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5권의 책만 소장할 수 있다면, 시드니 셀던
90년대 중후반 이후 출간된 책은 다 버렸지만, 시드니 셀던의 절정기 작품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소설들은 차마 버리지 못했다. 2007년 시드니 셀던의 부고를 듣고 잘 아는 동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마음이 서글펐는데, 1917년생이니 만 90세라는 천수를 누렸는데도 아쉬웠다.
2013.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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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좋아하는 사람 치고 책 욕심 없는 사람 없다. 물론 나도 그런 사람으로, 몇 년 전 아르바이트의 대가로 책을 받을 수 있었을 때 몹시 행복했다. 그런데 욕심 내서 갖고 싶어해도 무방하고, 누가 놀러왔을 때 자랑스럽게 책등을 손님에게 보일 수 있는 그런 책 말고, 은밀한 책 취향은 없으신지? 많이 마이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30대 이상의 여성이라면 옛날 지경사의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나 『외동딸 엘리자베스』 시리즈, 혹은 『들장미 소녀 캔디』 , 『유리가면』 같은 일본 명작만화를 결말도 희한하게 지어낸 소설판으로 바꾸어 출간했던(『베르사이유의 장미』 같은 경우, ‘마리 스테판하이트’라는 저자 이름에 스웨덴에서 기숙학교를 운영하는 학교 교장이라는 그럴싸한 프로필까지 만들었다! 덕분에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베르사이유의 장미』 가 이케다 리요코 원작의 만화가 아니라 ‘마리 스테판하이트’라는 서양 작가의 소설 원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했다.) 동광출판사의 ‘파름문고’ 시리즈 같은 걸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거나 헌책방 등에서 사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우리집에 왔을 때 책장에 꽂혀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애증의 상대다. 나는 그게 특히 심한데, 글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한 번 읽었을 법한 스티븐 킹의 글쓰기 작법에서 절대 읽지 말라고 한 책을 모조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나란 말이다.
연인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몇 년 전 초 베스트셀러였던 자기계발서 몇 권을 책장에서 발견한 후 건방지게 “라면 자주 끓여 먹나봐? 냄비받침이 많네?” 요딴 소리나 지껄인 주제에(제가 써제낀 책들은 생각도 안하는 이 오만함! 지금은 깊이 반성 중이다) 겉으로 우아한 척 하면서 몰래 트렁크에 처박아 감춰 둔 책들을 최근 일년 사이 정리해야 할 사정이 생겼다. 원래 뭘 버리는 걸 주저하는 성격이 아님에도 책 앞에서는 오래 고뇌했다. 남 보기 부끄러운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맞을까? 앞으로 몇 번 정도는 이 남 보기 부끄러운 독서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싶다. 영양가도 없고 그리 대중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니 독서에서 효율과 영감, 감명을 바라시는 건전한 독서가들은 살며시 브라우저의 뒤로가기를 눌러 주실 것.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은 책에 관한 실없는 이야기들이라서. 벽장 속의 해골처럼 남 보이기 부끄러워 꽁꽁 감춰 두었던 책, 그 중에서 이번에 용기를 내어 버린 시리즈는 스티븐 킹이 절대 읽지 말라고 언급했던 책 중 하나인 『다락방의 꽃들』 을 비롯한 V.C 앤드류스의 책들이다. 아, 정말이지 이런 책들이란… 모든 한국 막장 드라마의 공식을 뛰어넘으면서도 스스로의 강건한 공식을 가진 V.C 앤드류스. 이 사람 책들의 마력은, 한 번 읽을 때마다 그간 대학원에서 서사창작을 공부하기까지 하며 김경욱 교수님(『위험한 독서』 를 비롯한 그야말로 훌륭한 작품을 썼으며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훌륭한 취향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훌륭한 외모를 가지기도 한)의 도움으로 애써 쌓아 놓았던 훌륭한 취향, 간신히 필립 로스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게끔 쌓아 놓은 취향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다! 읽고 나면 그간 억지로 읽어 둔 훌륭한 문학작품들은 후르륵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강한 독성이 있다. 하지만 으아 머리가 썩는 것 같다, 하면서도 읽게 되는 것이 바로 V.C 앤드류스. 이 작품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내가 버리지 못한 책을 이야기하겠다.
