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비트에 평화의 메시지를 심다
작금의 대중가요도 메시지를 담은 음악이 희귀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알앤비 싱어 정기고(Junggigo)가 내놓은 를 역설적으로 돋보이게 한다.
2010.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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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반전과 평화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남들보다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이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요즘 같은 시기의 88만 원 세대들에게, 적극적인 사회문제 참여는 구시대적인 퇴행으로 조롱받기 쉽다. 작금의 대중가요도 메시지를 담은 음악이 희귀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알앤비 싱어 정기고(Junggigo)가 내놓은 를 역설적으로 돋보이게 한다.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것 절대 거짓일 수 없는 것이 있어 / 서로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해 우린 동등하기에 / 수많은 눈물과 상처들 우리가 만들어 냈잖아 / 조금만 바뀔 수 있다면 이렇게 웃을 수 있잖아” 정기고는 평화의 메시지를 무겁지 않은 힙합 스타일의 비트 위에서 풀어내고 있다. 많은 래퍼들이 모순적인 현실을 랩으로 성토한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었지만, 싱어의 가창을 통하여 아젠다를 환기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낯선 이름일 수 있는 정기고는 알앤비 싱어이지만 힙합계에서도 이미 잔뼈가 굵은 베테랑 축에 속한다. 동료 뮤지션과의 협업을 통해 언제나 힙합 신에 몸을 담아왔던 터라, 한국 힙합의 방향성을 되짚어보는 대목에서 그는 자신이 느끼는 바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도 하였다. 그는 개인적 사정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음악관과 롤 모델 아티스트를 설명할 때에 그의 모습에서는 일말의 피로감도 감지할 수 없었다.
음악 활동을 처음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
2002년도에 인피닛 플로우(Infinite Flow)와 같이 시작을 하게 되었어요. 마스터플랜(Master Plan)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3년 연속으로 참여했었는데 그때는 큐빅(Cubic)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었죠.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왔네요.
개인 활동보다는 존재감이 약할 수 있는 피처링 작업을 주로 해왔다. 이유가 있나?
활동 초기에 생각을 했던 것은 기획사에 무턱대고 들어가기보다는 피처링 작업을 하면서 일정한 결과물들을 이루어놓고 그때가 되어서 구체적인 계약 이야기를 제시하고 싶었어요. 내가 주도해서 음악적으로 나타내고 싶은 것들을 먼저 보여준 뒤, 그 후에 기획사와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주변에는 인피닛 플로우처럼 힙합을 하는 친구들밖에 없다 보니 네오 소울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피처링 작업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힙합 음악을 듣게 되면 래퍼 피처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래 피처링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흑인 음악을 전문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싱어로서 피처링에 참여하는 사람은 많은가?
2002년 힙합 신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보컬은 저밖에 없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주위에 랩하는 친구들밖에 없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저에게 선택권은 노래하는 것밖에 없었죠. 하지만 작법에 있어서는 래퍼로 똑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랩 피처링하는 친구들이 작업하는 것을 보면 호스트가 16마디를 부탁하면 16마디로 직접 가사를 써서 랩을 하잖아요. 저도 친구들과 작업하면서 보고 익힌 스타일이 그랬기 때문에 노래 피처링을 참여할 때도 그런 식으로 했어요. 랩 쓰는 것처럼 제가 멜로디를 직접 만들고 가사 쓰고. 래퍼처럼 똑같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활동을 시작한 거죠.
「No war no cry」에서 보컬이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힙합적인 측면이 많은 춰 같다.
그것은 곡에 힘을 부여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일부러 랩 피처링을 두 명, 팔로알토(Paloalto)와 넋업샨에게 부탁했죠.
오랜 기간 동안 캐리어를 쌓아온 셈인데 그 사이에 보컬 스타일이 바뀌었나?
