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은 중앙일보와 웅진씽크빅이 함께하는 중앙장편문학상의 제 5회 수상작이다. 2012년 「치킨런」으로 등단한 김혜진 작가는 이번 수상으로 또 한번 한국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앙역』은 거리에서 살기 시작한 젊은 남자와 병든 몸으로 죽어가는 늙은 여자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노숙자'의 삶 속에서 '사랑'이 가능할까. 김혜진 작가는 가장 추한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피어나는 인간의 감정에 주목한다.
여자는 가만히 내 팔을 쓰다듬거나 손가락을 넣어 머리칼을 흩트려 놓는다. 그런 순간엔 여자에겐 나밖에 없고 내겐 여자밖에 없는 것 같다. 여자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체온을 나눠줄 수 있을까. 다른 누군가를 꿈꿀 수 없는 가난한 처지가 서로를 유일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나. ( 『중앙역』, 238쪽)
『중앙역』과 함께 보는 <퐁네프의 연인들>
1992년 개봉하여 명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노숙자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중앙역』과 유사하다. 곧 한국에서 재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영화를 함께 보기에 앞서, 영화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이 영화의 레오 까락스(Leos Carax) 감독은 원래 본명이 알렉상드르 오스카 뒤퐁(Alexandre Oscar Dupont)이에요. 그런데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만들고자 본명의 철자를 혼합한 '레오 까락스'라는 예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영화라는 섬을 발견했고, 그 섬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이 감독은 실제로 대화도 하지 않고 3-4년을 매일 시네마 테크를 전전하며 영화만 보고 살았다고 합니다. 10대 후반부터 프랑스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영화 비평을 싣기 시작하여 22세에 첫 작품 <소년, 소녀를 만나다>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습니다. 이어 <검은 피>를 만든 뒤 30살에 <퐁네프의 연인들>을 완성했죠."
<퐁네프의 연인들>은 화가였으나 시력을 잃어가면서 모든 것을 포기한 미셸과 부랑자로 살아가는 곡예사 알렉스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중앙역』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이들의 관계가 과연 '사랑'인지를 묻는다. 영화 상영 이후, 이다혜 기자와 김혜진 작가가 『중앙역』과 <퐁네프의 연인들>을 통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앙역』은 사랑에 대한 질문
이다혜: 왜 오늘 <퐁네프의 연인들>을 함께 보았는지 먼저 말씀 드릴게요. 김혜진 작가님의 『중앙역』의 주인공은 노숙자들이에요. '나'라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남자 노숙자 한 명이 있고요,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중앙역입니다. 서울역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공간에서, 많은 노숙자들이 먹고 자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주인공은 노숙자들 축에서 매우 젊은 편이고, 때문에 다들 "너 여기 계속 있을 거 아니잖아" 이렇게 말하죠. 어느 날 이런 '나'에게 여자가 등장합니다. 등을 맞대고 온기를 나누는데, 별 것도 아니지만 이게 '나'에게는 크게 느껴지게 돼요. 그런데 그 날 밤, 남자의 전 재산인 캐리어를 여자가 가져가버리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여자를 강박적으로 찾아 나서게 됩니다.
여자를 떠올린다. 배신감이나 원망, 미움 따위의 날카로운 단어들을 중얼거려보지만 어쩌면 그건 가방과는 무관한 감정일 수도 있다. 뜨거운 감정들을 크게 부풀리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여자와 함께 보냈던 그 밤이다. 그 밤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 『중앙역』, 55쪽)
그런데 여자를 찾고 나서, 둘은 연인 관계가 됩니다. 여자는 늙은 데다가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배에 복수가 차고 있는 상태에요. 둘의 관계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해요. 이게 정말 사랑일까. 우리가 정말 연인일까. 노숙자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을 본 많은 사람들이 <퐁네프의 연인들>을 떠올렸다고 해요. 작가님은 처음에 이 이야기를 쓰려고 하셨을 때 <퐁네프의 연인들>을 염두 해 두셨나요?
김혜진: <퐁네프의 연인들>을 오래 전에 보기는 했는데, 소설을 쓸 때 이를 염두 해둔 것은 아니었어요.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 영화가 91년도에 만들어졌고 지금이 2014년인데, 그 동안 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지난 여름에 서울역에서 노숙자 분들이 잘 지내시는지 살피고, 말동무도 하는 봉사활동을 몇 번 했었거든요. 이게 소설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노숙자의 삶을 쓰고 싶었다기보다는, 사랑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그 배경이 노숙자의 삶이 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다혜: 사실 사랑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트렌디한 배경을 떠올리기 쉽잖아요. 보통 다들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물들이 나오고요. 그런데 『중앙역』에서는 우리가 쉽게 비켜나가는 거리의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죠. 이들은 사랑 이야기를 떠올릴 때 굉장히 멀리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노숙자의 사랑을 다루게 되셨나요?
