꿈꾸다』,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