변화를 많이 추구하려고 했지만 제 스타일을 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노래를 시작하고 처음 개인 앨범을 낸 것은 2008년이었으니까요. 그 기간 동안 각나그네와 서울스타(Seoulstar)라는 팀으로 같이 하기도 했지만 개인 타이틀이라고 하기에는 약한 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개인 앨범을 내려고 다른 분의 곡도 많이 골라보고 고민도 해봤는데 제 마음에 딱 맞는 곡이 없더라고요. 이러다가는 답이 없겠다 싶어져서 아예 제가 주축이 되어서 제 스타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힙합적인 느낌의 노선으로 방향을 바꿨어요. 결국 도끼(Dok2)한테 곡을 받아서 녹음을 해 봤는데 마음에 들더라고요. 사실 곡 자체는 되게 투박해요. 힙합 스타일이다 보니까 기본 4마디가 계속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것이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힙합 비트에 가성을 많이 써서 노래를 하는 가수가 별로 없다 보니 그런 측면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나름의 메리트가 있다고 보고 있고.
피처링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기가 막히게 보컬이 처리된 곡을 뽑자면?
인피닛 플로우 앨범 중에 에 수록되어 있는 「Art and fear」라는 곡이 괜찮았던 것 같아요. 중간 8마디 후크가.
같이 작업했던 사람 중에 느낌이 좋았던 뮤지션은 누가 있는가?
지금까지 참여한 정도가 곡 수로만 따지면 한 4~50곡이 될 것 같은데. 그중에서 넋업샨과 각나그네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하도 많은 친구들이랑 같이해서 한두 명으로 뽑기 힘드네요. (현재 피처링 작업 요청은 어느 정도인지 물었더니 세 곡 정도로 일본에 녹음을 해서 줘야 하는 곡도 있고, 마이노스(Minos)랑 작업도 있다고 했다.)
자신의 보컬 스타일이 어떤 것 같나. 무리 없이 진행되는 스타일 같은데. 강점이 있다면?
주위 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부분이 음색인 것 같아요. 편한 톤이기도 하고. 예쁘다는 말씀을 많이 해 주세요. 팔세토(가성)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팔세토와 관련해서 제일 많이 영향을 준 인물은 맥스웰(Maxwell)이죠. 그리고 에릭 베네(Eric Benet), 디 안젤로(D`Angelo), 이 세 뮤지션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너무 좋아해요.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팝송을 전혀 안 듣다가 에릭 베네의 「Georgy porgy」를 들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어요. 정말 멋있더라고요. 말랑말랑한 발라드가 아니라 제가 지금 지향하는 그루브 있는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도 에릭 베네의 덕이죠. 이어서 맥스웰을 듣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보컬적인 측면도 가다듬게 되었어요. 아는 동생에게 맥스웰을 소개 받고 듣게 되었는데 가성을 쓰는 스킬을 많이 배웠죠. ‘이 가성은 이 부분에서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 같은 것. 디안젤로는 를 통해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한번 듣고 나서 안 들었어요.(웃음) 가사가 슬랭이니까 따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이 안 되더라고요. 수입 음반이라서 비싸기만 하고.(웃음) 유일하게 「Devil`s pie」만 좋게 들었던 기억만 있다가 1년 뒤에 우연찮게 다시 듣게 되었는데 그때 알게 되었어요. 디안젤로가 어떤 매력이 있는지. 힙합 음악을 많이 듣고 난 뒤에 그런 감이 오더라고요.
힙합 음악을 필두로 흑인 음악의 대부분이 프로듀서에게 헤게모니가 넘어간 상태이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는 것이 힙합 음악의 본령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런 시점에서 「No war no cry」를 통해 반전의 메시지를 표출한다는 것이 본인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인가?
우선 「No war no cry」의 기본 주제 인식은 예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에요. 우선 노래에는 사랑 노래가 많잖아요. 그래서 이런 성격의 곡을 부르게 되면 사람들이 가사의 메시지를 들을 때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해 봤어요. 또 제 음악의 방향성을 찾는 것에서도 많은 조언을 받았어요. 지인들에게 노래를 통해 뜻있는 작업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말도 들었고. 그리고 저는 소속된 회사가 없어요. 언더그라운드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대중가요 시장 내부에 있었더라면 아마도 못했겠죠. 내부에 발을 들이게 되면 그때부터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없게 되니깐. 그런 점은 언더그라운드에서 할 수 있고, 또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나?
