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음악, 월드 뮤직, 팝을 아우르는 전방위 뮤지션
지난 7월, 6집 <그땐 몰랐던 일들>을 발표하며 6년 만에 팬들을 조우한 윤상은 앨범을 통해 우리 음악계에 조용한 메시지를 던진다.
200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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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6집 <그땐 몰랐던 일들>을 발표하며 6년 만에 팬들을 조우한 윤상은 앨범을 통해 우리 음악계에 조용한 메시지를 던진다. 음악으로 승부하기보다는 예쁘고 현란한 안무 그리고 섹시함을 무기 삼은 가수들이 잇달아 등장하고 이윤만을 생각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곡의 질을 크게 고려하지 않은 채 EP나 싱글이 마구 쏟아지는 왜곡된 최근 우리 음악시장을 한번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적어도 주류에서 음악가로서 진지한 고민이 담긴 앨범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윤상의 신보는 이러한 현실과는 달리 차분히 제 갈 길을 가는 음악인으로서 주위의 시선이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를 넌지시 전해준다.
데뷔 초반 그의 활동은 준수한 외모, 능란하지 않으나 순수한 보컬로 당대 여심(女心)에 파장을 던졌다. 그러다가 그는 차츰차츰 발라드를 벗어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으로 내달려갔다. 어느 순간부터 윤상은 제3세계 음악의 전파자 그리고 일렉트로니카 음악인으로 재탄생했다. 일부 기존의 지지층, 청취들과의 거리감은 어쩌면 예상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로 충돌하는 양상의 ‘자신의 음악적 견해’와 ‘기존에 형성되었던 대중의 감성’이 닿을 수 있는 접점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번 6집 앨범이 그 접점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주류에 편승해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되 대중과의 영역 또한 구축하는 음악가로 남고자 하는 욕구를 읽을 수 있다. 지난 8월 20일 상상마당에서 그동안의 행보와 최근 발표한 앨범 <그땐 몰랐던 일들>에 대해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4집 <이사> 앨범을 발표하면서부터 서서히 제3세계 음악이나 일렉트로니카 장르에 주력해왔다. 다소 생소한 장르의 앨범이 발표되어 오다 이번 앨범은 기존의 청취자들에게 코드나 멜로디가 초반 음악을 연상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윤상 1집은 대중적 시도였다. 이후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발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유학 기간 동안에도 영화 음악이나 작곡을 배우기보다는 뮤직 테크놀로지나 전자 음향과 같은 이론을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6집 앨범을 발표하기 전까지 몇 차례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앨범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첫 단추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음악을 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배우고 이런 것을 떠나 피아노와 통기타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 대신 아직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어차피 반주는 전자 악기로 가야했다. 스트링을 녹음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예산도 없었고, 학교와 집, 녹음실 등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아마 조금은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반주는 전자음악이지만 안에 있는 곡은 거의 처음 감수성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음악을 이해하면서도 이전의 내 모습을 끄집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 뒤늦은 질문이긴 하지만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5집 발표하고 곡이 안 나와서 유학을 갔다. 특별할 것은 없지만 대중음악 안에서는 내 욕심껏 했다고 생각했다. 솔로 음반을 한다는 것 자체에 막연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음반을 발표하면 평이 나빴던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상업적인 측면을 생각했을 때 내가 또 판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화가 났다. 당시 국내에서는 들을 만한 곡이 없었다고 판단했고, 내가 가진 영역 내에서도 새로움을 찾기가 어려웠다. 곡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 음악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난다고 하면 가장 먼저 작곡을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유학 기간 동안 곡을 작업할 때 난이도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이 놈이 유학까지 했으니 어떤 곡을 내놓을까?’ 하는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감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유학을 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음악을 하면서 남들이 하지 않는 실험을 하다가 한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시작했고 작년 말 모텟(Mo:tet)으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모텟에 대한 주위의 반응은 어땠는가.
