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어른이 된, 한때는 어벤져스였던 그들의 이야기
빨간 망토 하나면 무서울 게 없었다. 그걸 두르는 순간 나는 무적의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장롱에서 꺼낸 빨간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우리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놀이터 미끄럼틀에 올라 발아래를 굽어 봤다.
글ㆍ사진 전건우
201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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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빨간 망토


빨간 망토 하나면 무서울 게 없었다. 그걸 두르는 순간 나는 무적의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장롱에서 꺼낸 빨간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우리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놀이터 미끄럼틀에 올라 발아래를 굽어 봤다. 높디높은 산복도로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부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바다가 넘실거렸다. 크고 작은 건물들 사이로 자동차들이 줄을 이었고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갔다. 누군가가 도움을 청할지도 모를 일이기에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 도시의 구석구석을 노려봤다. 해풍이 거센 날에는 망토가 속절없이 나부꼈다.

 
슈퍼 히어로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출동 준비가 되었건만 어머니 심부름으로 시장에 가서 콩나물을 사 올 때 외에는 출동할 곳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머지않아 미끄럼틀 위에서 내려왔다. 망토는 다시 장롱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슈퍼 히어로라는 사실을 숨긴 채 공부에 매진했다. 산복도로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 깨달아 가던 시기였다.


그렇게 나는 영원히 ‘클라크 켄트’가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슈퍼 히어로들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어린 시절에는 바지 위에 팬티를 걸치고 하늘을 날던 <슈퍼맨>이 최고의 히어로였다. <스타워즈>의 ‘제다이’들도 내게는 슈퍼 히어로였다. 늘 벌레 씹은 표정으로 다니던 <배트맨>도,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플래시맨>과 거미줄을 쏘아대던 <스파이더맨>도 나를 설레게 만든 영웅들이었다. <600만 불의 사나이>나 <두 얼굴의 사나이>, 그리고 <소머즈>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들이 내게 남겨 준 유산은 어마어마했다. 나는 힘세고 정의로운데다가 멋지기까지 한 그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망토를 봉인한 채 평범하게 살아가는 나대신 또 다른 누군가가 열심히 지구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모르게 든든했고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쓸쓸했다.


그 오묘한 감정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울에 직장을 잡고 고시원 생활을 해 나가던 스물여덟 무렵, 나는 좁은 침대에 누워 매일 밤 상념에 젖었다.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그것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얼굴도 모르는 이의 방귀 뀌는 소리를 참아내는 일이었으며 언제 올지 모르는 먼 미래를 위해 먹고 싶은 것들을 참아가며 돈을 모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일 년 남짓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슈퍼 히어로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열광했던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와 소설 속 슈퍼 히어로들은 죄다 ‘어린아이’였다. 겉모습이야 나이가 들었지만 적어도 그들의 마음만은 자라지 않았다. 인간이 선하다고만 믿는 슈퍼맨이 그랬고 억만장자이면서도 매일 밤 변장을 하고 히어로 놀이를 하는 배트맨 역시 그랬으며 21세기 들어 새롭게 만난 히어로들, <엑스맨>이나 <아이언맨>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른이 할 만 한 고민을 품지 않았다. 고시원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거나 찬밥에 물을 말아 후루룩 삼키는 슈퍼 히어로는 한 명도 없었다.


세계 평화, 악당 섬멸, 전쟁 종식, 질병 퇴치, 그리고 기타 등등. 슈퍼 히어로들의 고민은 거대하고 단순했다. 무릇 어른이라면 콧방귀나 뀔 고민들이었다. 자고로 어른이란 카드 대금, 주택 청약, 승진 고가, 로또 번호 등의 고민을 해야 정상인 법.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평범한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이었으며, 또한 평생 하게 될 일이었다.

 

 

어른이 된 히어로들의 이야기, 『이웃집 슈퍼 히어로』


<어벤져스 2: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속도가 무척 놀랍다. 더군다나 영화의 평이 갈리는 상황에서도 외화 중 최단 시일에 천만을 돌파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관객들이 슈퍼 히어로 영화에 가지는 애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02년에 개봉한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에서부터 서서히 관객을 사로잡기 시작한 이른바 ‘슈퍼 히어로 무비’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시리즈와 마블의 <아이언맨>, <인크레더블 헐크>, <퍼스트 어벤져> 등을 거치면서 몸집을 키워왔다. 급기야 2012년에 개봉한 <어벤져스>가 대박을 터트리면서 우리나라 관객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이제는 매 해 새롭게 찾아오는 슈퍼 히어로 영화를 기다리는 게 연례행사처럼 되어 버렸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이 여러 명의 슈퍼 히어로들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생고생을 할 것이며 관객들은 그 모습을 보며 기꺼이 열광할 것이다.


한때 슈퍼 히어로가 되기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나 역시 극장에 걸리는 슈퍼 히어로 영화들을 놓치지 않고 챙겨본다. 그런 영화들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쾌감은 2시간 조금 넘는 상영 시간 동안 현실의 나를 완전히 잊을 만큼 짜릿하며 폭발적이다. 아이언맨의 농담에 키득거리고 헐크의 무시무시한 힘에 환호하며 캡틴 아메리카의 희생에 감동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흘러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온다. 길고 긴 엔딩 크레디트 뒤의 쿠키 영상까지 확인하고 나면 비로소 영화 관람은 끝난다. 스크린은 어두워지고 객석에는 불이 들어온다.