그렇다고 거창해지고 싶지는 않아요. 단지 저에게는 음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전쟁과 평화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잖아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잘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참여적인 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고. 어찌 보면 청취자뿐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전하는 이야기 같기도 해요. 처음에는 이런 의미를 가진 노래를 만드는 데 부담이 있었어요. 혹시나 사람들이 한발 앞서가서 오해하실까봐. 그래서 「No war no cry」와 전혀 상관없는 사랑 노래인 「Cream」이라는 곡을 일부러 수록했습니다. 제 딴에는 거창하게 포장되는 것이 싫어서 신경을 쓴 것이에요.
「No war no cry」를 듣게 되면 필연적으로 밥 말리(Bob Marley)의 「No woman no cry」가 떠오른다. 오마쥬 혹은 벤치마킹인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많이 듣긴 들었어요. 하지만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요. 제가 가이드 녹음을 할 때 항상 발음이 막 나오는 대로 하거든요. 그런데 「No war no cry」를 녹음할 때는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던지, 저도 모르게 「No war no cry」라는 말이 입에서 편하게 나오더라고요. 또 막상 실제 가사를 쓸 때도 제가 했던 가이드 녹음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은 가사를 찾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작사를 하면서도 「No war no cry」 부분이 귀에 계속 맴돌았던 것 같아요.
대중음악이 사랑 타령의 일관조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불만까지는 아니고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뮤지션들이 추구하니깐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봐요. 저도 만약에 대중적인 노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사랑 노래도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진짜 사랑 노래를 하고 싶어서 부르는 거냐. 아니면 돈에 이끌려서 사랑 노래를 부르는 거냐. 이것이 중요하겠죠.
사회 이슈에 대해서 앞으로도 노래에 담을 생각인가? 관심이 있는 부분이 있다면?
계속할 생각은 있고, 기아에 관심이 있긴 해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에게 유투(U2)의 보노(Bono)가 아프리카의 빚을 탕감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말씀을 하시면서 “너에게 그런 비전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셨죠. 그런 조언들이 제 가치관 성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어차피 노래를 하고 좋아해 주시는 분이 있다면 음악을 받아들였을 때 생각을 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활동 기간을 따지자면 잔뼈가 굵을 만도 한데 힙합 신을 정리해보자면? 문제점이나 방향성의 측면에서.
지금 와서 보면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상황이 좋아진 것 같아요. 팬 분들도 많아지신 것 같고. 그런데 힙합 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수익을 얻는 시스템의 문제에서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조심스러운 발언이긴 하지만 돈 되는 것을 못해서 힙합 신에 있는 친구들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언더그라운드에서 해야 될 것이 있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것을 내팽기고 오버로만 뜨려는 친구들이 간혹 있어요. 그런 친구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팬은 어린 친구들이 많아요. 흥미로운 것이 팬들도 로테이션이 있어요.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팬층이 빠져나가요. 대학교 가서 잘 안 듣는 건지 안 찾는 건지. 결국에는 팬층이 고등학교에서 계속 들어왔다 나갔다 하거든요. 문제는 그렇게 되면 뮤지션들도 나이가 많은 팬들과 대화가 가능한 음악을 하고 싶은데, 막상 공연장을 가면 어린 친구들이 너무 많아요. 나이 있는 힙합 팬들이 공연장 가서 뻘쭘함을 느낀 적이 많았었다고 듣기도 했고요.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 같기 한데.
사진 촬영을 즐기는 것 같다. 음악 외적인 분야에도 관심이 있는가?
사진 찍는 것은 저 혼자 보려고 하는 것이고요.(웃음) 패션에떵 관심이 있고, 로컬 컬쳐 신에도 관심이 많아요. 예를 들면 옷을 만든다거나. 그림을 그리고, 디제잉 하는 친구들과 계속 콜라보레이션을 할 생각이에요. 이번 앨범을 제작하면서 옷을 만드는 친구들이랑 손을 잡고 모자도 같이 만들었어요. 브라운브레스(Brownbreath)라는 스트릿 패션 브랜드가 있는데 그 친구들 모토가 ‘Spread the message’예요. 앨범 콘셉트와도 잘 맞는 것 같아서 앨범 커버가 그려진 모자를 만들어서 CD와 같이 묶어 한정판으로 판매하는 중이에요.
