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강연회]“우리는 고급(noble) 독자가 돼야 한다” - 『인문 고전 강의』 강유원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위 잘난 사람이 아닌 대다수 우리들, 비룡인의 최종 목적은 ‘인문학적 교양인’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201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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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스의 손길에 몸을 던진, 물화된 우리에게 던지는 一喝
4월 마지막 날 저녁, 동대문구 정보화 도서관에서 『인문 고전 강의』의 강유원 저자 북 세미나가 있었다. 전날 손에 들어온 책의 앞부분만 읽은 채로 강연을 듣고, 책을 다 읽은 뒤에 후기를 쓰려고 했으나 다 읽지 못한 상태다. 그리 빨리 읽히는 책이 아니다. 아무리 쉽게 풀어 써도 인문 고전이 뭐 그리 녹록하겠는가!
이 책은 작년 위 도서관에서 진행된 저자의 강의를 정리한 것들이다. 『일리아스』 『안티고네』 『니코마코스 윤리학』 『신곡』 『군주론』 『방법서설』 『통치론』 『법의 정신』 『직업으로서의 정치』 『파놉티콘』 『거대한 전환』 『논어』를 순서대로 강독해 놓았다. 굳이 목차를 다 밝힌 것은 이 책들을 읽고는 싶었으나 엄두를 못 낸 사람들의 구미를 돋우기 위해서다. 이 책에서 맛본 후 한 권 한 권 도전해보면 어떨까 싶어서다. 다만 강의를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이날 세미나에서 저자의 강의의 맛을 본 이후로 내내 들었다. 그만큼 재미와 의미가 잘 버무려진 강연이었다.
개천에서 난 용이 될 것인가?
사실은 좀 일찍 도착한 탓에 서성거리다가 거친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저자를 복도에서 흘긋 보면서 ‘와!’ 하고 혼자 놀랐다. 저자 말마따나 강유원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이, 매우 강하고 독특한 인상만 풍겼기 때문이다. 역시나 독자인 듯한 두 분의 귀띔에 따르면 ‘좀 무서울 수도 있을 강의 스타일’이라고 했다. 청중 사이를 오가면서 질문을 막 던지고 호통도 친다는 것이다. 어쩌나……. 서울에 꽤 오래 살면서도 한번도 와보지 않은 멀고 낯선 동네에서 강연자에게 찍혀 창피당할 우려가 농후해졌다니! ‘책 안 읽었는데, 괜히 왔어, 괜히 왔어’라고 어쭙잖은 개그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말을 화이트보드에 쓰는 것으로 저자의 강연이 시작됐다. “예전에는 ‘용’이 다 똑같았다. 어려운 형편에서 고시 공부를 해 ‘스폰서가 뒤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용 됐다는 말의 의미였다. 획일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해야 하는 시대다. 용만이 아니라 여러 짐승이 다 필요하다. 그런데도 한국은 아직도 용과 ‘비룡인(非龍人)’의 두 종류의 인간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 삶의 목적이 용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비룡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위 잘난 사람이 아닌 대다수 우리들, 비룡인의 최종 목적은 ‘인문학적 교양인’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는 달리 말하면 ‘noble’한 사람이 될 거냐, ‘humble’한 사람이 될 거냐는 질문에서 ‘천박함’을 버리고 ‘고귀함’을 선택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비록 용이 되지는 못할망정 (혹은 싫을망정) 누군들 천박하고 싶을까! 그런데 어떻게? 저자가 내놓은 단 한마디의 해법은 ‘공부’였다. “(용 된 사람들이 소유한 물적 재산과 달리) 지식에는 주인이 없다. 지식은 공공 영역의 것이며, 원하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이 책도 그 일환으로 썼다 한다. 중학생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쓴 필독 인문 고전 강해 같은 책이라고 한다. 카리스마 있는 유머로 가득한 강의 스타일과 달리 부드럽게, 부드럽게 쓰느라 애먹었다고 저자가 말하자, 청중 중 다수를 차지한, 그의 강의 제자들은 공감의 웃음을 터뜨렸다. 저자의 강의 스타일은, 무섭기보다는 카리스마와 긴장시키는 유머 때문에 흡입력 있는 그것이었고, 과연 많은 이들에게 강유원 저자는 ‘더 세게 말해주세요’ 하는 표정으로 선망하는 ‘강마에’였다!
공부를 왜 하며,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
저자는 책 563쪽을 보라고 했다. 저 유명한 ‘學而時習之 不易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그 대목이었다. ‘子 가라사대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랴.’