그때가 되면 관객들은 현실로 돌아온다. 환한 불빛 아래 드러난 서로의 민낯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도 바로 그때이다. 슈퍼 히어로들의 천진난만한 고민들을 뒤로하고 현실의 고민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도 역시 그때이다.


다시 어른으로 돌아가는 순간도 그때이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SF 단편집이웃집 슈퍼 히어로』가 출간됐다. 국내 SF 소설에 관심이 있던 독자라면 익히 알만 한 김보영, 진산, 좌백, 듀나, 김이환 등의 유명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오랜만에 선보이는 국내 창작 SF 단편집이기에 출간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제가 ‘슈퍼 히어로’라고 하니 도저히 안 읽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서양의 각종 슈퍼 히어로들이 도맡아 지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작가들은 어떤 히어로들을 창조했을까? 어떤 식으로 차별화를 했을까? 나라면 어떤 이야기를 썼을까? 몇 가지 궁금증과 호기심을 동시에 품으며 지난 주 내내 『이웃집 슈퍼 히어로』를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보통의 슈퍼 히어로 물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 아홉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슈퍼 히어로들은(책에서는 ‘초인’이라는 친근한 단어를 사용한다) 광속으로 움직이고, 어마어마한 힘을 자랑하고, 바람을 조정하고, 생리의 힘을 빌려 악당을 물리치는 등 ‘어벤져스’ 못지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슈퍼 히어로들의 능력으로만 놓고 본다면 마블이나 DC 코믹스의 수많은 만화처럼 장대한 스케일의 활극으로 뻗어나갈 것만 같다. 하지만 <이웃집 슈퍼 히어로>는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 길로 가기에는, 작품들 속 슈퍼 히어로들이 너무 늙었다.


그렇다. 『이웃집 슈퍼 히어로』에 등장하는 ‘초인’들은 모두 어른이다. 한때는 세계 평화와 악당 퇴치에만 골똘했을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모두 어른이 되어서 또 다른 고민에 빠져 산다. 그들의 고뇌는 제법 깊고 또한 현실적이다. 누군가는 남녀차별에 대해 고민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또 누군가는 바뀌지 않는 국가에 대해 고민한다. 고민하고 고민할수록 이야기는 묘하게 현실성을 띤다. SF 소설임에 분명하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사건들이 터져 나온다. 어른이 되어 버린 슈퍼 히어로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지리멸렬한 싸움을 벌인다.


『이웃집 슈퍼 히어로』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그 옛날의 빨간 망토, 그러니까 사실은 어머니의 낡은 보자기였던 그 물건이 떠올랐다. 빨간색 망토는 그 후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진짜 슈퍼 히어로의 손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하게 아는 것은 내가 그 망토와 결별한 이후 (생물학적인 성장과는 상관없이)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나는 <어벤져스>의 활극보다도 이 책의 고민이 조금 더 와 닿았다. 실제로 몇 작품들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한때는 슈퍼 히어로였으나 이제는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을 위한 심심한 위로,『이웃집 슈퍼 히어로』는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슈퍼 히어로들이 고민을 한다고 해서 이야기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이웃집 슈퍼 히어로』 속 아홉 작품들은 하나같이 흥미진진하고 재기발랄하다. 심지어는 뒤에 붙은 해설까지 재미있다. 의미심장한 주제 의식을 찾아내는 재미는 덤이다.

 

여전히 ‘파워레인저’가 되기를 소망하는 아들은 자신이 강해지기 전에 악당에 의해 지구가 멸망할까 봐 매일 밤 걱정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걱정 말라고, 악당 역시 할 일이 많기에 그렇게 쉽게 지구를 멸망시키지는 못할 거라고. 그러면 아들은 이렇게 묻는다.


“아빠. 나 도와서 같이 싸워 줄 거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면 아들은 힘껏 하이파이브를 한다. 어쩌면 아직은 슈퍼 히어로의 꿈을 접을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나는 아들을 보며 생각한다. 녀석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금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다짐한다.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나만의 빨간 망토를 다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혹은 바지 위에 팬티를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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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슈퍼히어로 김보영 편/김보영,좌백,듀나,진산,김이환,dcdc,김수륜,이수현,이서영 공저 | 황금가지
'슈퍼히어로'를 소재로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개성넘치는 필력을 선보인 창작 단편집 『이웃집 슈퍼히어로』가 출간되었다. 국가적 재난에도 초인적 능력으로 수백의 생명을 구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위정자를 응징하며, 패악을 일삼는 악인을 처단하는 정의감까지 갖춘 '슈퍼히어로'. 그러나 강인하고 화려해 보이는 가면 뒤로 숨겨진 '슈퍼히어로'의 민낯이 『이웃집 슈퍼히어로』를 통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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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이웃집 슈퍼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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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우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