일본 뮤지션 미쯔 더 비츠(Mitsu the Beats)와 작업하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서울스타 시절 때 저희 음악을 듣고 좋았다는 의견을 전해 들었어요. 그러다가 제 싱글 앨범 막바지 작업 때 운이 좋게도 입국을 하셔서 지인을 통해서 연결이 되었죠. 만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그냥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해주셨어요. 미쯔 더 비츠는 이미 해외에서는 유명하신 비트 메이커이고, 빌보드 차트 진입 곡도 있어요. 현재 크로마뇽(Cro-Magnon)이 소속되어 있는 레이블, 재지 스포트(Jazzy Sport)에서 계시고 유럽 쪽에서도 인지도가 꽤 있죠. 앞으로도 기회만 있다면 무조건 해외 뮤지션들과 작업을 많이 하고 싶어요.
미쯔 더 비츠가 정기고에게서 뭘 느꼈다고 하던가.
우선 한국에는 일반 대중가요만 있는 줄 알았대요. 그런데 서울스타를 통해서 이런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한국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하셨어요. 그 당시에 저희가 재지한 힙합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노래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며 이런 뮤지션이 있었다는 놀라움을 느꼈나 봐요. 한국 음악을 접할 기회도 별로 없었기도 했고.
힙합플레이야에서 열렸던 리믹스 컴피티션이 흥미로웠다.
아카펠라를 공개해서 리믹스할 분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싶었어요. 분명히 숨어 있지만 능력 있는 친구들이 있을 텐데 발 디딜 줄이 없어서 집에서만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많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의외로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참여해서 놀랐어요. 그래서 컴피티션에서 1등을 한 친구인 케프시(Kefcee)를 이번 앨범에 참여시켰어요. 제가 기본적으로 열정 있는 친구들을 좋아해요, 열심히 하면 두드린 만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런 친구들이 있다면 제가 열성적으로 연결을 해서 같이하고 싶어요.
풀 앨범을 낼 계획은 있는가.
네. 2010년에는 무조건 풀 앨범을 낼 계획이에요. 풀 앨범은 알맞은 기획사를 찾아서 이야기도 해 볼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말씀드린 것처럼 독자적으로 앨범 활동을 전개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게 되니까 아쉬울 것 같아요. 다만 싱글에 수록되었던 곡들도 무조건 정규 앨범에도 집어넣을 계획이에요. 물론 리믹스 트랙은 싱글에만 있게 할 생각이고요. 싱글 앨범의 매력을 아예 없앨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기존의 싱글 앨범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정기고의 음악을 어떻게 들어주었으면 하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No war no cry」를 들으시고 제가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사람이라서 음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반전을 노래의 한 메시지로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어요. 편안하게 들어주세요. 보통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는 노래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할 뿐입니다.
인터뷰 : 임진모, 홍혁의
사진 : 김현이
정리 : 홍혁의
2010/01 홍혁의 (hyukeui1@nate.com)
낯선 이름일 수 있는 정기고는 알앤비 싱어이지만 힙합계에서도 이미 잔뼈가 굵은 베테랑 축에 속한다. 동료 뮤지션과의 협업을 통해 언제나 힙합 신에 몸을 담아왔던 터라, 한국 힙합의 방향성을 되짚어보는 대목에서 그는 자신이 느끼는 바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도 하였다. 그는 개인적 사정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음악관과 롤 모델 아티스트를 설명할 때에 그의 모습에서는 일말의 피로감도 감지할 수 없었다.
음악 활동을 처음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
2002년도에 인피닛 플로우(Infinite Flow)와 같이 시작을 하게 되었어요. 마스터플랜(Master Plan)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3년 연속으로 참여했었는데 그때는 큐빅(Cubic)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었죠.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왔네요.