김혜진: 여기 계신 분들 다 한 번쯤은 서울역을 지나가보셨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밤에 보는 서울역의 풍경은 굉장히 달라요. 또 노숙자 분들이 행인에게 하는 것과, 몇 번 만나면서 알게 된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도 굉장히 매우 다르죠. 게다가 회현 역에 계시는 분들과 서울역 바로 밑에 계신 분들, 남대문 쪽에 계신 분들 모두 다 성향이 다 다르고요. 예를 들어 회현 쪽은 자리를 비우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명동 근처에서 일하시기 때문이죠. 술을 먹거나 그런 생활을 하시는 게 아니라 일만 하시는 거예요.
그들의 사랑은 행복인가, 절망인가
이다혜: 영화 얘기를 잠깐 해볼게요, 제가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는 사실 '제발 저런 걸 사랑이라고 얘기 하지 말아줘'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이를 테면 졸업의 마지막 장면 같은 거잖아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도망을 치는데 처음에 그 장면을 볼 때는 "사랑을 이루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더스틴 호프만의 입가에는 쓴 웃음이 있는 거에요. '이제 다 이루었다'가 아니라, '이제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이 보이더라고요. 이런 것처럼 <퐁네프의 연인들>에서도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건지"에 대한 걱정과 "지금 저렇게 떠나지 않으면 언제 떠나겠어?"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았어요. 작가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중앙역』의 엔딩도 굉장히 파격적인데, 왜 이런 결말을 내셨는지도 같이 여쭤보고 싶네요.
김혜진: '사랑'은 강렬한 만큼 결국 두 사람을 망치게 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사랑은 '절제'나 자신을 컨트롤하는 것이 자기도 모르게 무너졌다가 다시 만들어 졌다가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런 것에 매우 예민한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이런 것을 잘 견디지 못하잖아요. 저는 영화의 엔딩이 별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둘이 함께 떠나게 되지만, 미셸은 끊임없이 이게 사랑인지 질문하면서, 사실은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상대방을 만나면 좋으니까 계속 만나게 되는 거죠. 머리 속으로는 계속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요. 그리고 『중앙역』의 결말은 제가 생각했을 때 남자 주인공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어요. 결국 '그것 밖에는 없는' 현실을 담은 거죠.
이다혜: 영화에서는 불꽃놀이 장면이 정말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인데요. 작가님은 영화에서 어떤 장면을 재미있게 보셨는지, 또 『중앙역』에서도 '불꽃놀이'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혜진: 제가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알렉스가 돌멩이를 던지면서 미셸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부분인데, 그런 장면들이 이 사람이 정말 그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중앙역』의 불꽃놀이는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는 것을 기념하면서 나오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영화와는 다르죠.
<퐁네프의 연인들> 속 불꽃놀이가 알렉스와 미셸의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는 장치라면, 『중앙역』의 불꽃놀이는 철거가 결정된 쪽방에서 버티고 있는 주인공의 현실을 더욱 암울하게 보여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역 근처에 조성되는 아름다운 분수나 공원이 사실은 시위대와 노숙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다혜: 『중앙역』과 <퐁네프의 연인들>의 가장 다른 점을 저는 '이름'이라고 봤거든요. 이 영화에서는 두 주인공이 서로의 이름을 자주 부르죠.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많이 부르게 되는데요. 책 속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지를 않아요. 왜 주인공들을 무명으로 했는지 궁금합니다.
김혜진: 그건 이 소설의 제목을 '중앙역'이라고 지은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서울역'을 배경으로 했지만, 이게 특정한 공간의 일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을법한 이야기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중앙역'이라는 제목을 지은 거거든요.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에게 이름을 주면 그들이 유일한 사람이 되는데, 저는 사실 이런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는 그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었고요.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외칠 만큼 뜨거운 감정을 느끼지만, 동시에 지독하고 추한 현실 또한 감당해야 하는 『중앙역』과 <퐁네프의 연인들>의 주인공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비루한 사랑의 노래'는 우리의 사랑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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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김혜진 저 | 웅진지식하우스
『중앙역』은 갓 거리의 삶으로 편입된 한 젊은 남자의 관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거리의 공기, 거리의 풍경을 온몸으로 감각하며, 행복, 분노, 슬픔, 모멸감 등 많은 감정을 느낀다. 이런 예민함은 거리의 삶에 어울리는 옷이 아니지만 그의 심장은 누구보다 펄떡이고, 그의 피는 누구보다 뜨겁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그는 매일 하루를 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젊음조차 그에겐 어서 소진해야 할 무엇이다. 그런 절망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그에게 늙고 병든 여자가 다가온다. 그들에게 미래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끝까지 버릴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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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은
사람을 지향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