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감독
전통적인 유령의 집 이야기를 거대 쇼핑몰이라는 완전히 현대적인 배경과 접목한 특이한 공포 소설 『호러스토어』(원제: Horrorst?)가 출간되었다. 유명한 가구 쇼핑몰 ‘이케아’를 패러디하는 만큼 책은 판형뿐 아니라 상품 일러스트에 배달 주문 신청서, 쇼핑몰 지도까지 외형 또한 카탈로그처럼 꾸며져 있다. 『호러스토어』는 “이케아의 모조품 버전”이라고 소개되는 가구 쇼핑몰 ‘오르스크’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와 공포 한편에 직장인들의 분노와 자조, 블랙 유머를 담은 소설이다.
오하이오주 쿠야호가 카운티에 위치한 대형 가구 판매점 오르스크에서 수상한 일이 벌어진다. 매일 아침 무너진 가구와 뜯겨나간 커튼, 깨진 유리잔 등이 발견되는 것이다. 어느 날 전시된 상품에 오물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한 부지점장 베이즐은 매장 직원인 에이미와 루스 앤에게 그날 밤 함께 경비를 서자고 말한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아무런 의욕 없이 직장에 다니고 있던 에이미는 추가수당에 혹해 밤샘 근무를 수락한다. 그러나 불이 꺼진 뒤 아무도 없는 거대한 매장 안에서는 상상도 못 할 공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 그래디 헨드릭스는 아시아 영화의 열혈 팬으로, 2002년 ‘뉴욕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을 처음 개최한 멤버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헨드릭스와 한국 영화의 만남은 곧 이명세 감독과의 만남이기도 했다. 2000년 뉴욕 영화제 초청작으로 상영된 이명세 감독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본 헨드릭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영화 프로모션 진행자로서, 시나리오 리서처로서, 팬으로서 이명세 감독과의 인연을 이어왔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 <형사>와
부인인 어맨다와 함께 채식주의자인 헨드릭스는 뉴욕에서 잘 알려진 베저테리언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채식주의자인 그가 단 하루 술과 고기를 먹는 날이 바로 이명세 감독과 만나는 날이라고 한다 이명세 감독의 귀띔에 따르면, 헨드릭스는 함께 만나는 영화광 친구들 중 삭힌 홍어를 먹을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처럼 2000년 처음 알게 된 이후로 지금까지 막역한 사이인 이명세 감독이 작가와의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래디 헨드릭스
‘직장’을 호러 소설의 배경으로 가져온 이유
『호러스토어』의 한국에서의 출간을 축하합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바빴습니다! 제 새 소설이 막 페이퍼백으로 출간되었고, 또 『Paperbacks from Hell』이라는 신간이 9월에 나올 예정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있어요. 빠른 시일 내에 한국으로 휴가 가서 같이 술 한잔 하고 싶네요.
작품의 배경이 되는 가구점 ‘오르스크’의 묘사가 굉장히 상세하고 입체적이에요. 소설을 읽는 동안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는데요. 책에 “이케아의 모조품 버전”이라고 나오듯, 이케아 매장을 많이 참고했겠죠. 그래도 이케아와는 다른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야 했을 텐데, 어떤 점에 차이를 두었고 그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취재하는 동안 수많은 이케아 직원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들 모두 이케아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오르스크를 훨씬 안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했어요. 소매점에서 일하면서 겪은 저 자신의 끔찍한 경험들을 한껏 활용했고 이케아 특유의 독특한 점들을 덧붙여 그것들을 과장시켰죠. 예를 들어, 이케아 매장은 고객들이 혼란스러워하고 길을 잃게 디자인되어 있어요. 매장을 가로지르는 통로는 고작 몇 미터 가다가 계속 코너가 나오죠. ‘그루엔 전이’라고 불리는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서예요. 쇼핑몰 디자이너들과 카지노 설계자들이 배우는 심리 테크닉입니다. 고객이 방향감각을 상실하면 더 천천히 걷게 되고, 제안되는 것들에 더 오픈된다는 거죠.
