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한쪽 팔 절단, 남은 한 팔로 드럼 연주 감동 - 데프 레파드(Def Leppard)
1983년 앨범 < Pyromania >는 7백만 장이 팔려나가 팝 메탈의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진은 그 정도의 실적을 창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4년 뒤에 발표한 이 앨범은 전작의 규모를 뛰어넘어 당시에만 9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전대미문의 신화를 창출했다.
201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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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속 5백만 장 앨범을 판매한 최초의 밴드’라는 기록도 진기록이지만, 데프 레파드라는 그룹이 음악을 떠나서도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밴드의 역사에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어려 있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음에도 피나는 노력을 통해 온전히 드러머로의 재기에 성공한 릭 앨런은 후일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알지 못합니다. 나는 강합니다. 인간이니까요.”
데프 레퍼드(Def Leppard) < Hysteria > (1987)
1984년 광풍처럼 다시 솟구친 헤비메탈은 과거의 그것과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냈다. 그것은 조악함이 많이 제거된, 훨씬 팝적인 헤비메탈, 이른바 팝 메탈이었다. 밴 헤일런, 본 조비 같은 그룹들이 다름 아닌 팝메탈로 엄청난 앨범 판매실적을 기록할 수 있었다. 팝 메탈이란, 1980년대 팝계의 특성인 상업성이 헤비메탈에도 침투하여 잉태된 새로운 메탈 형식이었다.
팝메탈이 1980년대에 떨친 파죽지세의 기세는 영국 그룹 데프 레퍼드(Def Leppard)의 대분투로 절정에 달했다. 그들이 거둔 앨범 판매고는 본 조비마저도 초월, 그들로부터 팝메탈 왕관에 대한 ‘소유권 이전’을 강요했다.
그들의 1983년 앨범 < Pyromania >는 7백만 장이 팔려나가 팝 메탈의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진은 그 정도의 실적을 창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4년 뒤에 발표한 이 앨범은 전작의 규모를 뛰어넘어 당시에만 9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전대미문의 신화를 창출했다. 앨범뿐 아니라 싱글도 두각을 나타내 수록곡 중 4곡 「Pour some sugar on me」, 「Love bites」, 「Woman」, 「Armageddon it」이 모두 전미 싱글 차트 5위권에 진입했다.
이러한 상업적 성공은 멤버들, 그리고 1981년부터 그들의 프로듀서인 로버트 랜지의 미국 시장을 진출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그에 따른 ‘사운드의 개조’가 가져온 결실이었다. 로버트 랜지는 용모가 뛰어나고 드물게 보컬하모니가 우수한 그들에게 팝적인 감각을 부여, 팝메탈 사운드의 완성을 종용했다. (1983년 기타주자 피트 윌리스는 이러한 대중지향에 반발하여 그룹을 떠났다) 그룹의 간판인 싱어 조 엘리엇은 심지어 자신들의 사운드를 ‘멜로디 좋은 로큰롤’이라 정의했다. 가사 또한 메탈의 속성인 기존가치를 해체, 또는 사회 정치적 측면과 엄격히 유리되었다. 그들에겐 술, 여자, 노래에 대한 예찬이 전부였다. 그것은 현실참여를 꺼린 1980년대의 록음악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 Hysteria >에는 < Pyromania >로 이미 확립된 팝메탈의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하드록, 블루스, 팝, 펑크가 절묘한 혼연일체를 보이면서 ‘듣기 좋은 메탈’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드러머 릭 앨런이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절단하고 난 뒤 재기하여 오른팔 하나로 드럼을 연주해 만든 앨범이라는 사실 또한 메탈 팬의 동정심을 자극, 판매를 촉진시킨 요소로 작용했다. 비극에 굴하지 않으려는 그의 집념에 감동한 스텝진들은 그에게 특별히 주문해 만든 드럼세트를 제공했고, 릭 앨런은 피땀 어린 연습으로 마침내 핸디캡을 극복하여 앨범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데프 레퍼드는 < Pyromania >에 이어 이 앨범으로 ‘앨범 2연속 5백만 장 판매’의 기록을 수립한 최초의 밴드가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가장 성공한 메탈밴드로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것은 릭 앨런의 승리였고 팝메탈의 개가였다.
데프 레퍼드(Def Leppard) < Hysteria > (1987)
1984년 광풍처럼 다시 솟구친 헤비메탈은 과거의 그것과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냈다. 그것은 조악함이 많이 제거된, 훨씬 팝적인 헤비메탈, 이른바 팝 메탈이었다. 밴 헤일런, 본 조비 같은 그룹들이 다름 아닌 팝메탈로 엄청난 앨범 판매실적을 기록할 수 있었다. 팝 메탈이란, 1980년대 팝계의 특성인 상업성이 헤비메탈에도 침투하여 잉태된 새로운 메탈 형식이었다.
팝메탈이 1980년대에 떨친 파죽지세의 기세는 영국 그룹 데프 레퍼드(Def Leppard)의 대분투로 절정에 달했다. 그들이 거둔 앨범 판매고는 본 조비마저도 초월, 그들로부터 팝메탈 왕관에 대한 ‘소유권 이전’을 강요했다.
이러한 상업적 성공은 멤버들, 그리고 1981년부터 그들의 프로듀서인 로버트 랜지의 미국 시장을 진출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그에 따른 ‘사운드의 개조’가 가져온 결실이었다. 로버트 랜지는 용모가 뛰어나고 드물게 보컬하모니가 우수한 그들에게 팝적인 감각을 부여, 팝메탈 사운드의 완성을 종용했다. (1983년 기타주자 피트 윌리스는 이러한 대중지향에 반발하여 그룹을 떠났다) 그룹의 간판인 싱어 조 엘리엇은 심지어 자신들의 사운드를 ‘멜로디 좋은 로큰롤’이라 정의했다. 가사 또한 메탈의 속성인 기존가치를 해체, 또는 사회 정치적 측면과 엄격히 유리되었다. 그들에겐 술, 여자, 노래에 대한 예찬이 전부였다. 그것은 현실참여를 꺼린 1980년대의 록음악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 Hysteria >에는 < Pyromania >로 이미 확립된 팝메탈의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하드록, 블루스, 팝, 펑크가 절묘한 혼연일체를 보이면서 ‘듣기 좋은 메탈’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드러머 릭 앨런이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절단하고 난 뒤 재기하여 오른팔 하나로 드럼을 연주해 만든 앨범이라는 사실 또한 메탈 팬의 동정심을 자극, 판매를 촉진시킨 요소로 작용했다. 비극에 굴하지 않으려는 그의 집념에 감동한 스텝진들은 그에게 특별히 주문해 만든 드럼세트를 제공했고, 릭 앨런은 피땀 어린 연습으로 마침내 핸디캡을 극복하여 앨범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데프 레퍼드는 < Pyromania >에 이어 이 앨범으로 ‘앨범 2연속 5백만 장 판매’의 기록을 수립한 최초의 밴드가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가장 성공한 메탈밴드로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것은 릭 앨런의 승리였고 팝메탈의 개가였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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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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