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싸움의 기술
“나의 꿈은 타이틀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축구가 그라운드에서 단 5분만이라도 구현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상주의자. 축구는 승리해야 하는 스포츠이며 트로피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자. 같은 축구 감독이지만 이렇게 서로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이기에, 설전(說戰)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201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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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도 가끔씩은 갈등이 생기고 다툼도 한다. 이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다. 감정을 앞세우기 보다는 상대방의 말에 먼저 귀 기울이고, 어떤 부분에서 상대방이 속상했는지 공감하고, 인정하고, 사과하고...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이론처럼 잘 되지 않는다. 지금은 이렇게 술술 말하는 나조차도 갈등의 순간에는, 내가 옳고 상대방이 그름을 열심히 주장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것마저 뜻대로 안될 때에는 친한 친구에게 슬쩍 나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때 가끔씩 묘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친구가 나를 위한답시고 나를 대신해 그녀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내 기분이 안좋아진다.
축구팀과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아스날 팬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면, 단골 주제는 아스날의 감독인 ‘아르센 벵거’다. 다들 똑같이 아스날과 사랑에 빠져있으면서 누군가에 대해 의견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것도 참 신기하다. 한 번 화두가 던져지면, 이른바 ‘벵빠(벵거 옹호론자)’와 ‘벵까(벵거 비판론자)’로 나뉘어 순식간에 뜨겁게 논의가 불타오른다. 그리고 그 날의 여론은 아스날의 성적을 따라가는 편이다. 아스날이 잘하는 날에는 ‘벵거가 옳다’는 의견이 득세하다가, 아스날이 패배하는 날에는 ‘역시 벵거는 안된다’며 비판의 목소리가 줄을 잇는다. 그러나 이 두 집단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아지는 날이 있으니, 외부인이 벵거를 ‘까는’ 날이다.
그리고 벵거와는 완전히 반대편 극단에 서있는 인물이 있다. 조제 무리뉴. 스스로를 ‘스페셜 원’이라 지칭하며 잉글랜드 축구계에 등장한 남자. 포르투, 첼시, 인테르, 레알 마드리드를 거치면서 최초로 유럽 4개국 리그를 정복하고, 트레블을 포함, 2회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차지한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감독.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무리뉴를 완전히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누구보다 화려한 언론플레이로 입만 열면 어록을 쏟아낸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독설과 막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호전적인 인물. 축구는 승리해야 하는 스포츠이며 트로피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자.
같은 축구 감독이지만 이렇게 서로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이기에, 2004년 조제 무리뉴가 첼시에 부임한 이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설전(說戰)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2005년 8월, 아르센 벵거
“우리는 승자와 패자로만 나눠지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알고있다. 그러나 스포츠가 팀들에게 (패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서지 않는 것을 장려한다면, 스포츠 자체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첼시의 수비적인 스타일에 대해)
2005년 10월, 조제 무리뉴
“난 그가 ‘관음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자기 집에 커다란 망원경을 가져다 놓고 다른 사람의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벵거는 그 중에 한 명임이 확실하다. 그는 첼시에 대해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한다.”
2005년 11월, 아르센 벵거
“그는 도를 지나쳤고 현실과 동떨어졌다. 그리고 무례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성공을 안겨주면, 때로는 그것이 그들을 더욱 어리석은 사람들로 만든다.”
2005년 11월, 조제 무리뉴
“벵거가 지난 12달간 첼시에 대해 했던 발언들을 정리해놨다. 5, 6페이지가 아니라 120페이지이다.”
