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사전적 의미는 ‘생체가 약물의 독성에 의해 기능장애를 일으키고,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를 의미한다. 중독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중독된 사람의 행동은 쉽게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 <인간중독>이 교감 가능한 이야기가 되려면, 중독되지 않은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의 사랑 혹은 욕정이 한 사람의 내면에 기능장애를 일으켜 병적으로 파괴시키는 그 중독의 과정이 그럴 듯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 속 주인공의 사랑은 명백히 불륜이지만, 주인공 자신들에게는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어야 한다. 명백히 ‘인간중독’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웠다면 그 속에 ‘인간’도 ‘중독’도 있어야 할 것이다.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육체를 중독의 도구로 내세운 것까지는 좋다고 쳐도, 이야기에 공감하고 동참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중독의 과정으로서의 욕정이 아니라, 중독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영화 <인간중독> 스틸컷
베트남에서 돌아온 교육대장 김진평(송승헌)은 출중한 능력과 함께 장인이 장군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가진다. 거기에 남편의 출세를 위해 지략을 펴는 숙진(조여정)을 아내로 두고 있다. 이는 타인들에게는 시기와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막상 진평에겐 출세의 욕망도 아내에 대한 사랑도 미진하다. 오히려 그는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인해 불면증과 미약한 환각에 시달린다. 어느 날 그의 밑으로 들어온 경우진 대위(온주완)은 출세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속물적인 인물이다. 어느 날 지평은 경우진의 아내 종가흔(임지연)을 만나게 된다. 우연한 만남 속에서 진평은 가흔의 치명적 매력에 빠져든다. 종가흔은 죄책감에 지평을 밀어냈다 다시 받아들이기를 반복하지만, 지평의 사랑은 멈추는 법을 모르고 직진만 한다.
사극 <음란서생>과 <방자전>을 통해서 에로티즘과 이야기의 조합을 보여주었던 김대우 감독의 신작 <인간중독>은 그래서 꽤 기대할 만한 신작이었다. <음란서생>은 그 자체로 레트로한 이미지의 사극이자, 이야기꾼이 주인공인 영화여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다채로운 이야기꺼리를 들려준다. <방자전>은 ‘춘향전’이라는 고전을 ‘방자’의 시선으로 되짚어 본 비틀어보기의 쾌감을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인간중독>은 베트남전이라는 소재와 미국의 문화가 깊숙이 침투한 60년대 말,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물론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배경은 사회적 메시지가 아니라 이국적이고 빈티지한 풍경으로서 하나의 도구가 된다. 즉 시대적 배경은 사옥 입구에 대롱대롱 매달린 새장처럼 이국적인 풍광 이상의 의미는 없단 말이다. 하지만 60년대라는 시대와 군대 사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을 결합하면서, 이국적인 의상과 인테리어, 소품 등 영화의 시각적 요소들은 충분히 즐길만한 관람 거리를 제공한다. 더불어 주인공 종가흔이 ‘화교’라는 설정은 영화가 내세우는 풍취에 이국적 정서를 더한다.
이미 홍보 차원에서 충분히 내세운 자극적 에로티즘의 미학을 기대하게 할 만한 요소들은 그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주연배우들이다. 송승헌을 비롯하여 신예 임지연은 감각적인 떨림과 중독에 가까운 밀애에 최적화된 ‘몸’을 가지고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연기력도 필요하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 역시 배우가 지닌 중요한 덕목이라고 한다면, 이미 충분히 축복받은 두 배우의 육체는 영화가 이야기하는 절반 이상을 책임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김대우 감독은 주어진 신선한 재료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진 못했다. 감각적이고 노골적인 이야기 속에 마음을 움직이는 치명적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2000년 양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는 노골적인 노출이 없었음에도, 육체적 사랑에 끌리는 주인공들의 숨 막히는 정서 그 자체 때문에 감각적이고 충분히 에로틱했다. 두 사람의 정사에 앞서 숨 막히는 두 사람의 교감이 앞섰다면,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에 선뜻 동조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중독에 이르는 정서적 교감이 충분해 보이지 않기에,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들 만큼, 생명을 모두 던질 만큼 두 사람의 사랑이 파멸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 <인간중독> 스틸컷
게다가 이미 김빠진 엔딩에 더해진 2년 뒤의 에필로그와 종가흔의 오열은 더욱 이해불가하다. 두 사람을 불륜의 현장으로 내몬 역할을 했어야 할 진평의 아내 혹은 가흔의 남편은 충분히 속물적이거나, 설득 가능할 정도로 나빠 보이지 않는다. 또한 불륜에 빠진 두 남녀의 사랑을 더욱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충분히 설득이 되지 않는 연기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진평과 가흔 이외의 인물들에게 모두 코미디를 맡긴 부분은 아쉽다. 유해진은 <방자전> 오달수의 동어반복처럼 보이고, 수다스럽고 속물적인 장교부인 전혜진의 연기가 돋보이지만, 지나치게 기능적이다.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아온 김혜나가 출연하지만 단역 정도의 역할로 마무리된 것도 아쉽다.
기대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기에 기대 이상이라거나 기대 이하라는 평가 역시 어떤 기대를 하냐에 따라 그 평가가 나뉠 것이다. 언론에 공개되기 훨씬 전부터 송승헌과 신예 임지연의 파격 노출이라는 대중의 관심을 홍보 포인트로 삼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예측 가능하게도 개봉된 영화는 노출보다는 한 여인에게 중독되어 가는 한 남자의 순애보를 그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기대 이하의 노출을 보여주었지만, 기대 이상의 밀집된 이야기 때문에 만족감을 주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공 진평이 겪고 있는 고뇌와 무기력함, 피로함에 대해 보다 많은 이야기를 할애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아니면 두 주인공의 중독될 만한 사랑과 그 과정을 더 파격적이고 ‘에로’하게 그렸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거나,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다는 주인공들의 말 자체가 에로틱한 정서 때문에라도 이해 가능한 것이 되었을지 모른다. 132분이라는 충분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중독된 당사자의 절박한 심정에 이르지 못해, 그 파국을 당혹스러움으로 끝낸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종가흔의 눈물은 처연한 슬픔에 이르지 못하고, 피로감을 선사한다. 목숨을 내던진 남자의 순애보만으로도 이미 용량이 넘쳐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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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몽글이
2014.07.03
한템포 쉬어가는 의미로 찍은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 야하지도 않았고 뭔가 부족하단 생각을 하며 봤던 작품입니다.
secret0805
2014.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