“공부란 배우고 익히는 그 자체로 기쁜 일이며, 스스로 내세우거나 자랑삼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며, 사람들이 모여도 흔들리지 말 것이며,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용’이 못 된 ‘용스러운’ 지식인들은 나댄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몇몇에게서 찬사를 들으면 자기 몸을 자기가 핥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겉잡을 수 없게 된다. 공자는 공부를 군자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했고, 그 길은 다름 아닌 고전에서 배우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괜히 강유원한테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제발 그러지 마시라. 공자한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왜 강유원한테 배우려는가?(웃음) 내가 쓴 이 책은 그저 안내서일 뿐이라.”
물론 지금 시대의 군자는 저자가 이미 언급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시민’ 내지 ‘noble’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사람의 의미일 것이다.
“화장터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어떤 시체를 선호하느냐고 물으면 깨끗하게 타는 시체를 선호한다고 하는데, 훌륭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깨끗하게 탄다고 한다.(웃음). 책은 나를 위해 읽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앎을 조용히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행위보다 멋있지 않나? 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는 내가 멋지다.(웃음)”
무엇을 어떻게 읽을까?
“외형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에서 소개한 책들을, 어렵더라도 원저로 갖추기 바란다. 구입 필수라는 이야기다. 책꽂이에 자리가 없으면 과감하게 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나 심지어 최근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까지도 빼 버려라. 그리고 책꽂이에 충분히 자리를 마련해 이 책에서 참고로 언급한 책들 백여 권도 ‘가급적’ 사서 꽂아라. 남이 다 읽었다니까, 최신 이론이라고 하니까 괜히 초조해져서 들뢰즈니 지젝에게 목을 매는 건 현명한 책 읽기가 아니라고 여긴다. 미셸 푸코가 가장 열심히 읽은 책이 플라톤의 『대화편』이다. ‘고전을 쓴 사람들은 고전을 읽은 사람들’이다. 헤겔이 얼마나 열심히 『신곡』과 『대화편』을 읽었는지 아는가? 그것들을 빼고 어떻게 헤겔을 읽겠는가?”
노벨문학상 수상작들까지 언급하는 단호한 저자의 말투는 그런 책을 안 읽고 있다는 사실이 좀 부끄러웠던 필자에게는 당황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만큼의 신뢰감을 뿜어냈다.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 책을 통해 진지하고 깊은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 “아마 밑줄 치고 노트 정리까지 하면서 필수 도서와 참고 도서를 한 번씩 읽는 데 5년 정도 걸릴 것이다.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어 저자는 반드시 시대 상황과 맞물리게 책을 읽으라고 강조했다. “『곁에 두는 세계사』라는 책이 있다. 얼마나 재미있는 책인지 모른다. 연표인데 어떤 책을 읽든 그 시대를 펼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면서 읽으면 된다. 고전이란 기본적으로 역사책, 즉 옛날 책이다. 시대에 대한 감각이 없이 고전이 읽히지 않는다. 아니, 역사에 대한 감각은 모든 독서의 기본이다. 따라서 『곁에 두는 세계사』를 꼭 사서 곁에 두기 바란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란다. “존 로크의 『통치론』을 읽을 때 저 책을 펼쳐 보면 로크의 시대였던 1690년, 우리나라에서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향해 저주의 다트를 날렸다는 사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재미있는가?(웃음)”
이어 저자는 클림트를 아느냐고 청중에 대고 물었다. ‘키스’ ‘황금색의 화가’라는 말들이 조그맣게 들렸다. 왠지 모두가 클림트를 다 아는 느낌. 그러자 저자는 한 사람을 지적해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오스……”라는 속삭임, 그리고 저자의 다그침. “그러니까 오스트리아냐, 오스트레일리아냐.” 뭔가 확신할 수 없는 느낌에 모두들 눈을 피하고. 저자는 웃으며 말했다.
“맞다. 오스트리아다. 클림트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세기말 비엔나’라고 불리던 시기였다. 합스부르크 왕가, 마리 앙투아네트, 제국의 쇠락 등등이 떠올라야 클림트의 그림이 이해되지 않겠는가? 같은 시대, 변방인인 유대인 카프카는 시대를 문학에 담아냈다는 것도 더불어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Be noble!
“그리하여 우리는 고급(noble) 독자가 돼야 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사회가 힘들수록 고귀함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 고전의 주 구매층이 30~40대라고 들었는데, 그 연령이 20대로 내려가야 한다. 진심으로, 사람들이 20대에 훌륭한 책을 접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사회가 고귀함, 즉 신(神)에 다가가는 형태로 변화해 간다. 그래야 물화(物化)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좌파냐, 우파냐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헤겔 연구로 학위를 땄다고 해서 좌파는 아니다. 내 삶의 기준이 고전에 있고, 호메로스를 읽다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나는 우파에 가깝다. 다만 고귀한 우파가 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결은 인문학적 교양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또는 정치)가 고귀하지 않고 천박하다면, 다수 대중의 수준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전을 제대로 읽지 않은 이가, 인문학적, 역사 감각을 지니지 않은 이가 높은 자리에 앉는다면 그건 대중의 눈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 떠나서, 물화된 삶, 물화된 사회, 물화된 지구의 삭막함을 우리는 피부로 느끼고 있다. 경제 아래 모든 가치가 무릎을 꿇는 세상이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지니고 있는지를 모두가 느끼고 있다. 강의 끝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인문 고전의 결핍이 온갖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내 남 없이 혹시 미다스에게 온몸을 내던지고 스스로 물화의 길을 걷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모쪼록 Let’s be noble!