2007년 4월, 아르센 벵거
“모든 감독들을 비교하고 싶다면, 그들 각각에게 똑같은 양의 자원을 주고 '그것으로 5년을 버텨라' 라고 말해보라. 누가 5년 후에 가장 많은 것을 이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4월, 조제 무리뉴
“잉글랜드 사람들은 통계를 좋아한다. 그들은 아르센 벵거가 리그에서 고작 50%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설전이라고 썼지만 서로 한 대씩 주고 받았다기보다는, 대체로 벵거가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뭔가를 툭 지적하면, 무리뉴는 이를 악물고 온 힘으로 받아치는 그림에 가깝다. 그래서 무리뉴의 지나치게 거센 언변은 혹시 벵거에게 질투심이라도 느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 무리뉴는 벵거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상대 감독들과, 때로는 심판과 선수들에게조차 막말을 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해서 비판 받는 일들이 있었고, 이를 떠올려보면 벵거와 주고받은 말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2008년, 무리뉴는 첼시의 구단주 아브라모비치와의 불화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났고, 아스날팬들은 눈엣가시가 사라졌다고 좋아했다. 리그에서 상대할 일도 없고, 자극적인 멘트를 들을 일도 없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5년 만에 그는 다시 첼시로 복귀한다. 그러나 그도 조금은 나이를 먹은건지, 혹은 그동안 벵거와의 관계가 나아진건지 갑작스런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013년 7월, 조제 무리뉴
“그는 매우 멋진 사람이다. 내가 잉글랜드를 떠난 후 UEFA, 유로, 월드컵에서 그를 만나기 시작했고, 우리는 함께 저녁도 먹었다. 같은 리그에 있지 않고 서로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알아가기가 더 쉬워진다. UEFA와 유럽의 다른 감독들과도 마찬가지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그와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커다란 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매우 열린 사람이다. 나는 그를 대단히 존경하고 항상 존경심을 드러낼 것이다. (그동안 주고받은 말들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는 것인가?) 그것도 축구의 일부이고 때로는 친구 사이이고 서로를 존경하면서도 상대방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하고 이에 반응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끝에서 나는 그를 매우 존경하고 그 역시 나에게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느낀다. 나는 우리 사이에 단 하나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게 어떻게 하면 이곳에 17년간 남을 수 있는지 가르쳐줘야 한다. 우리의 마지막 대화도 내가 이곳에 17년동안 남고 싶다는 것이었다.”
벵거를 향한 존경심? 친구 사이? 무리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살다보면 인간 관계는 참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동안 약간 오해가 있었고 사실은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고, 무리뉴는 어쩔 수 없는 무리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4년 2월, 아르센 벵거
“(왜 감독들이 우승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승 경쟁은 매우 열려있고 오직 첼시만이 실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맨 앞에 있고, 다른 팀들은 역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팀이 우승 경쟁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실패할 일은 없다. 간단한 것이다. 나는 우리의 일이 야망적이고 승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우승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내가 모든 책임을 질 것이다.”
2014년 2월, 조제 무리뉴
“내가 실패를 두려워하냐고? 그는 실패의 전문가이다. 나는 아니다. 설사 그의 말이 옳고 내가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는 난 실패한 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난 실패에 익숙지 않다. 하지만, 그는 전문가이다. 8년동안 단 하나의 트로피도 들지 못하는 것, 그것은 실패이다. 내가 만약 첼시에서 그랬다면 이곳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난 축구에서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 ‘관음증’ 코멘트에 대해서는 미안하다. 하지만 그는 우리 클럽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2007년부터 2013년이라면 이를 용서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첼시에 집착할까? 그에게 물어봐라. 왜 그는 8년간 하나의 트로피도 들지 못했을까? 그에게 물어봐라. 나에게 트로피 하나를 들기 위해 8년이 필요할까? 필요없다.”
2014년 3월, 아르센 벵거
“(무리뉴와의 관계) 친구가 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어느 경기든 시작하면 나는 이겨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가장 앞서 있는 스포츠는 럭비이다. 그들은 경기 전 터널을 걸어올 때 서로에게 키스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걸어나오며 전쟁을 준비한다.”
