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된장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는 교훈
이번에는 마리 앙투아네트 이야기이다. ‘또?‘라고 반문하는 분이 계시려는지 모르겠다. 그렇다, 역사 속의 유명 여성들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나 칼럼마다 꼭 한번씩은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이 언니이다. 하지만 그녀만큼 유명하면서도 악의적으로 왜곡된 평가가 널리 알려져 있는 있는 여성도 드물다.
글ㆍ사진 박신영
201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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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마리 앙투아네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릴적 일본 작가의 만화책 <베르사유의 장미>와 티비 만화 영화로 만났던 예쁜 소녀 왕비? 그녀의 화려한 드레스와 주변의 다리 긴 귀족 남자들? 중고생이 되어 세계사 시간에 프랑스 대혁명을 배우면서 알게된 그녀의 부정적 모습? 왕비의 사치와 낭비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대중 역사서의 서술들? 혹은 빵을 달라고 행진하는 굶주린 민중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하고 했다는 그녀의 세상 물정 모르는 아둔한 발언을 먼저 떠올리는지? 심지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현재 아무 연고 없는 우리나라에서 과시적 소비 성향을 보이는 일부 여성들을 공격할 때 같이 거론되기도 한다. 세상에, 220 여년 전의 프랑스 왕비가 머나먼 타국에까지 와서 ‘골빈 명품족, 된장녀“의 원조 언니가 될 줄이야!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한 장면



변호 1, 프랑스 혁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낭비벽 때문?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는 1755년 오스트리아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 사이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정략 결혼으로 14세에 프랑스의 왕세자빈이 되면서 그녀의 이름은 이제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느’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바뀐 이름에 걸맞게 처신하지 못했다. 1774년 남편 루이 16세의 즉위에 따라 프랑스의 왕비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치, 향락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편애로 그녀는 베르사유 궁 내부와 프랑스 전체에서 적을 만들었으며 재정 적자의 원흉으로 여겨지고 선정적 비방 팜플렛의 공격을 받았다. 누적된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루이 16세는 1789년에 삼부회를 소집하지만 이는 오히려 구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는 의원들을 결집시켰다. 이어 결성된 국민의회는 입헌 군주제를 추진하고, 그해 7월 14일 성난 민중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시작으로 드디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민중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영주의 성을 공격한다. 10월, 빵을 요구하는 파리 시민들이 베르사유를 습격해 튈르리 궁으로 왕실 가족들을 이송해 온다. 도주하다가 바렌에서 잡힌 왕실 가족들은 더욱 악화된 여론의 비판을 받는다. 이후 탕플 탑에 유폐당하던 1793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각각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정적 이미지는 그녀의 사치와 낭비벽에 기인한다. 소박한 성품의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그녀는 사치품 구입이나 사적인 거처 꾸미기, 도박빚 등으로 왕비 연금을 탕진하고 왕에게 손을 벌렸다고 한다. 다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던 재정 위기가 알려진 대로 순전히 그녀의 사치 탓인 것만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지출은 늘 수입의 1.2배가 넘는 적자상태였다. 하지만 혁명 전해인 1788년의 궁정 경비는 프랑스 정부 총지출의 6%에 불과했다. 미국 독립 전쟁에 지원하는 등 전쟁과 외교 관련한 지출이 25%, 기존 국가 부채의 이자에 대한 지출이 50%였던 것에 비하면 왕비의 낭비로 인한 왕실의 지출은 재정 위기의 전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또 도박빚으로 말하자면 왕비보다 그녀의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의 빚이 더 많은 액수였다.


변호 2,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진실

하지만 프랑스 민중들은 풍문으로 들리는 그녀의 사치, 낭비벽을 과장해서 받아들였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1785년에 발생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다. 사건은 빚을 내어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사들여 목걸이를 만든 보석상들이 이자에 쪼들려 급히 목걸이의 판로를 찾던 데에서 시작한다.