4월 마지막 날 저녁, 동대문구 정보화 도서관에서 『인문 고전 강의』의 강유원 저자 북 세미나가 있었다. 전날 손에 들어온 책의 앞부분만 읽은 채로 강연을 듣고, 책을 다 읽은 뒤에 후기를 쓰려고 했으나 다 읽지 못한 상태다. 그리 빨리 읽히는 책이 아니다. 아무리 쉽게 풀어 써도 인문 고전이 뭐 그리 녹록하겠는가!
개천에서 난 용이 될 것인가?
사실은 좀 일찍 도착한 탓에 서성거리다가 거친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저자를 복도에서 흘긋 보면서 ‘와!’ 하고 혼자 놀랐다. 저자 말마따나 강유원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이, 매우 강하고 독특한 인상만 풍겼기 때문이다. 역시나 독자인 듯한 두 분의 귀띔에 따르면 ‘좀 무서울 수도 있을 강의 스타일’이라고 했다. 청중 사이를 오가면서 질문을 막 던지고 호통도 친다는 것이다. 어쩌나……. 서울에 꽤 오래 살면서도 한번도 와보지 않은 멀고 낯선 동네에서 강연자에게 찍혀 창피당할 우려가 농후해졌다니! ‘책 안 읽었는데, 괜히 왔어, 괜히 왔어’라고 어쭙잖은 개그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말을 화이트보드에 쓰는 것으로 저자의 강연이 시작됐다. “예전에는 ‘용’이 다 똑같았다. 어려운 형편에서 고시 공부를 해 ‘스폰서가 뒤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용 됐다는 말의 의미였다. 획일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해야 하는 시대다. 용만이 아니라 여러 짐승이 다 필요하다. 그런데도 한국은 아직도 용과 ‘비룡인(非龍人)’의 두 종류의 인간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 삶의 목적이 용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비룡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위 잘난 사람이 아닌 대다수 우리들, 비룡인의 최종 목적은 ‘인문학적 교양인’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는 달리 말하면 ‘noble’한 사람이 될 거냐, ‘humble’한 사람이 될 거냐는 질문에서 ‘천박함’을 버리고 ‘고귀함’을 선택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비록 용이 되지는 못할망정 (혹은 싫을망정) 누군들 천박하고 싶을까! 그런데 어떻게? 저자가 내놓은 단 한마디의 해법은 ‘공부’였다. “(용 된 사람들이 소유한 물적 재산과 달리) 지식에는 주인이 없다. 지식은 공공 영역의 것이며, 원하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이 책도 그 일환으로 썼다 한다. 중학생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쓴 필독 인문 고전 강해 같은 책이라고 한다. 카리스마 있는 유머로 가득한 강의 스타일과 달리 부드럽게, 부드럽게 쓰느라 애먹었다고 저자가 말하자, 청중 중 다수를 차지한, 그의 강의 제자들은 공감의 웃음을 터뜨렸다. 저자의 강의 스타일은, 무섭기보다는 카리스마와 긴장시키는 유머 때문에 흡입력 있는 그것이었고, 과연 많은 이들에게 강유원 저자는 ‘더 세게 말해주세요’ 하는 표정으로 선망하는 ‘강마에’였다!
공부를 왜 하며,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
저자는 책 563쪽을 보라고 했다. 저 유명한 ‘學而時習之 不易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그 대목이었다. ‘子 가라사대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랴.’
“공부란 배우고 익히는 그 자체로 기쁜 일이며, 스스로 내세우거나 자랑삼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며, 사람들이 모여도 흔들리지 말 것이며,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용’이 못 된 ‘용스러운’ 지식인들은 나댄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몇몇에게서 찬사를 들으면 자기 몸을 자기가 핥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겉잡을 수 없게 된다. 공자는 공부를 군자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했고, 그 길은 다름 아닌 고전에서 배우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괜히 강유원한테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제발 그러지 마시라. 공자한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왜 강유원한테 배우려는가?(웃음) 내가 쓴 이 책은 그저 안내서일 뿐이라.”
물론 지금 시대의 군자는 저자가 이미 언급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시민’ 내지 ‘noble’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사람의 의미일 것이다.
