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동안 나는 다양한 곳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강연을 요청받아 진행해왔다. 강연의 초창기, 한 시간짜리 강연이지만 그 안에 ‘생명’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을 담았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청중들에게 생명을 개념적으로 모두 이해하게 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어찌 보면, 무려 30여 년 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내 정신세계에 스며들었던 생물학적 개념을 고작 한 시간에 다 이해시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생명(생물학)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써보면 어떨까, 각자의 속도에 맞춰 읽고 이해하며 한 걸음씩 배워갈 수 있는 제대로 된 생물학 커리큘럼을 담은 책이라면, 생명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를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생물학적 개념의 핵심을 오롯이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지질학자 한 분과 식사하며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그분은 지질학 분야에서 꽤 인지도가 있고 학식도 깊었다. 식물분자생물학을 연구하고 있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그분은 “식물의 종자는 참 놀라워요. 죽었던 것이 어떻게 따뜻한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우고 살아나는지……” 하고 말했다. 지질학자의 입장에서는 식물의 발아 과정이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는, 일종의 ‘부활’이라 부를 수 있는 경이로운 일로 보인 것이다. 하긴 수천 년 된 종자가 발아했다는 기사도 나오는 판이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다. ‘일반인들은 이런 생물학적 오해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그때의 생각은 내게 생명이 무엇인지 친절하게 소개하는 책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가히 21세기는 생물학의 세기라는 구호에 걸맞게 각종 신문기사나 사설, 매스컴 등에 생물학 관련 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에 깔린 생물학적 지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뉴스를 접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아마 이 때문에 뉴스는 항상 ‘세계 최초’라는 수식을 달고 나와야 기사가 성립되는 촌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는지도 모른다. (모든 자연과학 논문에 발표된 내용은 다 세계 최초이다. 세계 최초가 아니면 논문으로 발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제발 그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그만 쓰자!)
19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내가 친지들에게 가장 많이 들어온 생물학 관련 질문 중 하나는 ‘GMO 식품을 먹어도 안전하냐’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안전하다’이다. 그러나 친지들은 신뢰할 수 있는 생물학자에게서 보다 알아듣기 쉬운 설명이 나오기를 원했다. 물론 음식이 인간의 배 속에 들어가면 모든 성분이 다 영양원으로 소화되기 때문에…… 어쩌고저쩌고 하고 비교적 간단히 설명할 수도 있지만, 친지들이 정말로 그 사실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이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아, 정말 그렇구나!’ 하고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생물학 지식을 논리적으로 바르게 알아가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일반인들은 내가 생물학 교수라는 얘기를 들으면 “난 생물학이 재미없었어요, 그나마 과학 과목 중에 생물학이 쉬웠어요!”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물론 중고등학생들도 똑같은 말을 종종 한다. 재미는 없지만 쉬운,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두 의견은 생물학이 암기 과목이라는 곳에서 합의점에 이른다. 현재 중고등학생들과 그와 같은 교육 과정을 거쳐 사회에 진출한 사람들, 더 포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생물학 전공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개 생물학에 대해 이처럼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의 시간 동안 생물학을 공부 혹은 연구하면서 생물학이 암기 과목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연구 생활을 하면서는 생물학이 물리나 수학, 화학처럼 논리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전형적인 과학과목이라는 생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어째서 이런 괴리가 생겨버렸을까? 중고등학교, 심지어 대학에서도 생물학을 논리적 학문으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2011년 겨울, 서울대학교 입시 면접 및 구술고사 문제를 출제하기 위해 일주일 간 모처에서 합숙한 적이 있다. 당시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 여러 권을 찬찬히 살펴볼 기회가 생겼는데, 생물학에 대한 오랜 오해의 이유를 그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교과서 속 생물학은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학문이 아니라 잡다한 지식의 암기를 필요로 하는 박물학이자 논리적?수리적 사고가 필요 없는 학문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이러한 심각한 왜곡 현상이 고착되고, 이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난 암기가 싫어서 생물학이 싫어요!”라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생물학에 대한 호기심을 내던져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이는 내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생물 공부가 암기만 하면 되는 지루한 과목이라는 일반화된 상식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생물학도 물리학이나 수학, 화학 같은 논리적 과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의 제목을 한때 ‘21세기에 다시 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할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천재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1948년에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슈뢰딩거는 DNA가 무엇인지 유전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시기에 생물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려 시도한 책을 썼다. 당시까지 축적된 물리적?화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생명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 한 것이다. 그가 지금 시대의 생물학적 지식을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책을 쓸까를 상상해보고는 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보면 한층 더 재미있게 생물학을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물리학과 화학의 지식을 동원하여 생물을 이해한다는 관점으로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고1인 우리 아이에게 생물을 이해시킨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고민하여 얻은 성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이와 함께 산책을 하며 재미있는 생물학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해보자 생각하고 쓴 글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생물학을 접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치며, 무엇보다 세상, 우주, 인간, 나를 이해하는 즐거운 생물학 여행에 동참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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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하 교수의 생물학 산책이일하 저 | 궁리
『이일하 교수의 생물학 산책』은 서울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일하의 첫 저서로, 지난 30여 년 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며 깨달아온 생명과학의 노하우가 오롯이 담겨 있는 책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일반인 및 중학생, 문과생들도 생물학의 기본 개념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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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하
서울대학교 식물학과 학사 및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학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세계적 생물학 연구기관인 소크 연구소에서 3년 동안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었다. 30년간 꽃을 공부해온 과학자로, 1993년 개화유전자 루미니디펜던스를 찾아냈고, 개화 유도 분야의 파이오니어로 활동해왔다. 현재 서울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동대학교 기초교육원부원장으로 문과생들도 생물학의 기본 개념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도록 교과목을 개발, 운영 중이다.
앙ㅋ
201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