루이 16세가 즉위한 뒤, 왕비가 보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보석상들은 희망을 품고 왕을 알현했다. 왕은 왕비에게 목걸이에 대해 의향을 물었다. 당시 보석상 마야르와 우아니는 이 목걸이를 160만 리브르 정도 나가는 것으로 감정했다. 왕비는 이 값에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보석상 뵈머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왕에게 간청했다. 루이 16세는 왕비가 원한다면 사줄 뜻이 있었다. 하지만 왕비는 의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보석보다 배 한 척이 더 필요합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마리 앙투와네트 신화> 주명철 저 / 책세상 (p.179)
왕비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구입을 거절했건만, 보석상들은 포기하지 않고 왕비와 친하다고 거짓말하고 다니는 라 모트 백작부인에게 판매 중재를 부탁한다. 백작부인은 왕비가 구입한다고 속여 프랑스 고위급 성직자인 루앙 추기경을 보증인으로 세워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한 후 해체, 팔아 넘긴다. 예정된 날짜에 목걸이 대금이 지불되지 않자 초조해진 보석상 주인은 왕비에게 직접 찾아가게 되고 이제야 자신이 사기사건에 연루된 것을 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분노한다. 곧 공개재판을 통해 왕비의 억울함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이 사건과 관련한 소문과 비방문, 재판 과정을 중계한 인쇄물이 세상에 널리 퍼진 후였다. 인쇄물들을 접한 민중의 정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였기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었지만 여론의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적자 부인(赤字夫人, madame deficit)’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이 별명은 그녀에 대한 대중의 평판을 굳혀서 이후 그녀의 재판과 사형 언도 과정에 있어 ‘프랑스의 왕비’라는 이름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장미를 든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 비제 르브룅 그림



변호3, 마리 앙투아네트는 친정 때문에 과도한 공격을 받았다

‘적자 부인’과 더불어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또다른 별명은 ‘오스트리아 계집‘이다. 이는 그녀가 프랑스 왕실로 시집오면서부터 붙은 별명이다. (원래는 그냥 ’오스트리아 여인‘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Autrichienne‘라는 프랑스 단어다. 그러나 단어 뒷부분의 발음이 ’암캐‘에 해당하는 ‘chienne’이어서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발음했기에 국내 번역자들은 경멸의 의미를 담아 ’오스트리아 계집‘이라고 번역한 듯싶다.) 당시 유럽 왕가들은 정략 결혼을 통해 국익을 추구했다.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를 지배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대대로 유럽의 패권을 놓고 경쟁 관계에 있으면서도 사돈이 되곤 했다. 루이 13세의 왕비인 안 도트리슈와 루이 14세의 왕비인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시집왔다.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시집온 이들 공주들 역시 정략 결혼의 희생자들이었건만, 오랜 적대국을 바라보는 일반 프랑스인들이 그녀들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들 동맹국이면서 경쟁국이자 가상 적국의 공주 출신 왕비들은 늘 친정과 내통하는 반역자라는 의심을 받곤 했다. 하지만 이는 외국에서 시집온 왕비라면 감수해야할 의례적인 모욕이었다. 반드시 오스트리아 출신이어서 받는 모욕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이후에 나폴레옹의 두 번째 황후가 되는 마리 루이즈 역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라는 것을 들 수 있다. 마리 루이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 오빠의 손녀딸이다.

물론 역사 기록은 말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비밀리에 자신과 왕실 가족을 구해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며 외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귀족들과 결탁하여 대 프랑스 전쟁을 부추겼다고. 이렇게 보면 그녀는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려한 반역죄인이 된다. 그러나 이 또한 현재의 시각에서만 본 과도하고 부당한 평가이다. 당시 유럽에서 국가란 한 왕가의 사유재산이어서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외국 군대의 힘을 빌리거나 용병을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왕족과 귀족들은 자국의 백성보다 외국의 지배자들에게 더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근대 민족 국가의 개념이 현재의 모습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도 한참 지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였다.

그리고 비록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이지만, 당시 오스트리아는 그녀의 목숨을 구하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왕가들이 대 프랑스 동맹을 맺고 전쟁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이는 공화국 이념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외국의 군주들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공화체제를 막고 왕정이 유지되도록 최소한만 도우면 되는 것이지, 어떤 루이가 죽고 어떤 루이가 프랑스의 왕위에 앉을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이 16세의 이름은 루이 오귀스트,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탕플 감옥에서 죽는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17세의 이름은 루이 샤를, 후에 왕정복고 시기에 루이 18세로 즉위하는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의 이름은 루이 스타니슬라스 자비에. 다 ‘루이’이다.) 그러므로 외국 출신 왕비의 존재 자체가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얼른 사형시킨 것도 아니었다. 즉,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 공주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 당시 실질적으로 큰 위험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과도한 공격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시월드에서 친정 운운하는 말을 듣는 것은 한 여자에게 너무 가혹한 법이다.