2014년 3월, 조제 무리뉴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친구’의 개념을 모르겠다. 그것이 1년에 5분씩 3번 보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는 모르겠다. (벵거의 1,000번째 경기) 내가 보내는 찬사는, 우리도 우리 클럽에서 그와 같은 특권을 얻길 바란다는 것이다. 찬사를 보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나는 내 커리어와 경험한 것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모두가 원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감탄하고, 아스날에 감탄한다. 왜냐하면 클럽이 형편없는 시기를 보내는 감독에게 환상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는 이상, 1,000경기를 치르는 일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형편없는 순간들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말이다.”
아스날의 지난주 토요일(3월 22일) 경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아르센 벵거가 1996년에 아스날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로, 딱 1,000번째 되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축구계의 인사들이 찬사의 말을 건네며 벵거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고 축하할 때, 조제 무리뉴만이 유일하게 비아냥 거린 것도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런데 하필 그 1,000번째 경기 상대가 무리뉴의 첼시 원정.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정말 그렇다.
벵거는 무리뉴를 상대로 통산 10경기 5무 5패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야 말로 이겨보자며 전의를 불태웠고, 더불어 무리뉴가 지켜오던 스탬포드 브릿지 무패 기록도 깰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리그 선두 첼시를 따라잡고 다시 아스날의 우승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벵거의 1,000경기 기념일을 의미있게 마무리 짓기 위해,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하지만, 인생은 참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이날 아스날은 승리는 커녕, 치욕스러운 6-0 대패를 당했다. 그리하여 벵거의 대 무리뉴 상대 전적은 11경기 5무 6패. 여전히 승률 0%.
결국, 무리뉴가 옳고 벵거가 틀린 것일까? 축구계에서 각각 이상주의와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두 감독의 맞대결인데 민망할 정도의 압도적인 전적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무리뉴가 비록 감정적이고 노골적인 대응을 자주 할 지라도, 늘 승리와 트로피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왔다. 반면, 벵거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축구로 무리뉴를 이긴 적이없고, 이번 시즌 라이벌들을 상대로 맨시티에 6골, 리버풀에 5골, 첼시에 6골을 먹히며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말로 벵거의 시대는 끝나가는 것일까? “이제는 톱 클럽들과 경쟁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공허하게 들리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아스날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무리뉴가 훨씬 덜 재수없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난 그를 지지했을 것이다. 스포츠를 바라보는 관점이 나와 맞는다. 아름다움은 좋지만 강함없이는 아름답지 않으며, 클럽에 남는 것은 트로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리뉴가 벵거를 두고 ‘실패의 전문가’라고 깎아내린 표현에도 기분 나쁘면서 공감했다. 그러나 벵거의 어리석어 보이는 고집스러움이 한편으로 존경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집념 때문은 아닐까.
아르센 벵거와 조제 무리뉴. 이 두 사람중 누가 더 위대한 감독으로 기억될 지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 나에게 확실한 단 한 가지는, 내가 아스날에 빠져 10년 넘게 연애하면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감독이 아르센 벵거라는 것이고 누가 뭐래도 그는 아스날의 감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인정하는 무리뉴라도 내 연애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내 친구가 나를 위한답시고, 여자 친구의 잘못을 꼬집는 말에도 괜히 언짢아하던 나인데,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작정하고 깎아내리는 말에는 도저히 유쾌할 수 없다. 확실히 말하겠는데, 내 새끼는 까도 내가 깐다. 남이 까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결국 잘하는 것 밖에 없다. 벵거가 아름다운 축구를 원한다면 좋다. 아름답게 잘하자. 잘해서 승리하자. 승리하고 또 승리해서 트로피를 들자. 주변의 건방진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은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화려한 말솜씨의 무리뉴라고 해봤자 그를 피치 위에서 꺾는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번 패배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복습해서 더 강한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무리뉴의 첼시가 아스날과 다시 만날 날까지 스탬포드 브릿지 무패 기록을 지키고 있으면 좋겠다. 이 빚은 반드시 우리가 갚아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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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팀과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아스날 팬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면, 단골 주제는 아스날의 감독인 ‘아르센 벵거’다. 다들 똑같이 아스날과 사랑에 빠져있으면서 누군가에 대해 의견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것도 참 신기하다. 한 번 화두가 던져지면, 이른바 ‘벵빠(벵거 옹호론자)’와 ‘벵까(벵거 비판론자)’로 나뉘어 순식간에 뜨겁게 논의가 불타오른다. 그리고 그 날의 여론은 아스날의 성적을 따라가는 편이다. 아스날이 잘하는 날에는 ‘벵거가 옳다’는 의견이 득세하다가, 아스날이 패배하는 날에는 ‘역시 벵거는 안된다’며 비판의 목소리가 줄을 잇는다. 그러나 이 두 집단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아지는 날이 있으니, 외부인이 벵거를 ‘까는’ 날이다.
