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진,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참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1989년 민중극단 ‘처제의 사생활’로 데뷔하여 서울연극제 우수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더니 1994년 영화 <태백산맥>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1995년 영화 <301 302>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더니만 2005년 <오로라 공주>로 입봉하여 <용의자 X>, 2012년 <집으로 가는 길>까지 3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요즘은 <슬픈 인연>을 통해 16년 만에 연극배우 활동을 재개했다. 팔색조처럼 변화무쌍한 그녀가 최근 자전에세이 『라마야 기다려』를 펴냈다.
책에 실린 저자 소개처럼 그녀는 언젠가 우주에서 영화를 찍고 싶다는 바람을 간직한 채 자신의 역작을 향해 쉼 없는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라마는 항상 도전하는 그녀와 함께한 반려견이다. 방은진 감독은 라마와 지내면서 여러 영화를 만들었다. 그녀 주변에서 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라마는 묵묵히 기다려줬는데, 어느덧 노견이 된 라마에게서 저자는 많은 걸 배웠다. 그중에서 가장 큰 가르침은 살아가는 법이었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사랑을 하고 꿈을 꾸며 찬란하게 빛나던 순간들과 시련을 견디고 상처가 아물기까지 가슴 저미도록 흘려보낸 순간들이 씨실과 날실로 교차하는 것이 인생의 현장이란 것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종종 잊는다. 그 현장의 가장자리에서 우리가 고단한 여정을 마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_「라마야 기다려」 중에서
첫 번째 에세이를 쓰셨는데요. 글쓰는 과정은 어땠나요.
라마가 10살 때부터 편지처럼 쓰기 시작했던 책인데 이제는 인생이 보태져서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친한 감독 말을 빌리자면 ‘라마를 빙자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고 하더군요. 제가 감독으로 데뷔는 2005년도에 했지만 사실은 2001년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학창시절 문학소녀였다는 것과는 또 다르게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은 지난하고 어려운 일이더군요. 하지만 시나리오는 계속 써오던 것이었고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것인데 반해 『라마야 기다려』는 온전히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막상 내 이야기를 녹아내려고 하니 많은 시간을 반추해야 했습니다. 일주일에 3챕터씩 꾸준히 집필했으며 1,500매 분량의 글을 썼습니다. 책은 반을 줄인 분량입니다. 촬영을 하면서 2시간짜리 영화면 3시간 분을 촬영해서 사운드를 입히고 편집을 해서 좋은 영화를 만든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책을 보니 감독님의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드러내셨는데요.
굉장히 솔직히 썼고요. 그래서 출판사에서는 좀 부담스럽기도 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를 솔직히 다 드러내서 보여줬습니다. 왜 그리 솔직했을까… (웃음)
라마가 감독님 반려견이죠? 제목에 관해서도 설명해주세요.
반려견이라는 용어 자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지는 몇 년 안됐어요. 예전에는 애완견이라고 불렀던 거 같아요. 대형견을 키우는 입장에서는 애완견이라는 말이 잘 안 어울려요. 집안을 숙숙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뛰는 것도 벙벙 느낌이 다르거든요. 어쨌든 그 존재감 자체가 사람 이상으로 공기를 가르는 느낌이 있습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할 텐데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기다려'입니다. 나갈 때도, 밥 먹을 때도, 산책을 갈 때도 '기다려'를 먼저 하죠. 하루에 몇 십 번도 더 하는 것 같아요. 그 말이 때로는 얼마나 잔인한가하는 생각을 어느 날 하게 됐어요. 왜 애는 나를 계속 기다려야 하지? 너무 불평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많이 미안해졌어요. 특히 대형견의 수명이 10년인데 10살 넘은 라마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기다려’이기도 하구요.
라마는 몇 살인가요. 라마와 함께한 그 시간이 영화감독으로 거듭나는 시간이었을 텐데요.
라마는 14살이에요. 처음 데리고 왔을 때 3개월 반이었어요. 골든 리트리버예요. 지금도 크지만 그때도 되게 컸어요. 라마가 참 복 받은 게 감독으로 데뷔할 때까지 5년 걸렸는데 그 사이 시나리오 작업을 했거든요. 이걸로 안 된다고 하면 다시 중단했다가 아이템 찾고 뭐하고 집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나가서 회의를 한다고 해도 감독이 될지 어떨지도 모르고. 그래서 라마와 참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걸었고, 여행하고. 같이 안 다닌 곳이 없었어요.
대형견이 되면 어디 가방에 넣고 숨겨서 넣고 다니는 건 불가능해요. (웃음) 라마는 조용하고 많이 순해요. 그리고 고고해요. 요즘은 굉장히 많이 짖어요. 예민하고 안 보이고 안 들려서 그런가 봐요. 이상한 감촉이 느껴지면 계속 짖어요. 아주 아주 컹컹 크게 짖어요. 시끄러울 정도로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앉혀놓고 말씀드릴 때의 느낌이에요. 그런데 평소에 하는 행동은 똑같아요. 장난감 물고 오고 하는 거요.
책에도 쓰셨지만, 감독님이 라마에게서 배운 점은 무엇인지요.
