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예수의 배신자일까? 악역맡은 희생양일까? -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모두가 마리아나 선한 제자들에 감정이입을 할 때,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유다를 생각한다. 유다의 처지에서 이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어떨까? 과연 유다는 배신을 한 것일까? 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었든 유다 역시 배신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짊어진 건 아니었을까?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201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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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내 생애 가장 위대한 순간”
미리 밝히자면, 나는 교회를 다닌다. 부활절이면 칸타타 준비를 하고, 연극도 올리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장면을 되새긴다. 아름답고 성스럽고 경건한 예식이다. 매번 경험하는 일이지만, 가만히 보면 표현 수위가 달라지고 있는데, 요즘 들어 예수님이 심판받고 못박히는 장면이 더 잔인하고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후 교회 연극에서조차 수위가 높아졌다.) 마치 모든 신도를 울리기로 작정한 듯이. 참회의 눈물이 아니면 두려움의 눈물이라도 거두겠다는 듯 말이다.
늘 그런 칸타타를 보고 나면, 부활의 기쁨 보다는 죽음의 슬픔, 고통 같은 게 더 오래 남았다. 예수님이 나무 기둥만 한 십자가를 메고 휘청휘청 걸어가면 로마 병사들이 마구 매질을 한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다 이루었다”하고 목이 휘청 떨어지는 그 장면은, 어린 마음에 조금은 상처가 되었다. 누군가가 매 맞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장면을 (매년) 목격하는 일은, 은혜로움을 넘어 사실은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의도는 알겠지만, 언제나 참회하는 것만큼 왜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까? 부활은 좋은 일인데, 더 신나게 축하하지 않을까? 좀 다른 방식으로 예배할 순 없을까? 그런 의문을 조용히 품었다.
그 무렵 알게 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과연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제목부터! 예수님을 (혹자라면, 감히!) 슈퍼스타라고 부르다니. (하지만 굉장하잖아?) 게다가 록음악이라니! 작곡한 팀 라이스와 가사를 붙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스물두 살 때 만든 작품이라는데, 마찬가지로 엄숙한 성경을 읽고 자랐을 그들이 얼마나 재기발랄한 악동이었는지 상상이 됐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이 공연의 첫 오프닝 밤이 내 생에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 작품에 애착이 있다고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히피요, 유자는 희생양으로 그려졌는데, 과연 당시 작품이 올라갔을 때 별일 없었을까? 작품을 본 기독교인들이 공연 중지 시위를 벌이긴 했지만, 이러한 소동이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공연은 큰 성공을 거뒀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시작부터 끝까지 록 음악으로 이어져 록 오페라라고까지 불린다. 극 제목과 같은 주제가 「Jesus Christ Superstar」는 물론이고, 예수가 부르는 「Gethsemane」 막달라 마리아가 부르는 「I don't know how to love him」도 ‘인기 있는 뮤지컬 OST’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명곡이다. 그뿐이랴. 제사장, 헤롯, 빌라도 등 인물에 캐릭터에 맞는 색색의 곡들은 캐릭터의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음악 자체도 굉장히 좋다. OST가 극 순서 그대로 실려있으니, 미리 OST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좋겠다. 어떻게 상상하든, 무대 위에서는 그 이상을 보게 될 테니까.
유다, 과연 배신자일까? 희생자일까?