[출처: BBC Match of the Day]
아르센 벵거. 1996년에 아스날의 감독으로 부임한 후 식습관, 전술, 훈련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고, 프리미어 리그 최장수 감독으로서 18년의 재임기간동안 7개의 트로피를 획득, 특히 2003-04 시즌에는 1년 동안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무패 우승’을 이룩했다. 외부의 금전적 도움 없이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건립하고, 그에 따른 재정적 압박을 견뎌내면서, 억만장자 구단주들을 등에 업은 클럽들과 경쟁하여 매년 아스날을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시킨 인물. 아마도 현재까지의 아스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기록될 사람. “나의 꿈은 타이틀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축구가 그라운드에서 단 5분만이라도 구현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상주의자.
[출처: BBC Match of the Day]
그리고 벵거와는 완전히 반대편 극단에 서있는 인물이 있다. 조제 무리뉴. 스스로를 ‘스페셜 원’이라 지칭하며 잉글랜드 축구계에 등장한 남자. 포르투, 첼시, 인테르, 레알 마드리드를 거치면서 최초로 유럽 4개국 리그를 정복하고, 트레블을 포함, 2회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차지한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감독.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무리뉴를 완전히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누구보다 화려한 언론플레이로 입만 열면 어록을 쏟아낸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독설과 막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호전적인 인물. 축구는 승리해야 하는 스포츠이며 트로피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자.
같은 축구 감독이지만 이렇게 서로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이기에, 2004년 조제 무리뉴가 첼시에 부임한 이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설전(說戰)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출처: BT Sport]
2005년 8월, 아르센 벵거
“우리는 승자와 패자로만 나눠지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알고있다. 그러나 스포츠가 팀들에게 (패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서지 않는 것을 장려한다면, 스포츠 자체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첼시의 수비적인 스타일에 대해)
2005년 10월, 조제 무리뉴
“난 그가 ‘관음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자기 집에 커다란 망원경을 가져다 놓고 다른 사람의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벵거는 그 중에 한 명임이 확실하다. 그는 첼시에 대해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한다.”
2005년 11월, 아르센 벵거
“그는 도를 지나쳤고 현실과 동떨어졌다. 그리고 무례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성공을 안겨주면, 때로는 그것이 그들을 더욱 어리석은 사람들로 만든다.”
2005년 11월, 조제 무리뉴
“벵거가 지난 12달간 첼시에 대해 했던 발언들을 정리해놨다. 5, 6페이지가 아니라 120페이지이다.”