“화장터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어떤 시체를 선호하느냐고 물으면 깨끗하게 타는 시체를 선호한다고 하는데, 훌륭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깨끗하게 탄다고 한다.(웃음). 책은 나를 위해 읽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앎을 조용히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행위보다 멋있지 않나? 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는 내가 멋지다.(웃음)”
무엇을 어떻게 읽을까?
“외형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에서 소개한 책들을, 어렵더라도 원저로 갖추기 바란다. 구입 필수라는 이야기다. 책꽂이에 자리가 없으면 과감하게 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나 심지어 최근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까지도 빼 버려라. 그리고 책꽂이에 충분히 자리를 마련해 이 책에서 참고로 언급한 책들 백여 권도 ‘가급적’ 사서 꽂아라. 남이 다 읽었다니까, 최신 이론이라고 하니까 괜히 초조해져서 들뢰즈니 지젝에게 목을 매는 건 현명한 책 읽기가 아니라고 여긴다. 미셸 푸코가 가장 열심히 읽은 책이 플라톤의 『대화편』이다. ‘고전을 쓴 사람들은 고전을 읽은 사람들’이다. 헤겔이 얼마나 열심히 『신곡』과 『대화편』을 읽었는지 아는가? 그것들을 빼고 어떻게 헤겔을 읽겠는가?”
노벨문학상 수상작들까지 언급하는 단호한 저자의 말투는 그런 책을 안 읽고 있다는 사실이 좀 부끄러웠던 필자에게는 당황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만큼의 신뢰감을 뿜어냈다.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 책을 통해 진지하고 깊은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 “아마 밑줄 치고 노트 정리까지 하면서 필수 도서와 참고 도서를 한 번씩 읽는 데 5년 정도 걸릴 것이다.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어 저자는 반드시 시대 상황과 맞물리게 책을 읽으라고 강조했다. “『곁에 두는 세계사』라는 책이 있다. 얼마나 재미있는 책인지 모른다. 연표인데 어떤 책을 읽든 그 시대를 펼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면서 읽으면 된다. 고전이란 기본적으로 역사책, 즉 옛날 책이다. 시대에 대한 감각이 없이 고전이 읽히지 않는다. 아니, 역사에 대한 감각은 모든 독서의 기본이다. 따라서 『곁에 두는 세계사』를 꼭 사서 곁에 두기 바란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란다. “존 로크의 『통치론』을 읽을 때 저 책을 펼쳐 보면 로크의 시대였던 1690년, 우리나라에서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향해 저주의 다트를 날렸다는 사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재미있는가?(웃음)”
이어 저자는 클림트를 아느냐고 청중에 대고 물었다. ‘키스’ ‘황금색의 화가’라는 말들이 조그맣게 들렸다. 왠지 모두가 클림트를 다 아는 느낌. 그러자 저자는 한 사람을 지적해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오스……”라는 속삭임, 그리고 저자의 다그침. “그러니까 오스트리아냐, 오스트레일리아냐.” 뭔가 확신할 수 없는 느낌에 모두들 눈을 피하고. 저자는 웃으며 말했다.
“맞다. 오스트리아다. 클림트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세기말 비엔나’라고 불리던 시기였다. 합스부르크 왕가, 마리 앙투아네트, 제국의 쇠락 등등이 떠올라야 클림트의 그림이 이해되지 않겠는가? 같은 시대, 변방인인 유대인 카프카는 시대를 문학에 담아냈다는 것도 더불어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Be noble!
“그리하여 우리는 고급(noble) 독자가 돼야 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사회가 힘들수록 고귀함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 고전의 주 구매층이 30~40대라고 들었는데, 그 연령이 20대로 내려가야 한다. 진심으로, 사람들이 20대에 훌륭한 책을 접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사회가 고귀함, 즉 신(神)에 다가가는 형태로 변화해 간다. 그래야 물화(物化)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좌파냐, 우파냐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헤겔 연구로 학위를 땄다고 해서 좌파는 아니다. 내 삶의 기준이 고전에 있고, 호메로스를 읽다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나는 우파에 가깝다. 다만 고귀한 우파가 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결은 인문학적 교양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또는 정치)가 고귀하지 않고 천박하다면, 다수 대중의 수준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전을 제대로 읽지 않은 이가, 인문학적, 역사 감각을 지니지 않은 이가 높은 자리에 앉는다면 그건 대중의 눈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 떠나서, 물화된 삶, 물화된 사회, 물화된 지구의 삭막함을 우리는 피부로 느끼고 있다. 경제 아래 모든 가치가 무릎을 꿇는 세상이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지니고 있는지를 모두가 느끼고 있다. 강의 끝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인문 고전의 결핍이 온갖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내 남 없이 혹시 미다스에게 온몸을 내던지고 스스로 물화의 길을 걷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모쪼록 Let’s be no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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