드라마나 영화화 제의는 없었나요? 내가 기억하기로 부산영화제에서 이미 영화화 판권이 할리우드에 팔린 것으로 아는데……?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를 제작한 게일 버먼이 판권 옵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존 말코비치 되기>의 찰리 카우프먼, <가십걸>의 조시 슈워츠와 함께 TV드라마로 제작하고자 하는데요, 하지만 저보다 더 잘 아시듯이 영화나 드라마가 되기까지 보통 수년씩 걸리잖아요.
『호러스토어』는 현대 직장인을 죄수에, 거대 가구 매장을 19세기 감옥에 비유한 그로테스크 블랙코미디잖아요. ‘직장’을 호러 소설의 배경으로 가져온 이유는 뭔가요?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전부 어디에 쓸까요? 우리 대부분은 가족들보다 직장 동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죠. 집보다 사무실이 더 익숙하고요.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매일 8시간 혹은 10시간씩 직장에서 보내면서 정작 자녀들과는 한두 시간 놀아줄까 말까 하잖아요. 우리가 만들어낸 무척 이상한 시스템입니다.
뒤로 갈수록 19세기 고문 도구와 접목시킨 가구들이 소개되잖아요. 굉장히 기발한 상상력이더군요. 이런 ‘고문용 가구’들은 어떻게 생각해낸 건가요?
북디자이너인 앤디 리드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가 각 챕터가 시작될 때마다 가구 그림을 넣고 싶다고 했고, 저는 그 가구들이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고문 기구가 되면 멋지겠다고 생각했어요. 19세기에 죄수들에게 노역을 시키려고 수많은 고문 기구가 디자인되었잖아요. 크랭크를 돌린다든가, 디딜방아 안에서 걷는다든가……. 하지만 어떤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하죠. 디딜방아는 아무것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거예요. 크랭크는 모래 상자 안에 있었고요. 의미 없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거예요. 저에게는 그게 바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과 같았죠!
직장 동료들한테 냉소적이었던 주인공이 오르스크의 ‘숨겨진 실체’를 알고 나서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분노하고 사라진 동료들을 찾아 나서는 모습이 인상적이더군요. 만약 본인이 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 것 같나요? 동료들을 찾으러 지옥으로 다시 들어갈 건가요?(웃음)
절 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제가 에이미였다면 도망쳤을 거예요. 전 겁쟁이잖아요!
소설에 교령회(분신사바) 장면이 나오잖아요. 실제로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나요? 생각해보니 뉴욕에 있을 때 나를 한 번 초청한 적 있었던 심령 연구소(사이킥 연구소)에서도 그와 같은 의식이 있지 않았나요? 만약 교령회를 한다면 누구의 혼령을 불러내고 싶은지?(웃음)
감독님과 함께하는 교령회라면 당연히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혼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감독님의 꿈에 히치콕이 나타나 어떻게 영향을 줬는지 얘기해주셨을 때 저는 예술가에게는 자기 작품의 영감을 찾는 창조적 교령회를 열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등장인물 대부분이 어떻게 보면 사회적 소수자랄까, 주인공 에이미는 백인 ‘여성’이고 베이즐 부지점장은 ‘흑인’, 루스 앤은 ‘나이 든 비혼’ 여성, 트리니티는 ‘아시아계(한국계)’ 여성이잖아요. 백인 남성인 맷을 제외하면 말이에요. 미국이란 나라가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있긴 하지만,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들이 이렇게 설정된 경우는 드물죠. 이런 설정은 의도한 건가요?
그것은 분명히 의도적이었습니다. 미국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영화나 책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요. 왜 그런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죠. 이 다양한 사람들 모두가 각각 흥미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내 주변에서 매일 보는 이 다양한 사람들과 닮은 인물들을 책 속에서 그리지 않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번에 『호러스토어』로 한국에서 첫 책을 출간하게 됐죠. 한국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수년간, 한국 영화들은 제게 큰 기쁨을 줬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 이수연 감독의 <4인용 식탁>, 감독님의 영화들까지요. 드디어 제 작품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쁩니다.
이명세(영화감독)
1988년 데뷔작 <개그맨>을 시작으로 <나의 사랑 나의 신부>(아태영화제 등 신인감독상), <첫사랑>(청룡영화제 각본상, 아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남자는 괴로워>, <지독한 사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도빌아시아영화제 대상 및 감독상, 후쿠오카아시아영화제 그랑프리), <형사>(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 작품상 및 감독상, 백상예술대상 감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