모두가 마리아나 선한 제자들에 감정이입을 할 때,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유다를 생각한다. 유다의 처지에서 이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어떨까? 과연 유다는 배신을 한 것일까? 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었든 유다 역시 배신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짊어진 건 아니었을까?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생각해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결국 자살을 한다. 그저 돈 때문이었다면, 왜 호의호식하고 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두 가지 답을 떠올릴 수 있다. 유다는 원치 않았지만, 배신은 유다의 십자가 같은 것이었던 건 아닐까? 혹은 잠시 유혹에 흔들리긴 했지만, 유다 역시 예수를 사랑했던 건 아닐까?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만약’이라는 역사 놀이에 관객을 초대한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주인공은 사실 유다다.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의 행적을 한걸음 멀리서 지켜보며 괴로워한다. 죽음의 길로 나서지 말라고 예수를 회유하고, 자신 앞에 놓인 배신이라는 잔을 들지 않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하지만 그런 유다에게, 자신을 경배하는 무리에게 예수는 “너희 중 누구도 내 생각할 자 없다”고 답할 뿐이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내 진심을, 큰 뜻을 헤아려주는 이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외로워하는 예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니까, 병을 고쳐준다니까 이들은 찬양하고,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물에 빠진 놈 구해주니, 봇짐 내놓으라는 꼴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의 인기는 슈퍼스타처럼 높아져 가지만, 예수가 목적한 일은 이게 아니지 않은가. 예수는 더욱 고독해지고, ‘왕이 될 인기가 저놈의 죄’라고 권력자들은 그를 경계하고, 급기야 예수를 사칭하는 사이비가 나와 교회를 더럽힌다.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사람은 유다뿐이다. “지친 사람들, 헛된 천국 생각뿐. 왜 이 선택인가. 배신당해야 할 운명. 이 선택은 너무 위험해.”
어쩐지 유다만큼은 예수의 고독과 슬픔을 짐작하지 않았을까. 치명적인 배신은 가까운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면, 배신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큰 의미가 있지 않을 테니까. 유다 역시 예수를 가깝게 따르던 제자였다. 그 역시 예수를 존경했지만, 그의 이상적인 선행, 결국 외면 받을 선행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어쩌면 유다에게 배신은 운명처럼 정해진 역할이었다,고 작품은 말하고 있었다. 유다를 욕할 수만 있나?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고 부활하기 위한 시나리오에서 필요한 배신자의 배역이 유다에게 떨어진걸. 이런 해석이 기독교계의 반발을 샀을 테다.
감당할 수 없는 일 앞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
신의 이야기를 인간적인 층위로 끌어내린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당신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해도, 혹은 독실하다고 해도, 크게 경계심 없이 빠져들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도, 잘잘못을 꼬집는 얘기도 아니니까. 다만 수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도, 내 마음 아는 이 없을 때 느끼는 고독,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 앞에서의 두려움, 유혹 앞에서의 망설임, 말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짝사랑을 품은 마음에 대해 노래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 누구라 하더라도, 각 배역이 부르는 노래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슈퍼스타’와 가장 가까이 있는 부사는 ‘반짝’이다. 슈퍼스타는 벼락처럼 쏟아지는 인기를 얻은 자리기도 하지만, 언제 그 인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자리다. 예수는 스스로 슈퍼스타가 되거나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없지만, 사람들은 그를 추종하며 구름 위에 띄웠다가, 아니다 싶을 때 허공에서 등을 떠밀어버린다. TV에 나오는 인기인들도 비슷한 신세가 아니려나? 어쩐지 요즘의 언론 풍경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도 들었다. “돈이면 다 오케이”를 외치는 대중들의 모습도 친숙하게 다가온다. 그들의 합창 속에 내 목소리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1막, 2막이 오를 때마다 서막 연주가 흐르는데, 그때마다 관객들은 무대 아래서 연주하는 지휘자의 모습이 담긴 모니터를 힐긋거리곤 했다. 2층 객석 앞에 매달린 모니터로 거기 뮤지션 정재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무려 세 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열네 살에 ‘긱스’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던 뮤지션,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그가 이 뮤지컬의 음악 슈퍼바이저를 맡아, 드라마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편곡을 맡았다. 모니터로 비치는 정재일은 음악에 맞춰 어찌나 몸을 들썩이는지, 기타 선율 위에 올라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악에 심취한 채 지휘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에서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예수 역을 줄곧 맡아왔다는 마이클 리야 말할 것도 없고, 더블 캐스팅으로 열연하고 있는 박은태의 노래가 굉장하다. 성스러움 속의 고뇌를 표현해야 하는 예수의 역할이 배우로서 자기 색을 보여주는데 많은 어려움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박은태는 특유의 미성으로, 때론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섬세하고 예민한 예수의 모습을 그려낸다.