사실 모텟 앨범을 작업할 때는 사무실에서도 만류하는 분위기였다. 일부에서는 ‘윤상의 악취미’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사실 팀을 결성하게 된 것은 나 혼자의 의지로만 가능했던 일이 아니다. 이전부터 관심 있던 장르였지만 비대중적인 음악을 해 본적이 없었던 나 혼자 힘으로는 모든 작업을 하기는 힘들었다.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관심이 있었던 다른 멤버들 덕분에 기존에 해오던 내 음악으로부터 일탈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텟은 온전히 윤상 음악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전자음악의 음색과 윤상의 멜로디 워크 간의 조화는 고려했어야 할 것 같다. 전자음악을 가지고 자기 본연의 멜로디 패턴을 결합시키는 데 충돌하는 부분은 없었는가. 팬들 입장에서는 윤상의 고급스러운 멜로디를 기대했을 것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전자 음악과 이전의 음악을 분리해 듣느라 힘들었다. 전자음이 걸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그렇게 들으셨다는 부분에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곡 자체는 예전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자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번 앨범을 작업하면서 이런 정서에 이런 신시사이저를 쓰는 것이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윤상표 팝, 가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작업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원래 덩어리와 모던한 전자음이 콘트라스트(대조)가 강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 점이 나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이번 앨범에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다.
이 앨범을 만들면서 ‘이건 건진 것 같다’ 하는 곡이 있었는가.
그런 곡은 없다. 앨범 자체가 ‘아, 내가 한 번 더 앨범 작업을 끝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다. (음악적 갈등이 많았던 것 같다고 했더니 ‘최대한 밝게 작업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아까 곡이 안 나온다고 했다. 그 개념은 무엇인가. 단순히 상업적인 면인가. 음악적 한계에 부딪친 것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음악작업에 동물적인 쾌감을 못 느낀 것인가.
곡이 안 나온다는 의미는 ‘재미가 없어서 못 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음악 할 맛이 안 났다고 할까. 그래서 현실적으로 공부나 하자 하는 생각이 들어 유학길에 올랐다. 이번 앨범을 제작하기 전 만들어져 있던 데모가 대략 300개는 됐다. 현대 음악에 가까운 사운드를 만들려고 했던 부분도 있었고 일단 곡의 수가 많았다. 다시 말해 결국 내가 음악을 한다는 것은 내 안에 에너지가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모텟, KBS 다큐 <누들 로드>, 6집 앨범 등 음반 작업을 상당히 많이 했다. LG아트센터에서 한 콘서트도 그렇고. 30일에는 앙코르 공연까지 있다. 그럼 올해가 음악적 에너지를 되찾은 해라고 볼 수 있겠는가?
그렇다.
신보 수록곡 가운데 본능적으로 어떤 곡이 당기는가.
「영원 속에」라는 곡이다. 곡의 앞부분을 만들어 둔 지 약 6년쯤 됐다. 처음 곡은 지금 앨범에 실려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앨범 작업을 하며 편곡이 조금 달라졌다. 나머지 곡들이 모두 일렉트로니카가 되다 보니 이 곡만은 그렇게 하기 싫어졌다. 스트링을 넣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번에는 그냥 피아노 하나로만 가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원래 있던 곡과 완전히 다르다. 원래 만들었던 상태에서 앞부분은 거의 신시사이저와 아기자기한 리듬 머신이 들어가 1980년대의 신스 팝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머지를 만들고 보니 피아노 하나만 가지고 심심하게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래 얘기 좀 하자. 자신의 보컬을 어떻게 생각하나. 흔히 이야기하는 가창력으로만 따질 때, 그리고 본인의 편곡이나 프로듀싱 지향을 감안할 때 노래는 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왜 노래를 하나. 말씀하신 대로 나는 ‘카시오페아’와 같이 순수한 창작곡으로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가장 나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악기는 나다. 그래서 노래를 한 것 같다. 잘한다는 일반적인 기준과는 물론 다를 수 있다. 녹음실 경험 등을 통해 알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맞는 것을 내 식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나는 노래를 하는 것이다.