변호 4,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어라"는 루머

적자 부인과 오스트리아 계집이라는 별칭 말고 그녀에 대한 나쁜 평판을 퍼트린 문장이 있다. 이는 머나먼 아시아에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녀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 말이다. 바로 그 유명한,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어라"란 말! (원문은 ”lls n'ont pas de pain. Qu'ils mangent de la brioche."로 케잌 대신 브리오슈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을 요구하는 굶주린 민중들에게 결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혁명군은 고의적으로 이 말을 퍼뜨렸다. 이 말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오기 전인 1766년 경 루소의 저작에 처음 등장한다. 다른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 출신 왕비였던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가 서민들이 빵이 없어 굶는다는 말을 듣고 동정하여 파이 껍질이라도 주라고 한 데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10월 행진 “빵을 달라”고 행진하는 파리 여성들 삽화

이 발언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이른바 ‘10월 행진’이다. 이는 1789년 10월, 6000~ 7000명에 달하는 파리의 하층 계급 여성들이 물가 상승에 항의하며 빵을 달라고 베르사유로 행진한 후 왕실 가족들을 마차에 태워 파리로 호송한 사건을 말한다. 1788년에서 89년에 걸쳐 프랑스에 가뭄과 폭풍으로 흉년이 들었다. 밀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여 파리의 빵값은 나날이 올랐다. 곳곳에서 폭동과 약탈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지주나 귀족 등 일부 계층은 곡물을 매점매석해 큰 이익을 보았는데 왕은 이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프랑스 왕가의 시조가 되는 위그 카페는 파리 백작 출신이었기에, 프랑스 왕들은 대대로 파리 시에 빵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10월 행진’ 당시 민중들은 왕실 가족들을 파리로 호송하면서 “빵집 주인과 빵집 마누라, 빵집 아이를 데려간다‘고 외치며 왕실을 조롱했다.

이런 기본적인 ’빵집 주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기본 죄악에다가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어라"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은 비록 루머일지라도 파리 민중들의 증오를 불러 일으켜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이 말은 제대로 고증하지 않은 대중 역사서를 통해 현재 우리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다. 세상 물정 모르고 철딱서니 없는 공주병 왕비의 무식한 발언으로 말이다. 하지만 폭도들의 습격으로 자녀들과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마당에 여유롭게 그런 발언을 할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한마디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발언은 허구이지만, 그런 루머가 의심없이 널리 퍼질 정도로 평소 그녀의 평판이 나빴던 것은 사실이었다. 화려한 생활을 즐기던 그녀는 결코 왕비로서 자신의 나라의 가난한 백성에 대한 의무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죄라면, 그녀의 무지함과 미성숙함이 죄였다.



영화1,2.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두 장면 캡쳐 화면.
코폴라 감독의 영화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달콤한 케이크와 구두를 탐닉하는 미성숙한 소녀로 묘사된다.
그녀의 불안한 존재를 표현하듯, 비단 구두 사이에 21세기 소녀의 운동화도보인다.



변호 5, 마리 앙투아네트가 받은 모욕, 포르노그라피 팜플렛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여론은 갈수록 나빠졌다. 그녀의 성적 비행을 공격하는 포르노그라피 인쇄물들이 정치 팜플렛의 일종으로 나돌았다. 이런 인쇄물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과 루앙 추기경을 비롯한 남자들은 물론 동성 여자 친구인 랑발 공작부인, 폴리냐크 백작부인과도 성관계를 갖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포르노그라피 팜플렛은 그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적인 공격을 담은 정치적 팜플렛은 마리 앙투아네트 이전에도 있었다. 루이 16세의 전왕인 루이 15세 시절에는 왕의 정부인 마담 퐁파두르와 마담 뒤바리가 주로 포르노그라피 팜플렛에 등장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 사후, 잠시 사라졌던 이런 팜플렛은 나폴레옹의 첫 황후인 조제핀을 공격하기 위해 다시 등장한다. 이렇게 왕의 주변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포르노그라피 팜플렛의 본 목적은 군주제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절대 왕정 시기였기에 왕에 대한 공격은 왕이 아니라 왕 주변의 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왕비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혁명기 평등 사상의 유포와도 관련이 있었다.