유다 역의 한지상은 단연 돋보였다. 섹시한 록스타처럼 분장한 그는, 배신자 유다를 다양한 표정으로 완성해냈다. 배신의 임무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예수를 원망하면서도, 그의 어떤 얼굴에서 예수를 향한 지극히 순수한 사랑이 느껴졌다. 유다의 곡들은 성대가 염려스러울 만큼 고음이 많은 곡이지만, 한지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완벽에 가깝게 노래했다. 예수가 있는 곳이라면 이쪽에서, 저쪽에서 그를 다각도로 관찰하는 그의 움직임과 몸동작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배신하는 저 자가 예수의 가장 좋은 친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연기를 선보였다. 유다 역에는 한지상 외에도 윤도현, 몽니의 김신의가 트리플 캐스팅 되어 연기한다.
빌라도 역의 지현준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그의 위엄과 고뇌를 절절하게 표현해냈고, 한 장면이지만, 헤롯이 등장하는 씬은 이 공연에서 빼놓을 수 없이 매력적인 장면이다. 방정맞고 귀엽고 섹시하기까지 한 헤롯의 매력이 담긴 곡 ‘헤롯왕의 노래’를 들어 보면, 어째서 조권이 이 역에 캐스팅되었나 알만도 하다.
이지나 연출가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거칠 만큼 강렬하다. 다양한 조명의 활용으로 인물의 고독과 외로움은 한껏 깊게 담아내고, 때때로 등장하는 핏빛 조명은 긴장감을 한껏 조성한다. 히피 복장을 한 제자들의 군무는 강렬하고 압도적이다. 특히 예수는 고난이 정점에 다할 때, 그 앞에서 유다가 화려한 복장으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열창하는 장면은, 흰색과 검은색,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면서, 환호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게 만드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6월 9일까지 잠실 샤롯데시어터에서 상연된다.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건, 그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믿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일이다. 그 사람이 힘들 때, 내가 뭔가 해줄 수 없더라도, 마리아처럼 그저 옆을 지켜주는 거라고, 우정의 원칙을 새삼 곱씹으며 ‘슈퍼스타’를 뒤로 하고 극장을 빠져나왔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교회를 다닌다. 부활절이면 칸타타 준비를 하고, 연극도 올리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장면을 되새긴다. 아름답고 성스럽고 경건한 예식이다. 매번 경험하는 일이지만, 가만히 보면 표현 수위가 달라지고 있는데, 요즘 들어 예수님이 심판받고 못박히는 장면이 더 잔인하고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후 교회 연극에서조차 수위가 높아졌다.) 마치 모든 신도를 울리기로 작정한 듯이. 참회의 눈물이 아니면 두려움의 눈물이라도 거두겠다는 듯 말이다.
늘 그런 칸타타를 보고 나면, 부활의 기쁨 보다는 죽음의 슬픔, 고통 같은 게 더 오래 남았다. 예수님이 나무 기둥만 한 십자가를 메고 휘청휘청 걸어가면 로마 병사들이 마구 매질을 한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다 이루었다”하고 목이 휘청 떨어지는 그 장면은, 어린 마음에 조금은 상처가 되었다. 누군가가 매 맞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장면을 (매년) 목격하는 일은, 은혜로움을 넘어 사실은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의도는 알겠지만, 언제나 참회하는 것만큼 왜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까? 부활은 좋은 일인데, 더 신나게 축하하지 않을까? 좀 다른 방식으로 예배할 순 없을까? 그런 의문을 조용히 품었다.