함께 제일 오래 살았던, 사람과 동물을 통틀어 가장 함께 오래 살았던 개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어떤 인내, 제가 가지고 있지 못했던 그런 것이죠. 전 굉장히 성격이 급하고요. 말이 나온 즉시에 뭔가 되어야 해요. 그렇게 해서 얻는 것도 있는데 하다 보면 굉장히 잘못된 길로 가는 경우도 많아요. 이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경우도 많았고. 불같아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어렸을 때 꽤 많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라마를 통해서 순화된 것 같아요. 인간이 조금 될라고 말라고. (웃음) 책 속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저는 라마에게 고작 기다림만 가르쳤지만 라마는 제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줬습니다."
방송에서도 털어놓지 않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담았습니다.
저 얼마나 고생했어요, 저 얼마나 이렇게 시련을 이겨냈어요, 이런 것은 아니구요. 제가 얼마나 무엇을 기다렸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기다렸는가, 그 기다림 때문에 무엇을 얻었는가를 이야기하다 보니 제일 먼저 기다린 게 엄마였고 어쩔 수 없이 엄마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엄마의 최근 모습을 쓰게 되어 좋았어요. 책이 나온 후에 미국에 계신 엄마한테 책을 보내드렸는데 아직 답이 없으세요. 아마도 생각하시기에는 내가 내 딸에 대해서 이렇게 몰랐구나 하고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오히려 가족끼리 더 모를 때가 있더라고요. 아무리 속 얘기를 다한다고 해도 엄마용 아빠용 멘트가 따로 있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배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들 연기를 하고 있다고.
2005년 <오로라 공주>로 감독으로 데뷔하셨고 , 2012년 <용의자 X> 2013년 <집으로 가는길> 등 상업영화는 3편 연출을 하셨는데 작품마다 느낌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첫 작품에는 ‘우와 진짜 감독 되는 거네’ 했어요. (웃음) 진짜 치열하게 했습니다. 두 작품 정도가 배급 결정이 안 되고 해서 배우 출신 감독은 해프닝으로 끝나나 했거든요. 그동안 대학원도 다니고 단편도 찍고 했지만요. 두 번째 작품 할 때는 굉장히 친했던 촬영 감독과 스텝, 물론 배우도 마찬가지로 우애가 좋아서 현장 분위기가 파이팅 넘쳤습니다. 워낙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원작인데다 일본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졌고 해서 어떻게 비껴갈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일본 영화는 콘티 하면서 한 번 봤어요. 비슷한 앵글이 나오면 안 되니까. 두 번째 작품에서는 좀 더 차분해졌고 작품 자체가 섬세한 감정을 그려내는 거니까. 세 번째 작품은 해외 촬영 고통을 겪고, 지구 한 바퀴 돌고, 그 나름대로 치열했어요. 영화 세 편 하면 그 방법을 좀 알 수 있을까 했는데 점점 어렵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집으로 가는 길>에서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 받았잖아요.
저의 멘토이신 이창동 감독님의 칭찬, 절대 안 하시는 칭찬, 동료 감독, 선후배 감독들이 진심어린 문자를 보내줬을 때, 그리고 우들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아껴주고 감사했습니다. 더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았겠지만 흥행이란 모르는 거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힘든 시기도 거쳤는데 지금은 오히려 거뜬하게 잘 일어났습니다.
감독이라는 자리는 참 힘든 자리인 것 같아요. 방향을 결정하는 리더잖아요.
저는 의논을 해요. 배우가 더 좋은 의견을 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럴 때 제가 생각했던 대로 감정선을 몰아가거나 하지 않거든요. 특히 주연 배우들은 저보다 훨씬 많은 고민을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많이 얘기하고 현장에서는 많이 의논하구요. 서로 좋은 것은 다 좋더라고요.
영화가 개봉하는 날, “내가 지금 죽는다면 관객들이 호기심에라도 영화를 보지 않을까”라고 대목에서는 감독 방은진은 얼마나 스트레스가 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론 시사회 때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투자가 결정될 때까지 그리고 캐스팅도 그때까지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배우가 흔쾌히 할 때도 있지만 고민할 때도 있고… 이런 것들이 책에 쓰여 있는데 흔쾌히 주연 캐스팅을 잘하게 될 때 감독으로서 힘이 나요. 궁극적으로는 관객들에게 이 이야기를 선보이는 거니까, 영화는 관객들 것입니다. 거기서 많은 동의를 얻어내면 감독을 하면서 보람되기도 하고 행복하죠. 물론 가장 행복한 건 촬영 현장에 있을 때 입니다.
그렇게 힘든 일이 많음에도 감독으로서의 새로운 열정을 계속 불태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대한민국 국민들이 과반수가 제가 만든 영화를 보실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그건 공감이잖아요. 그 영화 보면서 위안을 받았어, 용기를 받았어 하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제가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해서 지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다음 작품 계획은요?
작년 여름부터 써왔던 시나리오가 있어요. 나문희 선생님이 출연을 하실 예정이고, 까막눈 할머니가 초등학교 가는 이야기에요. 그 작품 곧 들어갈 예정이구요. 큰 작품도 준비하는 것이 있습니다. 쉼 없이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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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 기다려방은진 저 | 북하우스
『라마야 기다려』는 한 사람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통해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힘듦과 슬픔을 응시하게 만든다. 인생은 그녀의 말처럼 부조리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희망과 절망, 행복과 불행이 뒤섞여 있는 우리들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다림을 대하는 자세가 곧 미덕이다. 그녀가 말한다. 나와 당신에게 ‘고도’는 분명 존재한다고. 그러니까 브라보 유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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