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가제도를 규정한 최고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왕의 아들과 딸들은 이렇게 봉작되었다. 우선 왕의 본부인인 왕비가 출산한 아들은 대군大君이 되었다. 대군을 봉작하는 연한은 따로 없었고 적당한 시기에 봉작하도록 하였다. 이에 비해 왕의 후궁이 낳은 아들은 군君이 되었는데, 이들은 7살이 되면 봉작되었다. 공주와 옹주 역시 대군과 마찬가지로 봉작하는 연한이 따로 없었다.
대군과 공주 그리고 옹주의 봉작 연한을 따로 정하지 않은 것은 이들에 대한 봉작을 신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원칙은 있었다. 즉 대군의 봉작은 대체로 왕자군이 봉작되는 7세보다 이른 나이에 이루어졌고, 공주와 옹주의 봉작은 군주와 현주가 봉작되는 10세보다 이른 나이에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공주 또는 옹주는 8살 전후로 봉작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곱게 단장한 드라마 <화정>속 정명공주의 어린 시절.
정명은 선조의 예쁨을 받아 2살에 공주로 임명받았다.
조선시대 공주 또는 대군의 봉작은 왕의 명령으로 거행되었다. 조선시대 왕의 자녀가 봉작된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관작을 받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관작을 받으면 그에 상응하는 토지와 녹봉을 받았다. 대군, 군, 공주, 옹주는 9품의 품계를 넘는 무품계無品階로 서열상 영의정이나 좌의정, 우의정보다 높았다. 따라서 대군, 군, 공주, 옹주 등에 봉작되면 삼정승보다 더 많은 토지와 녹봉을 받았다. 그러므로 공주나 대군에 봉작되는 것은 형식적인 명예만 받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실익을 받는 것이었다. 반면 국가 재정에는 막대한 부담이 되었기에 일반적으로 공주 또는 옹주는 8살 전후에 봉작되었다.
그렇지만 정명공주는 8살이 아니라 2살에 봉작되었다. 조선시대에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일이었다. 물론 정명공주에 대한 선조의 사랑이 가져온 파격이었다. 조선왕실의 관행에 비추어 본다면 공주의 작호인 정명貞明은 선조가 결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는 공주가 바르고貞 밝게明 자라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정명이라 지었을 듯하다.
공주 또는 대군에 봉작되면 임명장인 교지를 받고, 봉작에 수반되는 토지와 녹봉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독립적인 생활단위로 간주되어 ‘방房’이라고 불렸다. 예컨대 정명공주의 방은 공주방 또는 정명공주방으로 불렸다.
정명공주는 2살에 봉작된 후 공주방에 소속된 10명의 궁녀들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봉작에 따른 전결과 노비 및 공상을 받았다. 정명공주는 2살 때부터 명실상부한 천석꾼으로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거부가 되었는데 이는 선조의 지극한 사랑이 가져온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공주로 임명한다는 왕의 임명장,
사진은 효종의 둘째딸 숙신옹주의 추증교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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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
1965년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 역사를 특히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강원대학교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공부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왕실사를 전공하여 『조선초기 왕실편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를 거쳐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lyonin
2015.06.29
감귤
2015.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