그 무렵 알게 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과연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제목부터! 예수님을 (혹자라면, 감히!) 슈퍼스타라고 부르다니. (하지만 굉장하잖아?) 게다가 록음악이라니! 작곡한 팀 라이스와 가사를 붙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스물두 살 때 만든 작품이라는데, 마찬가지로 엄숙한 성경을 읽고 자랐을 그들이 얼마나 재기발랄한 악동이었는지 상상이 됐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이 공연의 첫 오프닝 밤이 내 생에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 작품에 애착이 있다고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히피요, 유자는 희생양으로 그려졌는데, 과연 당시 작품이 올라갔을 때 별일 없었을까? 작품을 본 기독교인들이 공연 중지 시위를 벌이긴 했지만, 이러한 소동이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공연은 큰 성공을 거뒀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시작부터 끝까지 록 음악으로 이어져 록 오페라라고까지 불린다. 극 제목과 같은 주제가 「Jesus Christ Superstar」는 물론이고, 예수가 부르는 「Gethsemane」 막달라 마리아가 부르는 「I don't know how to love him」도 ‘인기 있는 뮤지컬 OST’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명곡이다. 그뿐이랴. 제사장, 헤롯, 빌라도 등 인물에 캐릭터에 맞는 색색의 곡들은 캐릭터의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음악 자체도 굉장히 좋다. OST가 극 순서 그대로 실려있으니, 미리 OST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좋겠다. 어떻게 상상하든, 무대 위에서는 그 이상을 보게 될 테니까.
유다, 과연 배신자일까? 희생자일까?
모두가 마리아나 선한 제자들에 감정이입을 할 때,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유다를 생각한다. 유다의 처지에서 이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어떨까? 과연 유다는 배신을 한 것일까? 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었든 유다 역시 배신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짊어진 건 아니었을까?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생각해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결국 자살을 한다. 그저 돈 때문이었다면, 왜 호의호식하고 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두 가지 답을 떠올릴 수 있다. 유다는 원치 않았지만, 배신은 유다의 십자가 같은 것이었던 건 아닐까? 혹은 잠시 유혹에 흔들리긴 했지만, 유다 역시 예수를 사랑했던 건 아닐까?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만약’이라는 역사 놀이에 관객을 초대한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주인공은 사실 유다다.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의 행적을 한걸음 멀리서 지켜보며 괴로워한다. 죽음의 길로 나서지 말라고 예수를 회유하고, 자신 앞에 놓인 배신이라는 잔을 들지 않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하지만 그런 유다에게, 자신을 경배하는 무리에게 예수는 “너희 중 누구도 내 생각할 자 없다”고 답할 뿐이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내 진심을, 큰 뜻을 헤아려주는 이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외로워하는 예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니까, 병을 고쳐준다니까 이들은 찬양하고,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물에 빠진 놈 구해주니, 봇짐 내놓으라는 꼴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의 인기는 슈퍼스타처럼 높아져 가지만, 예수가 목적한 일은 이게 아니지 않은가. 예수는 더욱 고독해지고, ‘왕이 될 인기가 저놈의 죄’라고 권력자들은 그를 경계하고, 급기야 예수를 사칭하는 사이비가 나와 교회를 더럽힌다.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사람은 유다뿐이다. “지친 사람들, 헛된 천국 생각뿐. 왜 이 선택인가. 배신당해야 할 운명. 이 선택은 너무 위험해.”
어쩐지 유다만큼은 예수의 고독과 슬픔을 짐작하지 않았을까. 치명적인 배신은 가까운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면, 배신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큰 의미가 있지 않을 테니까. 유다 역시 예수를 가깝게 따르던 제자였다. 그 역시 예수를 존경했지만, 그의 이상적인 선행, 결국 외면 받을 선행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어쩌면 유다에게 배신은 운명처럼 정해진 역할이었다,고 작품은 말하고 있었다. 유다를 욕할 수만 있나?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고 부활하기 위한 시나리오에서 필요한 배신자의 배역이 유다에게 떨어진걸. 이런 해석이 기독교계의 반발을 샀을 테다.