왕비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사회와 정치 속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논평하는 것 이외에도 민주적 효과, 혹은 평등화의 효과를 지녔다. 그것은 왕비의 육체가 왕권에 접근하는 일종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을 강조했다. 즉 그녀는 왕과 결혼했고 왕위 계승자의 어머니였으며 따라서 그녀의 육체는 권력의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1789년 이후에 나온 포르노그라피는 모든 사람이 왕비와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더욱 커졌다. 예컨대 감옥에 있을 때조차 그녀는 (자신의 아들은 물론) 시종과도 잠을 잔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녀의 행동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왕권을 비하시켰을 뿐만 아니라 평민을 격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린 헌트 엮음 / 책세상 (p.401~401)

<단두대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다비드


마리 앙투아네트가 등장하는 음란 풍자시 등 음란물 문학과 포르노그라피 판화는 절대 왕권이 갖는 왕과 왕비와 신성함에 흠집을 내면서 프랑스 왕정의 기반을 잠식해갔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이후에 역사학자들이나 하는 것. 당시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여자로서 견딜 수 없는 모욕에 처하게 된다. 1793년 10월, 사형직전 이틀 동안의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동안 지은 죄뿐만 아니라 짓지 않은 죄까지 모두 추궁당한 것이다. 왕과 왕비에 대한 재판에서 각자에 대한 죄목은 달랐다. 루이 16세는 정치적 범죄만 추궁당했지만 마리 앙트와네트는 프랑스의 재정 적자를 일으키고 친정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끌어 들이려한 반역죄뿐만 아니라 짓지도 않은 성적, 도덕적 범죄까지 추궁당했다. 그 증거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동안 유포된 포르노그라피 팜플렛이었다.

그러나 사치와 낭비 등 재정과 관련된 부분은 그녀만의 죄가 아니라 전대부터 누적된 경제적 문제였으며 그녀의 품행과 관련한 루머는 군주제에 대한 공격의 의미였지만 당시 민중과 재판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경박한 남녀들과 어울려 왕비답지 않게 유흥을 즐기던 그녀의 모습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가 적용되었다. 그러나 확실히, 그녀는 지은 죄 이상으로 벌을 받은 면이 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근친상간 죄목까지 뒤집어쓰지 않았는가! 아무리 구체제에 대한 공격의 의미라 해도, 이는 역사 속의 한 개인, 한 여성으로서, 한 어머니로서 확실히 너무 가혹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모든 가혹한 사건을 겪으며 뒤늦게 왕비다운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계속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왕과 달리 그녀는 왕비로서 위엄을 갖고 혁명 이후에 발생한 상황에 대처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단두대에 목을 올려 놓을 때까지.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렇지만 평범한 혹은 아주 나약한 천성의 인물이 엄청난 운명의 수렁에 빠져 들었을 때, 또 무시무시한 개인적인 책임에 몰릴 때에도 비극은 발생한다. (중략)
혁명이 그녀를 이 좁디좁은 로코코의 무대에서 완력으로 거세게 끌어내려 세계사라는 위대한 비극의 무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야 그녀는 비로소 운명이 자기에게 영웅적인 역할을 맡을 힘과 강한 영혼을 주었는데도, 지나간 20년 동안 너무나 보잘것없는 시녀의 역과 살롱 귀부인의 역만을 해왔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이런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왕비의 역을 맡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진정한 모습을 보였다. 연극이 진지한 현실로 바뀌어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왕관을 빼앗을 때 비로소 마리 앙투아네트는 진짜 왕비가 된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저 / 청미래, (p.10, p.118)

마리 앙투아네트의 죄는 과연 무엇?

