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 있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자의 고통
당신의 사랑은 세상을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만들어요 -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이 편지가 당신에게 보여주겠지요. 나는 법원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사람도 별로 만나지 않으며, 혼자 걷곤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곳이 나올 때 마다 나는 이곳에 당신이 있길 바라곤 해요.
글ㆍ사진 서진
201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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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테 폰 스타인에게

June 16, 1784
Weimar, Germany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이 편지가 당신에게 보여주겠지요. 나는 법원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사람도 별로 만나지 않으며, 혼자 걷곤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곳이 나올 때 마다 나는 이곳에 당신이 있길 바라곤 해요.

나에게 좋을 정도 이상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다시 볼 때는 나는 훨씬 더 행복한 걸 느끼겠죠. 나는 항상 당신과 가까이 있다고 의식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존재가 나를 떠난 적이 없어요.

당신 안에서 나는 모든 여자, 모든 사람의 척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 안에 모든 것의 척도가 될 만한 것들이 있지요. 그렇다고 나머지 세상이 불확실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당신의 사랑은 세상을 명확하게 만들고 있어요.

나는 정말 명확하게 남자들이 어떤지, 그들이 무엇을 계획하고, 바라고, 행동하는지 그리고 즐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가진 걸 시샘하지 않아요. 그저 비교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 비밀스러운 즐거움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보물이니까요.

당신의 집에서 당신은 내가 연애에 대해 자주 느끼는 것처럼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제대로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볼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이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방식을 선명하게 볼 수 있을 때에 이르러서야 흥미를 얻게 되지요. 왜냐 하면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싶기 때문에 좋은 남자는 순서대로 정리를 해 보고, 권리와 평화로운 규칙을 장려하는데 기쁨을 느낀답니다.

잘 있어요, 내가 천 번을 사랑한 당신.


작가소개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독일의 가장 위대한 작가중 한 사람이고, 거의 첫 번째 문학 유명인사였다. 필생의 대작 ‘파우스트’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저명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연구는 찰스 다윈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서구 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1775년 괴테는 그의 여신 샤를로테 폰 스타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그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 본 글은 John C. Kirkland 의 위대한 남자들의 연애편지(Love Letters of Great Men) 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저작권은 해냄 출판사에 있으며 출판사의 양해를 구해 채널 예스에 싣습니다.


서진의 번역후기

이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네, 고등학교 때 읽은 이후로 오랜만에 읽었는데 느낌은 완전 딴판이었어요. 베르테르가 샤롯테를 향한 순수하고 열렬한 사랑은 그대로지만 책 속의 젊은이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자가 있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사람, 어쩌면 그래서 더욱 우상화 되는 상대방, 그걸 매몰차게 외면하지 못하는 여자.

하지만 우리는 한 번쯤(어쩌면 두 세 번쯤) 이런 짝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때의 심정은 지금이나 괴테가 느꼈던 200년 전이나 별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편지속의 실제 연인 샤롯테는 괴테보다 연상이었고, 일곱 자녀의 엄마였으며 남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흠모는 50년 간 편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네요. 단, 소설 속에서 처럼 괴테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 아홉명의 연인을 더 둔, 사랑에 열정적인 작가였습니다.

그녀는-아아, 천국을 이런 말로 표현해도 좋을까?-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된 이후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가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얼마나
스스로를 존경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것은 지나친 자부심일까? 아니면 사실 그대로를 솔직하게
느끼는 것일까? 로테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 있음을 느낄 때에 나는 아무도 두렵지 않다! 그렇지만
그녀가 자기의 약혼자에 관해서 그렇게 뜨거운 정열과 애정을 쏟아가며 이야기할 때면 나는 모든
명예와 지위를 박탈당하고 대검마저 몰수당한 사람 같은 기분이 되고 만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민음사) 중에서.


같이 읽어보면 좋은 책


#서진 #괴테 #독일문학
9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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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s0901

2012.08.05

50년이라니 길군요 배경지식이 없다면 편지를 평범한 편지로 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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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1.06

과학자였기도 했다니 놀랍네요. 보통 사람은 문과, 이과 둘 중 하나로 기울기 마련인데. 처음에는 편지 읽고 샤를로테를 정말로 사랑하는구나하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주석읽고 나서 쳇.. 실망. 연인이 9명이라니. 50년동안 편지 썼다면 그 사이에 다른 연인 9명이 있었다는 애기잖아요. 만약 샤를로테가 괴테에게 갔다면 결국 버림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샤를로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샤를로테를 우상화하고 그 우상을 사랑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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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rrud10

2011.10.06

정말 애절하네요 ㅎ ... 누군가는 그런 사랑 하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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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2010년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개인 홈페이지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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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폰 괴테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