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공주가 태어난 1603년은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부터 겨우 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7년간 지속된 전쟁의 상흔이 조선팔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한양 궁궐 역시 그 상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선조가 한양에 입성했을 때는 제대로 남아있는 궁궐이 없었다. 왜적들이 한양을 점령했을 때 경복궁과 창덕궁 등 모든 궁궐을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에서 거처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정릉동의 월산대군 집이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어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1593년 10월 1일 선조가 월산대군 집에 입주하면서 그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행궁이란 임시 궁궐이란 뜻이었다. 정릉동 행궁은 전쟁이 끝나고 형편이 좋아져 정식 궁궐을 다시 지을 때까지 임시로 쓴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정릉동 행궁에 입주한 선조는 16년이 지나도록 정식 궁궐을 짓지 못했다. 그 사이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고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했는데, 재혼 1년 만에 정명공주가 태어났다.
선조가 인목왕후 김씨와 정릉동 행궁에서 초야를 치른 때는 1602년 7월 13일이었다. 선조가 정릉동 행궁에 입주한 지 만 9년째였다. 당시 선조는 51세였고 인목왕후 김씨는 19세였다.
정명공주는 서기 1603년(선조 36년)에 태어났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왕후가 재혼한 1602년 7월 13일로부터 딱 10개월 만인 1603년 5월 19일에 태어났다. 물론 태어난 장소는 정릉동 행궁이었다. 간지로 보면 그 해는 계묘년이라, 정명공주는 토끼띠였다. 토끼띠는 착한 성품을 타고나며 감수성이 뛰어나고 예능 계통에 재능을 보인다고 한다. 정명공주 역시 다른 토끼띠들처럼 착한 성품에 뛰어난 감수성을 타고났던 것 같다. 그러나 정명공주가 태어난 시점은 토끼띠들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공주의 생활환경 역시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선조가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했을 때는 물론 정명공주가 태어났을 때에도 파란이 일어났다.
선조가 인목왕후와 재혼하자 광해군의 처가 쪽 사람들은 혹시라도 인목왕후가 아들을 낳을까 두려워했다. 당시 선조와 세자 광해군의 관계가 그렇게 정답지가 않은데다, 세자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은 선조가 새로 태어난 아들을 세자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불운하게도 정명공주가 태어난 시점이 바로 그런 때였다.
대군이 아닌 공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광해군 쪽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정명공주의 임신과 출산에 광해군 쪽 사람들은 울고 웃었던 셈이다.
선조와 인목왕후에게 정명공주의 탄생은 크나큰 기쁨이었다. 특히 선조에게 큰 기쁨이었다. 정명공주가 태어났을 때 선조는 52살이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많은 나이였다. 정명공주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여러 면에서 파격적이었는데 특히 공주 봉작이라는 면에서 두드러졌다.
조선시대 공주 또는 대군의 봉작은 왕의 명령으로 거행되었다. 조선시대 왕의 자녀가 봉작된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관작을 받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관작을 받으면 그에 상응하는 토지와 녹봉을 받았다. 대군, 군, 공주, 옹주는 9품의 품계를 넘는 무품계無品階로서 서열상 영의정이나 좌의정, 우의정보다 높았다. 따라서 대군, 군, 공주, 옹주 등에 봉작되면 삼정승보다 더 많은 토지와 녹봉을 받았다. 그러므로 공주나 대군에 봉작되는 것은 형식적인 명예만 받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실익을 받는 것이었다. 반면 국가 재정에는 막대한 부담이 되었기에 일반적으로 공주 또는 옹주는 8살 전후에 봉작되었다.
정명공주는 2살에 봉작된 후 공주방에 소속된 10명의 궁녀들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봉작에 따른 전결과 노비 및 공상을 받았다. 정명공주는 2살 때부터 명실상부한 천석꾼으로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거부가 되었는데 이는 선조의 지극한 사랑이 가져온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
화정, 정명공주신명호 저 | 생각정거장
요즘 드라마 〈화정〉으로 인해 17세기 조선왕실의 역사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당대 여성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될 만큼 뛰어난 필체로 남자보다 더 기개 있는 작품을 후대에 남긴 정명공주. 파란만장한 그녀의 일대기를 통해 17세기 혼란의 조선, 궐에서 일어난 음모와 암투의 역사를 살펴보고 어떻게 위기를 이겨냈는지 역사 속 이야기를 살펴본다.
[추천 기사]
- 책따라고 놀리지 말라!
- 노래 속 전파 찾기
- 『노인의 전쟁』전쟁터에 선 노인들
- 『B파일』 밤새 안녕하셨나요
- 『1984』감시사회에서 살아가기
신명호
1965년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 역사를 특히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강원대학교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공부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왕실사를 전공하여 『조선초기 왕실편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를 거쳐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