개인 활동보다는 존재감이 약할 수 있는 피처링 작업을 주로 해왔다. 이유가 있나?
활동 초기에 생각을 했던 것은 기획사에 무턱대고 들어가기보다는 피처링 작업을 하면서 일정한 결과물들을 이루어놓고 그때가 되어서 구체적인 계약 이야기를 제시하고 싶었어요. 내가 주도해서 음악적으로 나타내고 싶은 것들을 먼저 보여준 뒤, 그 후에 기획사와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주변에는 인피닛 플로우처럼 힙합을 하는 친구들밖에 없다 보니 네오 소울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피처링 작업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힙합 음악을 듣게 되면 래퍼 피처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래 피처링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흑인 음악을 전문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싱어로서 피처링에 참여하는 사람은 많은가?
2002년 힙합 신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보컬은 저밖에 없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주위에 랩하는 친구들밖에 없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저에게 선택권은 노래하는 것밖에 없었죠. 하지만 작법에 있어서는 래퍼로 똑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랩 피처링하는 친구들이 작업하는 것을 보면 호스트가 16마디를 부탁하면 16마디로 직접 가사를 써서 랩을 하잖아요. 저도 친구들과 작업하면서 보고 익힌 스타일이 그랬기 때문에 노래 피처링을 참여할 때도 그런 식으로 했어요. 랩 쓰는 것처럼 제가 멜로디를 직접 만들고 가사 쓰고. 래퍼처럼 똑같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활동을 시작한 거죠.
「No war no cry」에서 보컬이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힙합적인 측면이 많은 춰 같다.
그것은 곡에 힘을 부여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일부러 랩 피처링을 두 명, 팔로알토(Paloalto)와 넋업샨에게 부탁했죠.
오랜 기간 동안 캐리어를 쌓아온 셈인데 그 사이에 보컬 스타일이 바뀌었나?
변화를 많이 추구하려고 했지만 제 스타일을 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노래를 시작하고 처음 개인 앨범을 낸 것은 2008년이었으니까요. 그 기간 동안 각나그네와 서울스타(Seoulstar)라는 팀으로 같이 하기도 했지만 개인 타이틀이라고 하기에는 약한 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개인 앨범을 내려고 다른 분의 곡도 많이 골라보고 고민도 해봤는데 제 마음에 딱 맞는 곡이 없더라고요. 이러다가는 답이 없겠다 싶어져서 아예 제가 주축이 되어서 제 스타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힙합적인 느낌의 노선으로 방향을 바꿨어요. 결국 도끼(Dok2)한테 곡을 받아서 녹음을 해 봤는데 마음에 들더라고요. 사실 곡 자체는 되게 투박해요. 힙합 스타일이다 보니까 기본 4마디가 계속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것이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힙합 비트에 가성을 많이 써서 노래를 하는 가수가 별로 없다 보니 그런 측면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나름의 메리트가 있다고 보고 있고.
피처링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기가 막히게 보컬이 처리된 곡을 뽑자면?
인피닛 플로우 앨범 중에
같이 작업했던 사람 중에 느낌이 좋았던 뮤지션은 누가 있는가?
지금까지 참여한 정도가 곡 수로만 따지면 한 4~50곡이 될 것 같은데. 그중에서 넋업샨과 각나그네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하도 많은 친구들이랑 같이해서 한두 명으로 뽑기 힘드네요. (현재 피처링 작업 요청은 어느 정도인지 물었더니 세 곡 정도로 일본에 녹음을 해서 줘야 하는 곡도 있고, 마이노스(Minos)랑 작업도 있다고 했다.)
자신의 보컬 스타일이 어떤 것 같나. 무리 없이 진행되는 스타일 같은데. 강점이 있다면?
