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는 시간
차의 시간은 대화의 시간이고, 그 시간은 ‘한 잔의 차’로 끝나는 일이 없이 반복됨으로써 유장한 리듬을 만든다.
글ㆍ사진 함돈균(문학평론가)
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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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냈건만 답장이 없구료. 산 중에 바쁜 일도 없을진대, 나 같은 속세 사람과 어울리지 않을 생각으로 외면하는 것인가. (중략) 이번에 다시 한 번 차를 재촉하니, 편지는 함께 보낼 필요 없고, 오직 두 해 동안 쌓인 빚을 한꺼번에 보내주시게나. 또 다시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이 해야 할 것이네.

 

이보시오, 일지암의 대머리. 부처님을 모시는 몸이 이토록 신통력이 없단 말인가. 꼭 말을 해야 알아듣는가. 초의차가 떨어져 마시질 못하니 혀에 바늘이 돋고 정신이 멍해지고 있소. 초의차를 보내지 않으면 당장 일지암으로 말을 몰고 달려가 차밭을 모두 밟아버리겠소.
- 추사 김정희가 일지암의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땅끝 유배지를 조선 후기 지성사의 거점으로 만들었던 두 사람 간에 오간 편지다. 추사 김정희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가 주인공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 한 사회가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신의 힘과 자정능력을 잃게 될 때, 깨끗하고 경륜을 갖춘 지식인들은 불행해진다. 당쟁에 시달리다 결국 제주도로 유배가게 된 19세기 지식인 추사도 그랬다. 그러나 제주로 유배 가는 길 한반도 땅끝에는 해남 대흥사 일지암이 있었다. 거기에는 그의 평생 친구인 초의가 있었다. 초의는 역시 당쟁의 와중에 이 근방 강진에 유배된 다산 정약용의 애제자였다.


추사와 초의가 일지암에 앉아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뛰어난 학식과 국가경륜의 능력과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겨우 목숨을 부지한 불우한 선비이고, 또 한 사람 역시 사물에 대한 탁월한 직관과 학식과 예술혼을 지니고 있으나 조선조 내내 문명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던 변방 종교인이다. 아마 두 사람은 밤이 새도록 기울어가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그러다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주의 이법과 사물에 관한 그들의 직관을 나누었을 것이다. 초저녁에 시작한 대화는 암탉이 울도록 계속 되었을 것이고, 깊은 생각은 넒은 세계를 포괄했으리라.


모든 대화에는 대화를 촉진시키고 지속시키는 매개물이 있는 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술은 대화를 중계하는 좋은 매개물 역할을 한다. 술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사람의 정신을 흐릿하게 해서 명증한 의식을 누그러뜨리고, 너와 나의 경계를 무화시키면서 대화자 두 사람을 ‘섞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사람과 사람을 쉽게 친해지게 하는 힘인 동시에 사람을 취하게 함으로써 대화의 깊이와 강도는 느슨해진다. 사찰인 일지암에서 이뤄진 그 둘 사이의 대화가 술을 매개로 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무엇이 그들의 대화를 매개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 바로 차다.

 

차를 마시는 시간은 여러 모로 특별하다. 그것은 술을 마시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다. 좋은 찻잎을 따서 맑고 깨끗한 물에 우려낸 차는 정신을 맑게 한다. 이 맑은 정신은 물맛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물맛’을 통해 맑은 ‘물’은 주체들의 몸속으로 삼투된다.


맑은 정신들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는 명증한 이성들 간의 대화다. 명증한 이성들 간의 대화는 서로의 논리를 교환한다. 그 논리들은 대화 속에서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다. 대체로 논리들의 교환은 깊어지는 순간 서로 부딪히게 된다. 명증한 이성들 간의 대화에서 논리와 논리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논리의 충돌은 대화하는 두 주체들 간의 의지가 부딪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고, 여기에서 대화는 날카로워지고 피로해질 수도 있다. ‘차’를 매개로 한 만남의 시간은 명증한 이성을 고취시키되, 자칫하면 날카로워질 수 있는 주체들 사이를 그윽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여기에서는 차의 ‘향’이 특히 그런 중요한 구실을 한다. 미각과 후각을 통해 들어오는 향이 의식의 명증성을 예민하게 조정하고 완화시킨다. 차의 향은 ‘머리’ 외에 다른 감각을 개방하고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분산시킨다.


중요한 것은 향을 통한 미각과 후각의 개방만이 아니다. 감각의 분산과 개방은 촉각을 통해서도 이뤄진다. 촉각이라고? 그렇다. 동아시아의 차는 오늘날 현대인의 기호식품이 된 커피와는 달리 아주 작은 잔을 사용한다. 현대의 일반화된 머그컵이 아닌 클래식 커피잔이라 하더라도 커피잔은 찻잔보다는 훨씬 크다. 차를 마시는 잔은 대체로 작다. 이것은 아마도 차를 우려내어 여러 번 반복해서 따라 마시게끔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찻잎이 우려진 큰 다기에서 주인은 객의 작은 찻잔에 차를 따라준다. 객이 마신 후에 주인은 다시 객의 찻잔을 따뜻하게 채워준다. 손과 객이 차를 따라주고 따라 마시는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다기를 자주 만지게 되며, 이 만지는 일 자체가 만남의 과정이 되는 게 차를 마시는 시간이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과는 달리 차의 시간은 대화의 시간만큼이나 지속될 수 있고, 역으로 대화의 시간이 이로 인해 계속 늘어날 수 있는 것은 찻잔을 따뜻하게 채우는 일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시간은 차를 마시는 시간에 비례해서 계속 늘어날 수 있다. 커피는 ‘한 잔’이고, 따라놓은 커피는 식지만, 차의 시간은 ‘처음처럼’ 따뜻하게 반복된다. 차가 식지 않는 한 차의 향기도 식지 않고 대화의 그윽함도 사라지지 않는다. 차의 반복 형식이 ‘시간’을 만든다. 차에서는 이 시간이 그대로 만남의 시간이다.

 

추사와 초의의 대화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의 만남은 차 없이도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차를 나누는 시간이 그들의 대화를 더욱 향기 있게 지속시키고, 탁월하고 명증한 두 지성의 만남이 날카로운 이성으로 깊어지되 대립으로 가지 않게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으리라. 유장한 만남에는 그러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고 촉진시키는 유장한 리듬의 형식이 있다. 그러한 리듬의 형식이 ‘시간’을 만든다. ‘리듬’이란 그 자체가 ‘시간’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가 초의에게 보내는 저 익살맞은 편지가 친구보다도 ‘차’를 더 그리워하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차가 단순한 물리적(공간적) 사물이 아니라, ‘차의 시간’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의 시간은 대화의 시간이고, 그 시간은 ‘한 잔의 차’로 끝나는 일이 없이 반복됨으로써 유장한 리듬을 만든다. 설령 제주로 유배 간 추사가 초의의 차를 받아서 혼자 마신다 하더라도, 차의 시간은 반복적 리듬으로 구성된다. 혼자서 차를 마셔도 자기 자신과의 형기 있는 대화의 심화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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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