90년대 중후반 이후 출간된 책은 다 버렸지만, 시드니 셀던의 절정기 작품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소설들은 차마 버리지 못했다. 2007년 시드니 셀던의 부고를 듣고 잘 아는 동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마음이 서글펐는데, 1917년생이니 만 90세라는 천수를 누렸는데도 아쉬웠다.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작가로 등재되었고 몇 대를 물려 줄 부를 지닌 어마어마한 인물이다. 그렇게 잘가나는 사람을 좀처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좋아한 것은 앞서 말한 버리지 못한 책들에서 이런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은 여자를 진짜 좋아하는구나. 정말 좋아해.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여자를 밝힌다거나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 자주 갈 것 같다거나 색정적이라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다. 물론 남자치고 게이 아닌 다음에야 여자 싫어하는 남자가 누가 있냐고? 에이, 그런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뭐랄까, 여자라는 성별에 사심 없는 호감이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남자들은 여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나랑 자줄 것 같거나(이미 같이 잔 여자는 대체로 싫어하는 것 같다, 슬프게도) 최소한 그런 가능성을 열어둔(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시드니 셀던은 그런 걸 초월해서 여자를 진짜 좋아하는구만 이 아저씨, 이런 느낌이라 좋았다고 할까.
여자를 진짜 좋아하는 게 뭐냐고? 어떻게 글만 보고 그걸 알 수 있냐고? 이를테면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보면 이 아저씨,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자기랑 자주건 말건 관계없이 진심으로 여자를 좋아해!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것은 40세에 작가로 데뷔하기 전 그의 직업 이력을 훑어본 다음이었다. 잡지사, 프리랜서 라이터 등으로 일했다니 이 분야는 거의 여자들이 대부분이니 직업 인생의 대부분을 여자 동료들과 함께 버텨내며 살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잘나가는 작가가 되기 전까지 그의 생업전선에서 함께 싸운 동료들은 모조리 여자들인 것이다. 어쩐지 작품에서 여자에 대한 끈적하지 않은 호감이 풀풀 나더라니, 지금까지 그를 먹여 살린 건 죄다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여자도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받은 딸들이 남자를 좋아하고 또 남자들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여자들의 호의를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야 당연히 여자를 좋아한다. 또, 대가 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정말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다. 사심 없이 자신에게 잘하고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에게 전혀 기죽지 않을뿐더러 필요하다면 나를 훌렁 잡아 꿀꺽 삼키고도 남을 것 같은 대찬 여자를 보면 대부분의 남자는 겉으로는 아닌 척 해도 우리가 살아온 문화 때문에 별 수 없이 이게 건방지게 기어오르긴, 하는 생각이 들기 십상이다. 희한한 것은 강하고 당당한 여자가 좋다고 말하는 남자들은 그런 여자가 그에게 기대려는 시늉만 해도 화들짝 놀라면서 큰 배신을 당한 듯 넌 그런 여자 아니잖아, 보통 여자들처럼 왜 이래? 하고 따지고 든다. 보통 여자들이 어디가 어때서! 여자가 24시간 단단한 전사이기를 바라는 이런 남자를 만족시키기는 것보다 슬프게도 100% 마초맨을 만족시키는 게 훨씬 쉽다.
어쨌든 대부분의 남자들은 물론 여자를 좋아하지만, 자기를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없다. 하지만 시드니 셀던의 최고작들은 하나같이, 세상을 통째 찜쪄먹고도 남을 여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속편 작가를 모집할 때 그도 지원했다니 혐의가 분명해진다. 틀림없이 강하면서도 약하고, 제멋대로에 끈질긴 감당할 수 없는 여자들을 좋아한 역사가 깊은 것이다. 내가 버리지 않고 남겨 놓은 시드니 셀던의 작품들도 하나같이 대가 센 여자들이 활약하는데, 여주인공이 대가 세면 셀수록 작품도 아주 재미있다! 이 여자들은 하나같이 대가 하도 세서 망하기 직전에도 턱을 꼿꼿하게 하고 포기할 줄 모르는데, 이런 모습은 가히 스칼렛 오하라의 20세기 버전 자매들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단 사랑 앞에 솔직하지 못했던 스칼렛 오하라와는 달리 이 대가 센 여자들도 사랑 앞에서는 자신이 파멸할 걸 알면서도 어리석은 일 저지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녀들은 사랑 앞에서만 로봇 태권브이가 아니게 된다. 친자식도 체스 게임의 말처럼 이용하는 『게임의 여왕』 , 순진한 희생자였다가 전세계를 터는 대도로 성장하는 『내일이 오면』 , 대통령과 마피아 보스라는 스케일 큰 삼각관계가 나오는 『천사의 분노』 , 건설업계의 ‘철나비’라 불릴 정도의 수완가지만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찌질해져 버리는 『별빛 쏟아지고』 , 이런 식으로 내용을 요약하기가 힘겨운, 한국 번역 제목이 각양 각색이지만 『The other side of midnight』 . 이것들이 내가 최후에 남긴 5인방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텔 미 유어 드림』 같은 비교적 최근작은 다 버렸다. 90년대 중후반 이후 시드니 셀던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대가 센 이런 여자들이 나오는 작품을 쓰지 않았는데, 어째 좀 미적지근하고 재미가 떨어졌다. 반전을 종종 도입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반전들도 죄다 공식화 되어 버려 아무리 뻔한 반전영화를 봐도 주위 관객들이 다 짐작하고 있는 반전 장면에서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마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게이가 있는가? 범인이다!’ ‘주인공 주변에 충직하고 조용한 사람이 있다고? 배신자다!’ 하는 식으로 빤히 보이는 수를 두니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기가 약할수록, 작품 자체도 흐리멍텅해진다. 문하생을 두었나? 라는 의심을 해 보다가 내가 깨달은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진실에 관한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관해 써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 시드니 셀던에 관해 썼다. 최근 헌책방에서도 시드니 셀던 책이 동이 났다고 하고, 옛 작품들도 문학수첩에서 하나 둘 출간되는 걸 보니 역시 재미있는 건 누가 봐도 재미있구나 싶어 괜히 흐뭇하다. 그런데 나는 언제 문학적 취향을 높인단 말인가. 간신히, 엄청 애써서, 『거대한 지구를 굴려라』 같은 책을 사랑하게 되었고 『시옷의 세계』 같은 책을 열심히 읽은 참인데!
