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삼층 정기간행물실에서 오후를 보낸다고 해서 꼼짝없이 책만 읽고 있기란 쉽지 않다. 도서관에는 책보다 책을 보려는 사람과 책을 찾는 사람들이 더 눈에 띄기 마련이다. 어느 쪽이든 아무리 오래 봐도 싫지 않은 풍경이기는 하다. 나는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 편인데 그쪽에 앉아야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또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려 우면산의 완만한 산등성이로 해가 지는 장면을 바라보기도 좋기 때문이다.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선배 작가도 있고 출판사 편집자나 내 소설을 읽었다는 독자, 또 가깝지는 않지만 서로 이름 정도는 알고 지내는 평론가도 있다. 누구와 만나게 되건 도서관에서만큼은 나 자신이 친절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노력이 필요한 일도, 가식도 아니다. 이따금 나는 내가 타인에게 퍽 친절한 사람이기도 하구나, 스스로 놀랄 때가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도서관에 있을 때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장소’, 즉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느껴질 때가 많은 것이다.
동절기에 정기간행물실이 문을 닫는 시간은 오후 다섯시. 그러나 이미 네시 오십분부터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자리를 정돈해달라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실제로 정각 다섯시까지 고집스럽게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도 드물다. 나는 십 분이나 일찍 도서관을 나가달라는 투의 그 방송이 마음에 안 들어 또각또각 조심성 없는 구두 소리를 내며 읽던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놓고 문을 밀고 나온다.
쫓기듯 나오긴 했어도 도서관을 나올 때는 느긋한 기분에 빠져들고는 한다. 오후를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것, 정기간행물실에서 건축이나 미술, 미용, 산악, 낚시, 가구에 관한 책을 읽거나 과월호 계간지를 보는 것. 그리고 책을 읽고 책을 찾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이런 오후라면 그 주에서 가장 평온한 오후가 된다는 걸 안다. 한 문장도 떠오른 게 없고 쓰지도 못했지만, 괜찮다. 조금 추웠는데 누군가 목에 톡톡한 목도리를 하나 둘러준 느낌이랄까. 해가 기울어가는 도서관을 나올 때는 그런 느낌이다. 아무것도 쓰지 못했고 쓰고 있는 글을 머릿속으로 조금도 진척시키지 못했지만 느긋해질 수밖에 없다. 서너 시간 책들도 읽었으니 오늘 작업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다, 라고 위안한다. 역시 원고를 쓰고 있을 때는 도서관에 오는 게 아닌데.
도서관 앞마당을 천천히 걸어 나온다. 집에서 도서관까지는 택시로 이십 분 거리. 서둘러 올 때와는 달리 집으로 돌아갈 때는 지하철을 탄다. 도서관에서 나와 짧은 거리라도 걷지 않는 것은 좋은 영화를 보고 나와 음미할 틈도 없이 바로 다른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경찰서와 대검찰청을 지나 이호선 서초역. 우리 집은 이호선 서울대역이다. 사당 방면으로 네 정거장째. 그러나 나는 서초역에서부터 갈등한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중간에 지하철을 갈아탈 것인가. 그 갈등이 정말 매번 일어난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하다. 갈등의 이유도 명확히 짐작할 수 없었다. 적어도 페터 한트케의 신간을 읽기 전까지는.
아무려나, 지하철을 탄다. 다시 갈아탄다. 이대로 그냥 집으로 가기는 아쉽다. 나는 눈에 익은 일곱 개의 꽃잎 모양 로고를 따라 익숙하게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이 에스컬레이터는 이제 나를 도서관이 아닌 다른 장소로 데려다줄 것이다.
지난여름, 막 번역돼 나온 페터 한트케의 중편소설을 손에 들었다. 오후였고 꼭 해야 할 일도 나가야 할 데도 없었다. 일곱 평짜리 작업실 바닥에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쌓여 있었으며 나는 헐렁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베드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있었다. 햇살이 비쳐들고 있는데도 적막한 느낌이 든다면 다른 누구보다 페터 한트케의 글을 읽기 가장 좋은 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이미 오래전에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사회인으로서의 패배를 시인한 작가의 글을.
『어느 작가의 오후』라는 짧은 소설은 쌀쌀한 십이월 어느 날, 집의 이층 작업실에서 그날의 글쓰기를 마친 ‘작가’가 오후의 외출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다른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자, 어디로 산책을 갈까, 작가는 고민한다. 주변 세계의 눈에 띄고 싶지도 않고 사람이 붐비는 장소도 피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내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우선 그는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이렇게 적는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앉아 약간의 서비스를 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혼자 방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당당하게 그런 요구를 하려는 것 같았다.”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약간의 서비스를 받고 싶은 욕구…… 아, 그렇구나! 이 36페이지에서 나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뒤늦게 깨닫는 것이다.
- 백화점 조경란 저 | 톨
소설가 조경란이 쓴 백화점을 직접 조명한 문화 에세이다. 백화점이라는 ‘장소’가 현대인들에게 갖는 의미와 기능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이 책은 현장 취재와 자료조사를 통해 깊이와 넓이가 더해져 오롯이 백화점을 다룬 최초의 논픽션이 되었다. 정신적인 삶, 물질적인 삶 사이에서 갈등한 저자의 고민이 엿보인다.
조경란
주변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고독과 우수를 부감시키며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깊이 있게 보여주는 작가 조경란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년 후에 서울예대 문학창작학과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나의 자줏빛 소파』『코끼리를 찾아서』 『국자 이야기』 『풍선을 샀어』, 중편소설 『움직임』,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혀』, 산문집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백화점』 등이 있다. 문학동네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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