주위 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부분이 음색인 것 같아요. 편한 톤이기도 하고. 예쁘다는 말씀을 많이 해 주세요. 팔세토(가성)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팔세토와 관련해서 제일 많이 영향을 준 인물은 맥스웰(Maxwell)이죠. 그리고 에릭 베네(Eric Benet), 디 안젤로(D`Angelo), 이 세 뮤지션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너무 좋아해요.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팝송을 전혀 안 듣다가 에릭 베네의 「Georgy porgy」를 들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어요. 정말 멋있더라고요. 말랑말랑한 발라드가 아니라 제가 지금 지향하는 그루브 있는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도 에릭 베네의 덕이죠. 이어서 맥스웰을 듣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보컬적인 측면도 가다듬게 되었어요. 아는 동생에게 맥스웰을 소개 받고 듣게 되었는데 가성을 쓰는 스킬을 많이 배웠죠. ‘이 가성은 이 부분에서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 같은 것. 디안젤로는
힙합 음악을 필두로 흑인 음악의 대부분이 프로듀서에게 헤게모니가 넘어간 상태이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는 것이 힙합 음악의 본령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런 시점에서 「No war no cry」를 통해 반전의 메시지를 표출한다는 것이 본인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인가?
우선 「No war no cry」의 기본 주제 인식은 예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에요. 우선 노래에는 사랑 노래가 많잖아요. 그래서 이런 성격의 곡을 부르게 되면 사람들이 가사의 메시지를 들을 때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해 봤어요. 또 제 음악의 방향성을 찾는 것에서도 많은 조언을 받았어요. 지인들에게 노래를 통해 뜻있는 작업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말도 들었고. 그리고 저는 소속된 회사가 없어요. 언더그라운드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대중가요 시장 내부에 있었더라면 아마도 못했겠죠. 내부에 발을 들이게 되면 그때부터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없게 되니깐. 그런 점은 언더그라운드에서 할 수 있고, 또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나?
그렇다고 거창해지고 싶지는 않아요. 단지 저에게는 음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전쟁과 평화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잖아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잘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참여적인 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고. 어찌 보면 청취자뿐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전하는 이야기 같기도 해요. 처음에는 이런 의미를 가진 노래를 만드는 데 부담이 있었어요. 혹시나 사람들이 한발 앞서가서 오해하실까봐. 그래서 「No war no cry」와 전혀 상관없는 사랑 노래인 「Cream」이라는 곡을 일부러 수록했습니다. 제 딴에는 거창하게 포장되는 것이 싫어서 신경을 쓴 것이에요.
「No war no cry」를 듣게 되면 필연적으로 밥 말리(Bob Marley)의 「No woman no cry」가 떠오른다. 오마쥬 혹은 벤치마킹인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많이 듣긴 들었어요. 하지만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요. 제가 가이드 녹음을 할 때 항상 발음이 막 나오는 대로 하거든요. 그런데 「No war no cry」를 녹음할 때는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던지, 저도 모르게 「No war no cry」라는 말이 입에서 편하게 나오더라고요. 또 막상 실제 가사를 쓸 때도 제가 했던 가이드 녹음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은 가사를 찾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작사를 하면서도 「No war no cry」 부분이 귀에 계속 맴돌았던 것 같아요.
대중음악이 사랑 타령의 일관조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불만까지는 아니고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뮤지션들이 추구하니깐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봐요. 저도 만약에 대중적인 노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사랑 노래도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진짜 사랑 노래를 하고 싶어서 부르는 거냐. 아니면 돈에 이끌려서 사랑 노래를 부르는 거냐. 이것이 중요하겠죠.
사회 이슈에 대해서 앞으로도 노래에 담을 생각인가? 관심이 있는 부분이 있다면?
계속할 생각은 있고, 기아에 관심이 있긴 해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에게 유투(U2)의 보노(Bono)가 아프리카의 빚을 탕감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말씀을 하시면서 “너에게 그런 비전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셨죠. 그런 조언들이 제 가치관 성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어차피 노래를 하고 좋아해 주시는 분이 있다면 음악을 받아들였을 때 생각을 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활동 기간을 따지자면 잔뼈가 굵을 만도 한데 힙합 신을 정리해보자면? 문제점이나 방향성의 측면에서.