연인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몇 년 전 초 베스트셀러였던 자기계발서 몇 권을 책장에서 발견한 후 건방지게 “라면 자주 끓여 먹나봐? 냄비받침이 많네?” 요딴 소리나 지껄인 주제에(제가 써제낀 책들은 생각도 안하는 이 오만함! 지금은 깊이 반성 중이다) 겉으로 우아한 척 하면서 몰래 트렁크에 처박아 감춰 둔 책들을 최근 일년 사이 정리해야 할 사정이 생겼다. 원래 뭘 버리는 걸 주저하는 성격이 아님에도 책 앞에서는 오래 고뇌했다. 남 보기 부끄러운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맞을까? 앞으로 몇 번 정도는 이 남 보기 부끄러운 독서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싶다. 영양가도 없고 그리 대중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니 독서에서 효율과 영감, 감명을 바라시는 건전한 독서가들은 살며시 브라우저의 뒤로가기를 눌러 주실 것.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은 책에 관한 실없는 이야기들이라서. 벽장 속의 해골처럼 남 보이기 부끄러워 꽁꽁 감춰 두었던 책, 그 중에서 이번에 용기를 내어 버린 시리즈는 스티븐 킹이 절대 읽지 말라고 언급했던 책 중 하나인 『다락방의 꽃들』 을 비롯한 V.C 앤드류스의 책들이다. 아, 정말이지 이런 책들이란… 모든 한국 막장 드라마의 공식을 뛰어넘으면서도 스스로의 강건한 공식을 가진 V.C 앤드류스. 이 사람 책들의 마력은, 한 번 읽을 때마다 그간 대학원에서 서사창작을 공부하기까지 하며 김경욱 교수님(『위험한 독서』 를 비롯한 그야말로 훌륭한 작품을 썼으며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훌륭한 취향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훌륭한 외모를 가지기도 한)의 도움으로 애써 쌓아 놓았던 훌륭한 취향, 간신히 필립 로스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게끔 쌓아 놓은 취향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다! 읽고 나면 그간 억지로 읽어 둔 훌륭한 문학작품들은 후르륵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강한 독성이 있다. 하지만 으아 머리가 썩는 것 같다, 하면서도 읽게 되는 것이 바로 V.C 앤드류스. 이 작품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내가 버리지 못한 책을 이야기하겠다.
시드니 셀던(Sidney Sheldon, 1917~2007) [출처 : 위키피디아] |
90년대 중후반 이후 출간된 책은 다 버렸지만, 시드니 셀던의 절정기 작품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소설들은 차마 버리지 못했다. 2007년 시드니 셀던의 부고를 듣고 잘 아는 동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마음이 서글펐는데, 1917년생이니 만 90세라는 천수를 누렸는데도 아쉬웠다.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작가로 등재되었고 몇 대를 물려 줄 부를 지닌 어마어마한 인물이다. 그렇게 잘가나는 사람을 좀처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좋아한 것은 앞서 말한 버리지 못한 책들에서 이런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은 여자를 진짜 좋아하는구나. 정말 좋아해.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여자를 밝힌다거나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 자주 갈 것 같다거나 색정적이라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다. 물론 남자치고 게이 아닌 다음에야 여자 싫어하는 남자가 누가 있냐고? 에이, 그런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뭐랄까, 여자라는 성별에 사심 없는 호감이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남자들은 여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나랑 자줄 것 같거나(이미 같이 잔 여자는 대체로 싫어하는 것 같다, 슬프게도) 최소한 그런 가능성을 열어둔(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시드니 셀던은 그런 걸 초월해서 여자를 진짜 좋아하는구만 이 아저씨, 이런 느낌이라 좋았다고 할까.