감당할 수 없는 일 앞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
신의 이야기를 인간적인 층위로 끌어내린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당신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해도, 혹은 독실하다고 해도, 크게 경계심 없이 빠져들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도, 잘잘못을 꼬집는 얘기도 아니니까. 다만 수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도, 내 마음 아는 이 없을 때 느끼는 고독,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 앞에서의 두려움, 유혹 앞에서의 망설임, 말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짝사랑을 품은 마음에 대해 노래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 누구라 하더라도, 각 배역이 부르는 노래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슈퍼스타’와 가장 가까이 있는 부사는 ‘반짝’이다. 슈퍼스타는 벼락처럼 쏟아지는 인기를 얻은 자리기도 하지만, 언제 그 인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자리다. 예수는 스스로 슈퍼스타가 되거나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없지만, 사람들은 그를 추종하며 구름 위에 띄웠다가, 아니다 싶을 때 허공에서 등을 떠밀어버린다. TV에 나오는 인기인들도 비슷한 신세가 아니려나? 어쩐지 요즘의 언론 풍경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도 들었다. “돈이면 다 오케이”를 외치는 대중들의 모습도 친숙하게 다가온다. 그들의 합창 속에 내 목소리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1막, 2막이 오를 때마다 서막 연주가 흐르는데, 그때마다 관객들은 무대 아래서 연주하는 지휘자의 모습이 담긴 모니터를 힐긋거리곤 했다. 2층 객석 앞에 매달린 모니터로 거기 뮤지션 정재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무려 세 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열네 살에 ‘긱스’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던 뮤지션,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그가 이 뮤지컬의 음악 슈퍼바이저를 맡아, 드라마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편곡을 맡았다. 모니터로 비치는 정재일은 음악에 맞춰 어찌나 몸을 들썩이는지, 기타 선율 위에 올라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악에 심취한 채 지휘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에서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예수 역을 줄곧 맡아왔다는 마이클 리야 말할 것도 없고, 더블 캐스팅으로 열연하고 있는 박은태의 노래가 굉장하다. 성스러움 속의 고뇌를 표현해야 하는 예수의 역할이 배우로서 자기 색을 보여주는데 많은 어려움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박은태는 특유의 미성으로, 때론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섬세하고 예민한 예수의 모습을 그려낸다.
유다 역의 한지상은 단연 돋보였다. 섹시한 록스타처럼 분장한 그는, 배신자 유다를 다양한 표정으로 완성해냈다. 배신의 임무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예수를 원망하면서도, 그의 어떤 얼굴에서 예수를 향한 지극히 순수한 사랑이 느껴졌다. 유다의 곡들은 성대가 염려스러울 만큼 고음이 많은 곡이지만, 한지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완벽에 가깝게 노래했다. 예수가 있는 곳이라면 이쪽에서, 저쪽에서 그를 다각도로 관찰하는 그의 움직임과 몸동작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배신하는 저 자가 예수의 가장 좋은 친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연기를 선보였다. 유다 역에는 한지상 외에도 윤도현, 몽니의 김신의가 트리플 캐스팅 되어 연기한다.
빌라도 역의 지현준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그의 위엄과 고뇌를 절절하게 표현해냈고, 한 장면이지만, 헤롯이 등장하는 씬은 이 공연에서 빼놓을 수 없이 매력적인 장면이다. 방정맞고 귀엽고 섹시하기까지 한 헤롯의 매력이 담긴 곡 ‘헤롯왕의 노래’를 들어 보면, 어째서 조권이 이 역에 캐스팅되었나 알만도 하다.
이지나 연출가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거칠 만큼 강렬하다. 다양한 조명의 활용으로 인물의 고독과 외로움은 한껏 깊게 담아내고, 때때로 등장하는 핏빛 조명은 긴장감을 한껏 조성한다. 히피 복장을 한 제자들의 군무는 강렬하고 압도적이다. 특히 예수는 고난이 정점에 다할 때, 그 앞에서 유다가 화려한 복장으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열창하는 장면은, 흰색과 검은색,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면서, 환호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게 만드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6월 9일까지 잠실 샤롯데시어터에서 상연된다.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건, 그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믿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일이다. 그 사람이 힘들 때, 내가 뭔가 해줄 수 없더라도, 마리아처럼 그저 옆을 지켜주는 거라고, 우정의 원칙을 새삼 곱씹으며 ‘슈퍼스타’를 뒤로 하고 극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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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댓글
필자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앙ㅋ
2014.07.07
즌이
2013.06.30
sh8509
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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