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페이소스의 브로드웨이 - 데이먼 러니언(Damon Runyon)
데이먼 러니언은 브로드웨이란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공간을 창조했고 그가 남긴 러니언스러운 브로드웨이는 뮤지컬과 영화와 소설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었다. 영화 <대부>가 마피아의 역사를 낭만화해 그린 것처럼 데이먼 러니언은 ‘광란의 20년대’의 브로드웨이라는 시공간을 낭만화해 대중들의 인식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가 창조한 브로드웨이와 그 속에서 활약했던 개성 있고 사랑스러운 인물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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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로 친숙할 이 책은, 데이먼 러니언이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뉴욕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도박사와 쇼걸, 폭력배 등을 그린 단편집이다. 금주법 시대(금주법이 폐지된 이후의 작품도 있다), 밀주 제조 및 판매와 불법 도박이 판치고 갱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총을 쏴대는, 언뜻 보면 살벌할 것 같은 이야기지만, 그런 무법지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것은 뜻밖에도 인정소설이자 순정 멜로드라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냉혹한 사내들이 여자 때문에 전혀 그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결혼식을 준비해 주는가 하면, 사랑하는 것도 아닌 여자를 위해 대규모 연극을 벌인다. 돈밖에 모르던 사내가 우연히 맡게 된 어린 여자애 때문에 사람이 180도 달라지고 수십 년 만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여자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누구는 밤마다 빛바랜 연애편지를 꺼내 읽고, 누구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햄 덩어리를 던지고, 누구는 어머니의 추억에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진다.

이렇게 쓰면 또 속없이 단순하고 말랑하기만 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러니언은 십대의 어린 나이에 이미 신문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인물이다. 뉴욕으로 건너온 다음에도 신문기자 생활을 계속하며 수많은 인물들을 접한 그는 사람의, 삶의 여러 단면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그리는 인물들은 잔인하면서 인정 많고, 이기적이면서 순정파고, 교활하면서 어수룩하다. 그런 상반되고 복합적인 면 때문에 어쩐지 더 정이 가고 미워할 수 없는지 모른다. 더욱이 러니언의 단편들은 ‘광란의 20년대 the Roaring Twenties’라 불리는 재즈 시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던 역동적이고 스릴 넘치는 브로드웨이가 무대다. 멋쟁이 데이브, 신문쟁이 월도 윈체스터, 마꾼 리그레트, 굿타임 찰리 같은 러니언의 다채로운 인물들은 유원지의 회전목마처럼 독자의 눈앞에 거듭 등장하며 점점 입체적인 실체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낸다. 실제로 러니언이 창조해 낸 세계와 그곳에 거주하는 인물들을 가리키는 ‘Runyonesque’라는 형용사가 존재할 정도다.

이 세계를 뒷받침하는 것이 러니언의 독특한 문체다. 그는 대중적인 은어를 비롯해 스포츠계며 연예계, 언론계, 지하세계의 특수 용어를 작품에 다수 사용했고, 기존의 단어에 새로운 뜻을 부여해서 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꼬불꼬불한 늑대’ 같은 고유한 표현을 창조했다. 도처에 등장하는 삐딱하면서도 애교 있는 익살스러운 표현은 작품 전체에 유머러스한 양념을 더해 준다. 때로 집요하리만큼 반복되는 어구는 문장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처럼 독특한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이기에, 특수한 언어나 현재시제로 줄곧 이어지는 문장 등 일부 특징은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부득이 생략했지만 나머지는 최대한 그대로 살리려 애썼다. 같은 이유로, 작가가 쓴 표현을 평이하고 직접적인 말로 바꾸거나 역주로 의미를 해설하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자 했다. 시카고에서 온 조조가 던진 ‘파인애플’이 무엇인지, 싱싱 교도소에서 웃으며 앉았다는 ‘뜨끈뜨끈한 의자’는 무엇인지, 빅 폴스 페이스가 다닌 ‘대학’과 ‘대학원’은 무엇인지 각각 미루어 짐작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한다.

힌트는 물론 모두 책 안에 들어 있다.

뮤지컬은 1955년 프랭크 시내트라와 말런 브랜도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끈 바 있는데, 이 책이 출간되는 2013년 현재 20세기 폭스 사에서 영화 판권을 사들였다는 소식이 있다. 뮤지컬은 어차피 원작의 내용을 상당히 많이 각색한 데다 또 어떻게 다시 만들어질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부디 이 책과 더불어 많은 독자들에게 러니언의 매력적인 세계를 다시금 알려 줄 수 있는 그런 영화가 나오기를 바란다.


[관련 기사]

-역동적 삶의 순정, 순정한 삶의 역동 -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거인의 손금, 발자국, 입김 -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유혹적일 정도로 평범한 통속의 삶을 사랑한 작가
-콘티넨털리언의 시작 - 대실 해밋(Dashiell Hammett)
-내 남자를 달라지게 만들겠다는 믿음 혹은 환상 <아가씨와 건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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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단편선-05 데이먼 러니언 데이먼 러니언 저/권영주 역 | 현대문학
이 작품집에는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기둥 줄거리를 제공한 「혈압」 과 「세라 브라운 양의 이야기」 를 포함해 25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어느 작품 하나 산전수전 다 겪은 냉혹한 사내들이 등장하는 않는 작품이 없지만 그들이 벌이는 일들은 하나같이 어설프다. 닳고 닳은 여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바보들의 말랑말랑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작가는 베테랑 저널리스트로 인생의 단면을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바라본 베테랑 저널리스트이다. 그의 단편에는 인생에 대해 달관한 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유머와 페이소스가 절묘히 결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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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먼 러니언 #아가씨와 건달들 #브로드웨이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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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m38

2014.02.17

우리네 인생을 그려낸 것 같은게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된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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