여자를 진짜 좋아하는 게 뭐냐고? 어떻게 글만 보고 그걸 알 수 있냐고? 이를테면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보면 이 아저씨,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자기랑 자주건 말건 관계없이 진심으로 여자를 좋아해!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것은 40세에 작가로 데뷔하기 전 그의 직업 이력을 훑어본 다음이었다. 잡지사, 프리랜서 라이터 등으로 일했다니 이 분야는 거의 여자들이 대부분이니 직업 인생의 대부분을 여자 동료들과 함께 버텨내며 살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잘나가는 작가가 되기 전까지 그의 생업전선에서 함께 싸운 동료들은 모조리 여자들인 것이다. 어쩐지 작품에서 여자에 대한 끈적하지 않은 호감이 풀풀 나더라니, 지금까지 그를 먹여 살린 건 죄다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여자도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받은 딸들이 남자를 좋아하고 또 남자들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여자들의 호의를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야 당연히 여자를 좋아한다. 또, 대가 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정말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다. 사심 없이 자신에게 잘하고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에게 전혀 기죽지 않을뿐더러 필요하다면 나를 훌렁 잡아 꿀꺽 삼키고도 남을 것 같은 대찬 여자를 보면 대부분의 남자는 겉으로는 아닌 척 해도 우리가 살아온 문화 때문에 별 수 없이 이게 건방지게 기어오르긴, 하는 생각이 들기 십상이다. 희한한 것은 강하고 당당한 여자가 좋다고 말하는 남자들은 그런 여자가 그에게 기대려는 시늉만 해도 화들짝 놀라면서 큰 배신을 당한 듯 넌 그런 여자 아니잖아, 보통 여자들처럼 왜 이래? 하고 따지고 든다. 보통 여자들이 어디가 어때서! 여자가 24시간 단단한 전사이기를 바라는 이런 남자를 만족시키기는 것보다 슬프게도 100% 마초맨을 만족시키는 게 훨씬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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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텔 미 유어 드림』 같은 비교적 최근작은 다 버렸다. 90년대 중후반 이후 시드니 셀던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대가 센 이런 여자들이 나오는 작품을 쓰지 않았는데, 어째 좀 미적지근하고 재미가 떨어졌다. 반전을 종종 도입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반전들도 죄다 공식화 되어 버려 아무리 뻔한 반전영화를 봐도 주위 관객들이 다 짐작하고 있는 반전 장면에서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마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게이가 있는가? 범인이다!’ ‘주인공 주변에 충직하고 조용한 사람이 있다고? 배신자다!’ 하는 식으로 빤히 보이는 수를 두니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기가 약할수록, 작품 자체도 흐리멍텅해진다. 문하생을 두었나? 라는 의심을 해 보다가 내가 깨달은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진실에 관한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관해 써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 시드니 셀던에 관해 썼다. 최근 헌책방에서도 시드니 셀던 책이 동이 났다고 하고, 옛 작품들도 문학수첩에서 하나 둘 출간되는 걸 보니 역시 재미있는 건 누가 봐도 재미있구나 싶어 괜히 흐뭇하다. 그런데 나는 언제 문학적 취향을 높인단 말인가. 간신히, 엄청 애써서, 『거대한 지구를 굴려라』 같은 책을 사랑하게 되었고 『시옷의 세계』 같은 책을 열심히 읽은 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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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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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현진(칼럼니스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불량 소녀 백서』 등을 썼다.
essenemz
2015.02.03
이름과 성이 시옷으로 시작해서 그런가... 했는데, 이 글 끝에 '시옷의 세계'라는 책이 있다니, 참 공교롭군요.
어릴적 탤런트 원미경씨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내일이 오면'이라는 드라마를 아주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지금까지 그 제목을 잊지않고 있었는데, 그 제목을 여기서 다시 보네요.
이런, 정말 무식이 철철 흐르는 댓글이네요. ㅎㅎ
mira
2014.02.07
겨자씨
2013.10.13
그해 겨울 방학 때 철학을 하시는 사촌 형님댁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좋아하는 책이 있냐구 물으시길래 시드니 셀던을 좋아한다고 했었습니다.
형님이 다소 놀라시더니 통속소설을 좋아하는구나...하시더라구요^^;
요 며칠 전에는 예전에 읽던 시드니 셀던의 소설이 문득 기억이 나더니 오늘 이 칼럼을 읽게 되려고 그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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