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생각이든 언어로 옮기려하면 불완전하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든 언어로 옮겨놓으면 확실해진다. 언어는 언어와 침묵으로 나뉜다. 언어의 끝은 침묵이고 시작도 침묵이다. 언어는 침묵에서 비롯된다. 자기가 태어난 세상이니 언어만큼 침묵을 잘 알 수 있는 것도 없을 테다. 침묵만큼 무한하고 많은 것을 품고 있는 것이 또 있으랴. 그러나 언어로 새겨지는 침묵이어야 비로소 침묵이 되는 것.
어떤 나방은 잠든 새의 눈물을 먹는다. 사위는 어두워야 하고, 새는 잠들어 있어야 하고, 나방은 그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핥아먹어야 한다. 나는 때로 이런 의미부여가 신물 나지만, 또한 그 이미지 없이 우리가 어떤 쾌감과 어떤 슬픔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떤 나방이 잠든 새의 눈물을 먹는다 한들, 그것을 언어로 옮기지 않았다면 그 이미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 그것들은 다 침묵이었으리. 그것들은 모두 잠든 우주의 일이었으리. 나방이 눈물을 핥아먹지 않았다면 소설은 태어날 수 없으리. 살아갈수록 언어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인 것일까.
살아갈수록 소설이 애틋해지고, 소설을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 그것이 소설가로 살아가는 일일까.
소설 하나를 끝내기 직전, 다른 소설을 생각한다. 그 하나의 소설에서 하지 못했던 언어들이 또 하나의 소설을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슬픔은 타인의 슬픔에 가닿고 타인의 슬픔은 내게 그 슬픔에 깊이 침잠하게 만든다. 그렇게 깊이 빠져있는 동안 나는 새로운 소설을 꼼지락꼼지락 주무르고 있다. 다음 소설은 아마도 모든 것에 실패하고 지방의 낡은 호텔에 숨어든 여자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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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구(HANJUNGKU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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