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증, 갈망, 갈구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글ㆍ사진 최재훈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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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세상 속 솔직히 객관성을 잃었다. 사사로운 감정을 너무 많이 담아 영화에 빠졌다.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게 맞겠다. 지루하다고도 느꼈고, 균형이 없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딱 마지막 한 장면과 곳곳에 등장하는 귀에 꽂히는 대사들 때문에, 정말 사사로운 감정을 듬뿍 담아 울컥해 버리고 말았다. 누군가에게는 하이라이트일 수도 있어서 차마 언급하진 않겠으나 ‘아니 어찌 왕이 손수…….’라는 악당 광백의 마지막 한마디가 품어내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세상과 너무나 달라 마음이 아팠다.

 

충분히 표현해내지 못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지진 않았지만 마지막에 이어지는 정조의 긴 독백 역시, 우리가 꿈꾸는 세상, 이상적인 그 세상과 닮아있어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권모술수의 세상 아래, 젊디젊은 할미의 치마폭 아래 휩싸여 나라를 말아먹는 간신들 사이에서 그래도 작은 진심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꿋꿋이 버텨낸 ‘왕’이라니. 세습되지만 영원하긴 어려운 국왕의 권좌를 지키기 위한 목적이 사사로운 복수가 아니라 백성을 아끼고 위한 진심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이 아닌가. 영화의 재미와 완성도, 아쉬움을 모두 물리치고 마음에 꽂혔다. 그 하나가…….

 

<역린> 스틸컷

 

과유불급, 하지만 진심 하나는 건졌다

 

익숙하진 않지만 뭔가 힘 있어 보이는 제목 ‘역린’의 의미는 ‘임금의 분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임금은 정조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현빈)가 즉위한지 1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정조의 왕권은 살얼음판처럼 약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다. 그리고 지난 1년간 수시로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왔다.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주는 건 충직한 내관 상책(정재영), 금위대장 홍국영(박성웅), 그리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김성령) 뿐이다. 정조의 할미 정순왕후(한지민)과 강력한 노론 일파는 광백(조재현)의 수하에 있는 검객 살수(조정석)을 주축으로 한 암살단을 조직해 정조 암살을 모의한다. 영화는  암살단이 정조를 암살하기 위해 궁으로 진격해 들어온 시간으로부터 딱 24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 아비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 왕권을 위협하고 암살까지 계획하는 조정대신과의 다툼에도 불구하고 민심을 읽고 사회개혁을 이끌어낸 바른 왕으로 ‘정조’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뤄진 꽤 흥미로운 소재이지만, 동시에 이미 그 결론이 빤히 드러난 김빠진 소재이기도 하다. 이미 영화 <영원한 제국>을 통해서 다뤄진 적이 있기 때문에 이재규 감독은 다른 작품들과의 차별성을 가지기 위해 정조의 집권 시기 중 정조 암살사건을 둘러싼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직조하면서 한층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를 가공해 낸다.

 

정조 암살이라는 소재에 집중하고, 세상과 유리된 채 단단하게 갇힌 궁궐 내 24시간이라는 이야기가 주는 긴박감도 살아있다. <다모>를 통해 스타일리시한 사극을 선보였던 감독의 재능이 살아있는 감각적인 연출력도 곳곳에 살아있다. 여기에 제대 후 현빈의 복귀작이며, 정재영, 조정석, 한지민, 정은채, 박성웅을 비롯 조재현, 송영창, 김성령 등 안정적인 중견배우들까지 합류한 라인업은 이미 절반 이상의 성공을 약속하는 카드였다.  

 

그럼에도 <역린>이 최초에 가졌던 장점은 고스란히 단점으로 변해 완성도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이미 역사적으로 결론이 나 있는 이야기 자체가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또 다른 긴박감과 의미를 담아내려는 시도는 소화불량이 되었다. 노론과 정순왕후, 정조의 암투 사이에 광백을 중심으로 한 살수집단의 이야기는 물론, 정조의 과거와 다른 주인공들의 로맨스까지 다 담아내려다 보니 너무 많이 이야기를 풀어놓고, 플래시백을 통해 자꾸 새로운 과거를 현재로 불러낸다.

 

배우에게 골고루 시간과 비중을 안배하다보니 정작 주인공인 정조의 이야기로 관객의 관심이 몰입하는 것을 자꾸 방해하고야 만다. 곳곳에 명대사와 명장면이 넘쳐나지만, ‘다음 편에서 계속…….’할 기회가 없기에 정확한 기승전결이 필요했음에도 <역린>은 자꾸 자꾸 곁가지들을 쳐내지 못하고 잔가지가 많지만, 열매는 없는 큰 나무가 된다. 쟁쟁한 배우들이 딱 자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의 기능적 역할 이외에 불꽃 튀는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도 아쉽다. 인물의 장점을 고루 안배하는 균형보다는 이야기의 축대 위에 역할의 강약을 조절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역린

<역린>포스터

 

<왕의 남자> 이후 팩션 사극은 웃음 코드 시작해 진지한 이야기로 귀결되는 유사한 패턴을 가진다. <역린>은 유머를 걷어내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거운 주제를 묵직하게 다루면서 익숙한 팩션 사극의 패턴에서 벗어나려는 큰 숙제는 잘 치렀다. 하지만 좋은 대사와 눈길이 가는 미장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에 집중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최고의 재료를 사용했다는 만찬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기대하는 것이 젓가락 갈 곳 없는 심심한 음식은 아닐 것이다. 사실 새로운 레시피의 기본은 ‘원재료’이다. <역린>은 그 훌륭한 원재료에도 불구하고 자꾸 향신료를 넣는다. 그 마음은 알겠는데, 제목에 갈증, 갈망, 갈구라 풀어쓴 것처럼 어느 하나 또렷하게 꽂히는 것이 없다는 말일이다. ‘과유불급’을 말할 때 가장 적절한 사례로 남을 것 같다.

 

친일파 문제부터 시작해 정신대 할머니, 독도 분쟁, 독재정권 등 현대사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역사적 청산'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에게 역사는 늘 묵직한 무게로 남아있다. <왕의 남자>부터 <관상>까지 흥행에 성공한 팩션 사극을 보면 정치는 늘 민심을 배반하고, 무자비한 권력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을 짓밟는다. 희망 보다는 권력에 무너지는 개인을 그린 사극은 줄곧 역사적 패배감을 담아낸다. 하지만 <역린>은 달라졌다. 개인적인 감정을 듬뿍 담아 <역린>이 전해주는 메시지에 힘이 나는 이유다. <역린>에는 중용 23장 구절을 인용한 대사가 나온다. 지금 현재 전 국민이 우울해 하는 이 시점에 우리의 마음에 새겨듣고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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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현빈 #조정석 #정재영 #한지민 #조재현 #박성웅 #김성령 #이재규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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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

2014.07.05

중용의 테마와 정조의 길이 전체 테마에서 너무 묻힌듯해요..반란군 장수가 덜컥 배반을 이끌어내는 개연성에서 아쉬움이 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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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령써니

2014.05.13

혹평의 세례를 받다, 저와 동일한 감동 포인트..
반갑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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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chamber

2014.05.12

저와 영화소감이 비슷해서 놀랍네요. 정말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유머를 걷어낸 처연한 음울함도 너무 좋았고.. 특히 후반부도 치달을수록 매 장면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특히나 마지막부분 폭풍감동 ㅜㅜㅜㅜㅜ 재관람하렵니다. 광해처럼 여기서도 살아라..라고 하지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며 정성을 다해 살아야겠습니다. 몇백년전의 세상이 현재와 다르지않아 더욱 가슴저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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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