어쩌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진 결함은 일반인이라면 그냥 사람 좋고 허점 많은 호인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비라면 이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 정부의 체제는 절대 군주정이었다. 왕의 권력이 신에게서 부여 받았다는 이런 절대 왕정의 근본적 약점은 국가가 왕위를 물려받은 군주 개인의 능력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선대의 루이 14세 시절 절정이었던 군주 개인에 대한 존경은 루이 15세를 거쳐 루이 16세 시절에 이르러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위기에 대한 왕의 개인적 대처 능력의 차이로 인해 왕은 민중의 지지를 잃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왕비의 개인적 결함은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이 치명적인 결함이 되어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져 공격받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공격은 왕정 폐지와 공화국 이행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죄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역사에 맞춰 제때에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죄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의 삶과 그에 대한 평가와 논란을 다룬 역사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두 집단간의 갈등으로 보이는 사건의 본질을 보면 이는 표면적 모습과 달리 실은 한 집단 내부의 갈등의 표현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다시말해 A집단과 B집단간의 갈등으로 보이는 사건의 이면을 보면 사실은 A집단 내부의 계급적 문제라는 것.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못에 대한 지나친 공격의 내용을 보면 그것은 여자에 대한 남성의 성적인 공격만도, 외국 공주에 대한 민족주의적 발로의 공격만도 아니었다. 프랑스 절대 왕정과 구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이 그런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다. (물론 그녀가 여성이기에 더 악랄한 공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며 이후 여성 참정권 제한 등 프랑스의 여성 차별 역사도 엄연히 존재한다.)


명품족과 된장녀와 김치녀 논쟁이 나온 진짜 이유

마리 앙투아네트가 원조 명품족에 된장녀로 한국에서 거론되는 현실에 맞게, 지금의 한국 현실도 한 번 돌아보자. 인터넷에서 ‘된장녀’,‘김치녀’에 대해 ‘남자 대 여자’로 댓글 논쟁이 벌어지곤 하는 모습과 달리, 실제로 이는 남자 대 여자의 갈등이 아니다. 핑크빛 키티 가방(진품 키티 가방은 꽤 비싸다!) 들고 다니는 어린 소녀나, 명품 핸드백보다 열 배 백 배 비싼 외제차 타고 다니는 중년 사모님은 그런 공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공격은 젊은 미혼 여성에게 집중된다. 이는 자신과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나눌 젊은 여성들을 일부 부유한 상위 계급 남성들에게 빼앗기는 현실에 대해 분노한 젊은 남성들의 공격이기 때문이다. 즉, 명품족과 된장녀와 김치녀에 대한 공격은 일부 여성들이 갖는 물질만능주의, 과시적 소비와 성적 문란함에 대한 도덕적 분노가 바탕인 것이 아니라 일부 부유층 남성들이 “The Winner Takes It( = Girl) All”하는 현실, 즉 근본적으로는 우리나라 남자들 사이의 계급 갈등이나 청년 실업이 문제의 바탕이지 않을까하고 난 생각한다.


마리 앙투아네트, 이 언니를 보라.

그러므로 마리 앙투아네트, 이 언니를 보라. 모든 인간은 각자의 결함을 가지고 자신이 원했던 바와 상관없는 환경에 태어나서 원치 않은 시대의 사건을 겪게 된다. 여기까지는 랜덤이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각자가 처한 개인적 처지나 상황, 그리고 시대적 역사적 요구를 파악한 후 각성하고 그에 맞게 성숙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다. 마리 앙트아네트에게 절대 왕정 타도와 혁명이라는 역사의 커다란 물결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입장에서 최악의 비극을 스스로 불러오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던 계기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녀는 그 기회를 놓쳤다. 그러니 다시, 마리 앙투아네트, 이 언니를 보라. 필요한 때에 적합하게 깨닫고 성숙하는 삶의 중요성을 알라. 그리고 표면적으로 여성 개인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갈등의 본질을 보라.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대혁명 #베르사유의 장미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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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쯔

2014.12.25

너무 마음에 드는 글이라 제 예스블로그로 스크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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즌이

2013.07.31

마리앙투와네트에 대해 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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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d1318

2013.07.31

모든 갈들의 본질의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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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

한글을 뗀 이후로 책 읽고 글 끄적거린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소년중앙》과 계몽사 세계 명작 동화 전집, 삼중당 문고와 창비 시선, 문학과 지성사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숙명여대 국문과 입학 후 대하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커다란 꿈을 품고 사학을 부전공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몇 번 떨어진 이후 그동안의 과대망상과 능력 부족을 깨닫고 겸허하게 독자로 돌아가기로 결심, 한동안 조용히 책 읽고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그렇게 혼자 놀다 보니 너무 심심해서 블로그(blog.yes24.com/mkkorean)에 ‘껌정드레스’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무작정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게으른 배짱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독서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책이 2013년 1월 출간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이다.지금까지 문학, 역사, 인간이라는 세 개의 열쇠로 세상을 여는 역사 에세이를 쓰는 데 주력해 왔다. 앞으로도 익숙한 이야기들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즐거운 탐험을 계속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