2007년 4월, 아르센 벵거
“모든 감독들을 비교하고 싶다면, 그들 각각에게 똑같은 양의 자원을 주고 '그것으로 5년을 버텨라' 라고 말해보라. 누가 5년 후에 가장 많은 것을 이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4월, 조제 무리뉴
“잉글랜드 사람들은 통계를 좋아한다. 그들은 아르센 벵거가 리그에서 고작 50%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설전이라고 썼지만 서로 한 대씩 주고 받았다기보다는, 대체로 벵거가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뭔가를 툭 지적하면, 무리뉴는 이를 악물고 온 힘으로 받아치는 그림에 가깝다. 그래서 무리뉴의 지나치게 거센 언변은 혹시 벵거에게 질투심이라도 느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 무리뉴는 벵거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상대 감독들과, 때로는 심판과 선수들에게조차 막말을 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해서 비판 받는 일들이 있었고, 이를 떠올려보면 벵거와 주고받은 말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2008년, 무리뉴는 첼시의 구단주 아브라모비치와의 불화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났고, 아스날팬들은 눈엣가시가 사라졌다고 좋아했다. 리그에서 상대할 일도 없고, 자극적인 멘트를 들을 일도 없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5년 만에 그는 다시 첼시로 복귀한다. 그러나 그도 조금은 나이를 먹은건지, 혹은 그동안 벵거와의 관계가 나아진건지 갑작스런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출처: 가디언 캡쳐]
2013년 7월, 조제 무리뉴
“그는 매우 멋진 사람이다. 내가 잉글랜드를 떠난 후 UEFA, 유로, 월드컵에서 그를 만나기 시작했고, 우리는 함께 저녁도 먹었다. 같은 리그에 있지 않고 서로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알아가기가 더 쉬워진다. UEFA와 유럽의 다른 감독들과도 마찬가지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그와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커다란 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매우 열린 사람이다. 나는 그를 대단히 존경하고 항상 존경심을 드러낼 것이다. (그동안 주고받은 말들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는 것인가?) 그것도 축구의 일부이고 때로는 친구 사이이고 서로를 존경하면서도 상대방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하고 이에 반응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끝에서 나는 그를 매우 존경하고 그 역시 나에게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느낀다. 나는 우리 사이에 단 하나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게 어떻게 하면 이곳에 17년간 남을 수 있는지 가르쳐줘야 한다. 우리의 마지막 대화도 내가 이곳에 17년동안 남고 싶다는 것이었다.”
벵거를 향한 존경심? 친구 사이? 무리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살다보면 인간 관계는 참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동안 약간 오해가 있었고 사실은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고, 무리뉴는 어쩔 수 없는 무리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처: BT Sport]
2014년 2월, 아르센 벵거
“(왜 감독들이 우승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승 경쟁은 매우 열려있고 오직 첼시만이 실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맨 앞에 있고, 다른 팀들은 역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팀이 우승 경쟁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실패할 일은 없다. 간단한 것이다. 나는 우리의 일이 야망적이고 승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우승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내가 모든 책임을 질 것이다.”
2014년 2월, 조제 무리뉴
“내가 실패를 두려워하냐고? 그는 실패의 전문가이다. 나는 아니다. 설사 그의 말이 옳고 내가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는 난 실패한 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난 실패에 익숙지 않다. 하지만, 그는 전문가이다. 8년동안 단 하나의 트로피도 들지 못하는 것, 그것은 실패이다. 내가 만약 첼시에서 그랬다면 이곳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난 축구에서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 ‘관음증’ 코멘트에 대해서는 미안하다. 하지만 그는 우리 클럽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2007년부터 2013년이라면 이를 용서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첼시에 집착할까? 그에게 물어봐라. 왜 그는 8년간 하나의 트로피도 들지 못했을까? 그에게 물어봐라. 나에게 트로피 하나를 들기 위해 8년이 필요할까? 필요없다.”
2014년 3월, 아르센 벵거
“(무리뉴와의 관계) 친구가 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어느 경기든 시작하면 나는 이겨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가장 앞서 있는 스포츠는 럭비이다. 그들은 경기 전 터널을 걸어올 때 서로에게 키스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걸어나오며 전쟁을 준비한다.”
2014년 3월, 조제 무리뉴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친구’의 개념을 모르겠다. 그것이 1년에 5분씩 3번 보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는 모르겠다. (벵거의 1,000번째 경기) 내가 보내는 찬사는, 우리도 우리 클럽에서 그와 같은 특권을 얻길 바란다는 것이다. 찬사를 보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나는 내 커리어와 경험한 것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모두가 원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감탄하고, 아스날에 감탄한다. 왜냐하면 클럽이 형편없는 시기를 보내는 감독에게 환상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는 이상, 1,000경기를 치르는 일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형편없는 순간들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말이다.”