지금 와서 보면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상황이 좋아진 것 같아요. 팬 분들도 많아지신 것 같고. 그런데 힙합 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수익을 얻는 시스템의 문제에서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조심스러운 발언이긴 하지만 돈 되는 것을 못해서 힙합 신에 있는 친구들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언더그라운드에서 해야 될 것이 있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것을 내팽기고 오버로만 뜨려는 친구들이 간혹 있어요. 그런 친구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팬은 어린 친구들이 많아요. 흥미로운 것이 팬들도 로테이션이 있어요.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팬층이 빠져나가요. 대학교 가서 잘 안 듣는 건지 안 찾는 건지. 결국에는 팬층이 고등학교에서 계속 들어왔다 나갔다 하거든요. 문제는 그렇게 되면 뮤지션들도 나이가 많은 팬들과 대화가 가능한 음악을 하고 싶은데, 막상 공연장을 가면 어린 친구들이 너무 많아요. 나이 있는 힙합 팬들이 공연장 가서 뻘쭘함을 느낀 적이 많았었다고 듣기도 했고요.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 같기 한데.
사진 촬영을 즐기는 것 같다. 음악 외적인 분야에도 관심이 있는가?
사진 찍는 것은 저 혼자 보려고 하는 것이고요.(웃음) 패션에떵 관심이 있고, 로컬 컬쳐 신에도 관심이 많아요. 예를 들면 옷을 만든다거나. 그림을 그리고, 디제잉 하는 친구들과 계속 콜라보레이션을 할 생각이에요. 이번 앨범을 제작하면서 옷을 만드는 친구들이랑 손을 잡고 모자도 같이 만들었어요. 브라운브레스(Brownbreath)라는 스트릿 패션 브랜드가 있는데 그 친구들 모토가 ‘Spread the message’예요. 앨범 콘셉트와도 잘 맞는 것 같아서 앨범 커버가 그려진 모자를 만들어서 CD와 같이 묶어 한정판으로 판매하는 중이에요.
일본 뮤지션 미쯔 더 비츠(Mitsu the Beats)와 작업하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서울스타 시절 때 저희 음악을 듣고 좋았다는 의견을 전해 들었어요. 그러다가 제 싱글 앨범
미쯔 더 비츠가 정기고에게서 뭘 느꼈다고 하던가.
우선 한국에는 일반 대중가요만 있는 줄 알았대요. 그런데 서울스타를 통해서 이런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한국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하셨어요. 그 당시에 저희가 재지한 힙합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노래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며 이런 뮤지션이 있었다는 놀라움을 느꼈나 봐요. 한국 음악을 접할 기회도 별로 없었기도 했고.
힙합플레이야에서 열렸던
아카펠라를 공개해서 리믹스할 분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싶었어요. 분명히 숨어 있지만 능력 있는 친구들이 있을 텐데 발 디딜 줄이 없어서 집에서만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많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의외로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참여해서 놀랐어요. 그래서 컴피티션에서 1등을 한 친구인 케프시(Kefcee)를 이번
풀 앨범을 낼 계획은 있는가.
네. 2010년에는 무조건 풀 앨범을 낼 계획이에요. 풀 앨범은 알맞은 기획사를 찾아서 이야기도 해 볼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말씀드린 것처럼 독자적으로 앨범 활동을 전개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게 되니까 아쉬울 것 같아요. 다만 싱글에 수록되었던 곡들도 무조건 정규 앨범에도 집어넣을 계획이에요. 물론 리믹스 트랙은 싱글에만 있게 할 생각이고요. 싱글 앨범의 매력을 아예 없앨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기존의 싱글 앨범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정기고의 음악을 어떻게 들어주었으면 하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No war no cry」를 들으시고 제가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사람이라서 음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반전을 노래의 한 메시지로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어요. 편안하게 들어주세요. 보통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는 노래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할 뿐입니다.
인터뷰 : 임진모, 홍혁의
사진 : 김현이
정리 : 홍혁의
2010/01 홍혁의 (hyukeui1@nate.com)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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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앙ㅋ
2011.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