이번 앨범은 형식적으로 일렉트로니카 앨범이다. 돌이켜보면 대중적 팝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고로 월드 뮤직으로 넘어간 것 같다. 그럼 일렉트로니카로 넘어간 것은 어떤 계기인가.
월드 뮤직으로 넘어간 한 가지 이유는 수많은 보사노바가 대한민국에 있었지만 사실 그것을 듣고 겉핥기식 편곡으로 보사노바라고 하는 점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해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보사노바 음악을 한다고 하면 원주민들이 쓴 악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오리지널에 가까운 장치들을 가지고 와 음악을 해야 한다는 의지였다.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한쪽에는 악기에서 오는 뉘앙스를 내 식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예술적인 이유였다. 동경이라고 할까. 그 음악들을 가져 올 때는 최소한 한국에서 어떤 사람이 했던 것보다 이해를 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한국의 당시 보사노바 흐름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들의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싶었고,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곡 자체를 고민하는 것보다는 전반적인 편곡이 이루고 있는 것이 음악이다. 그게 재미있어서 음악을 하는 것이다. 신스 이전에 내가 좋아한 음악으로 클래식도 있고, 이지 리스닝의 곡도, 아바(ABBA)라는 큰 산도 있고 후반기로 갈수록 이들은 신스 팝이 되는데 나는 그 것이 부러웠다. 클래식 못지않은 곡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하나의 ‘자기 오케스트라’가 탄생한다는 가능성이 맘에 들었다. 적어도 내가 오케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음악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 저에게는 매력적인 것 같다.
본인의 일렉트로니카나 월드 뮤직에 개인적으로 만족을 하는가.
아니다. 나는 지속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박창학 씨의 가사가 많은 위로가 되고 있다.
박창학 씨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이어가자. 윤상에게 박창학이란 어떤 존재인가.
「배반」이라는 곡을 좋아하는데 나는 질감과 사운드적인 텍스처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기에 박창학 씨의 가사가 업혀지면 그때 윤상이라는 가수가 그리고 밴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수 윤상은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박창학과 함께했을 때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는 나의 반(半)인 것이다. 내 편곡은 한 시대의 고민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가사가 내 편곡 위에 앉으면 그때서야 ‘노래 곡’으로서 마침표가 찍힌다.
오늘날 윤상을 만들어 준 음악가는 누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때 존 테일러를 좋아해 ‘윤테일러’라고 불렸다고 하던데…….
존 테일러(John Taylor)의 베이스 톤을 좋아하고 듀란 듀란(Duran Duran)의 프로듀싱을 좋아한다. 특히 그들의 후반기 음악보다는 1, 2집에서의 음악적 자세와 성향에 영향을 받았다. 존 테일러의 베이스 라인이 나에게 크게 와 닿았다. 유학 갈 때 가장 큰 목표는 사운드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비틀스 음악을 만들어 낸 프로듀서 조지 마틴(George Martin)은 실로 과학자이자 예술가이다. 그 사운드를 애비로드에서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비틀스와 조지 마틴이 말해주듯 음악은 스튜디오 엔지니어링, 어레인징, 프로듀싱과 아티스트들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김현식이 부른 「한 여름 밤의 꿈」으로 작곡 데뷔를 했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와 황치훈의 「추억속의 그대」를 통해 윤상을 알았다. 당시 제작자인 김광수 사장은 윤상의 무엇을 보고 가수로 데뷔하게 만들었다고 보는가.
단순히 멀쩡하게 생겨서 그러지 않았을까? (웃음) 눈, 코, 입 다 있고 베이스를 비롯해 악기도 조금씩 다룰 줄 알고, 작곡도 할 줄 알았으니까. 반주도 만들 수 있었고. 두루 크게 모 나는 구석은 없었던 것 같다. (웃음) 참, 키도 크다. 그러니까 ‘대략 해볼 만한 애구나’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나 싶다. 사실 그때는 매니저를 통해 훈련받고, 좀 다듬어지고 그러면 음악계에 입문하기가 쉬웠을 때였던 것 같다.