[출처: BT Sport]
아스날의 지난주 토요일(3월 22일) 경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아르센 벵거가 1996년에 아스날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로, 딱 1,000번째 되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축구계의 인사들이 찬사의 말을 건네며 벵거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고 축하할 때, 조제 무리뉴만이 유일하게 비아냥 거린 것도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런데 하필 그 1,000번째 경기 상대가 무리뉴의 첼시 원정.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정말 그렇다.
벵거는 무리뉴를 상대로 통산 10경기 5무 5패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야 말로 이겨보자며 전의를 불태웠고, 더불어 무리뉴가 지켜오던 스탬포드 브릿지 무패 기록도 깰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리그 선두 첼시를 따라잡고 다시 아스날의 우승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벵거의 1,000경기 기념일을 의미있게 마무리 짓기 위해,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하지만, 인생은 참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이날 아스날은 승리는 커녕, 치욕스러운 6-0 대패를 당했다. 그리하여 벵거의 대 무리뉴 상대 전적은 11경기 5무 6패. 여전히 승률 0%.
[출처: BBC Match of the Day]
결국, 무리뉴가 옳고 벵거가 틀린 것일까? 축구계에서 각각 이상주의와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두 감독의 맞대결인데 민망할 정도의 압도적인 전적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무리뉴가 비록 감정적이고 노골적인 대응을 자주 할 지라도, 늘 승리와 트로피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왔다. 반면, 벵거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축구로 무리뉴를 이긴 적이없고, 이번 시즌 라이벌들을 상대로 맨시티에 6골, 리버풀에 5골, 첼시에 6골을 먹히며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말로 벵거의 시대는 끝나가는 것일까? “이제는 톱 클럽들과 경쟁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공허하게 들리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아스날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무리뉴가 훨씬 덜 재수없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난 그를 지지했을 것이다. 스포츠를 바라보는 관점이 나와 맞는다. 아름다움은 좋지만 강함없이는 아름답지 않으며, 클럽에 남는 것은 트로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리뉴가 벵거를 두고 ‘실패의 전문가’라고 깎아내린 표현에도 기분 나쁘면서 공감했다. 그러나 벵거의 어리석어 보이는 고집스러움이 한편으로 존경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집념 때문은 아닐까.
[출처: BBC Match of the Day]
아르센 벵거와 조제 무리뉴. 이 두 사람중 누가 더 위대한 감독으로 기억될 지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 나에게 확실한 단 한 가지는, 내가 아스날에 빠져 10년 넘게 연애하면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감독이 아르센 벵거라는 것이고 누가 뭐래도 그는 아스날의 감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인정하는 무리뉴라도 내 연애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내 친구가 나를 위한답시고, 여자 친구의 잘못을 꼬집는 말에도 괜히 언짢아하던 나인데,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작정하고 깎아내리는 말에는 도저히 유쾌할 수 없다. 확실히 말하겠는데, 내 새끼는 까도 내가 깐다. 남이 까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결국 잘하는 것 밖에 없다. 벵거가 아름다운 축구를 원한다면 좋다. 아름답게 잘하자. 잘해서 승리하자. 승리하고 또 승리해서 트로피를 들자. 주변의 건방진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은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화려한 말솜씨의 무리뉴라고 해봤자 그를 피치 위에서 꺾는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번 패배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복습해서 더 강한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무리뉴의 첼시가 아스날과 다시 만날 날까지 스탬포드 브릿지 무패 기록을 지키고 있으면 좋겠다. 이 빚은 반드시 우리가 갚아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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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필자
hungarida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주변에 흔한 보통의 서울 남자. 아스날과 12년째 연애중. 트위터 아스날 가십(@AFC_Gossip)에서 아스날 소식을 전하고 있다.
샨티샨티
2014.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