5집까지는 팝 앨범을 만들었다. 물론 <이사>에서도 어느 정도 실험을 하기도 했지만. 이후에 일렉트로니카나 월드 뮤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런 음악은 대중적인 측면에서는 어려운 접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윤상의 팬이 포진해 있다. 여전히 팬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그 이유는 모르겠다.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지금까지 해온 음악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모텟에서 했던 음악도 그렇다. 한동안 곡이 나오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이건 에너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초창기에 「이별의 그늘」, 「한 걸음 더」를 할 때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그때 얻은 성공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람들이 내 음악보다는 외모를 가지고 또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에 사실 약간의 부담이나 반감이 있었다.
조금 식상한 질문이지만 윤상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유일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취미도 없다. (웃음) 아! 물론 나도 술 마시고 책보는 거 좋아한다. 가정을 갖기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았다. 작업할 때는 작업에만 몰두하고, 사람들 만나고 대부분 원하는 일만 하며 살아 온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한 가지 구원을 받는 점은 가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 학생 신분으로 위장을 해서 건실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정말 천재로 타고난 사람들이 스스로의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얻었을지언정 그 외적인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고 또 비참하게 죽어갔는지를 볼 때 나는 천재는 아니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가정이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최근 재밌게 들은 음악은 무엇이 있나.
영미 팝보다는 유럽피안 팝을 들을 때 재미있다. 아오키 다카마사라고 최근 알게 된 전자 음악가가 있는데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의 음악관이 아 이 사람은 진정한 히피구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오는 음악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또 브라질이나 쿠바 음악들은 내게 영혼의 치료제와도 같다.
들어보니 영미권의 팝 음악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 이전에는 영미 팝도 열심히 들었다. 또 현재도 상업적 작곡가로써 전체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듣고는 있다. 하지만 이런 음악에서보다는 앞에서 말한 쿠바나 브라질 음악 등에서 좀 더 많은 영감을 받고 마음에 와 닿는다.
음악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이 음반만은 꼭 들어봤으면 하고 추천하는 음악을 꼽는다면.
마이클 잭슨 을 추천하고 싶다. 물론 앨범에서 마이클 잭슨의 음악적 성향이나 화려한 퍼포먼스, 가창도 중요하지만 퀸시 존스(Quincy Jones)의 편곡을 좀 집중해서 들어봤으면 좋겠다. 이후 앨범인 , 도 좋을 것 같다. 이 앨범들을 들으면 프로그레시브부터 댄스까지 당시 모든 팝의 장르들을 섭렵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에 마이클 잭슨의 보컬은 지우고(웃음) 듣는 훈련을 해줬으면 좋겠고. 그리고 또 아바의 전 앨범을 추천한다. 지금 추천하는 음반 선정 기준은 연주한 사람과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내는 사운드 상호작용의 극대치의 효과가 잘 나타나는 것들이다. 특히 북미 평론가들은 아바의 음악이 녹음실에서 저지른 만행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명반 많다. 특히 퀸(Queen),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극대치 장르에서 극대치를 내려면 항상 사운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프랑스의 듀오 다프트 펑크(Daft Punk)라든지 저스틴스도 일인 프로듀싱 시대에 전 세계의 플로어를 쥐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사운드는 공통된 것이 있다고 본다. 예스(Yes) 그리고 참, 버글스(Buggles)도 그렇고. 나도 이런 의미에서 레코딩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자. 현재 공부하고 있는 톤마이스터 과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분야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부하는 것인가?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
톤마이스터(tonmeister) 과정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학과다. 톤마이스터를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자면 지휘자의 위치와 비교할 수 있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전두 지휘하는 역할에 놓여있지만, 톤마이스터는 레코딩 시대에 접어들며 녹음과 음악적 노하우를 접목시키는 좀 더 다양할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는 우리나라에서는 덜 보편화되어 있지만 향후 음악 작업에서는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학위를 톤마이스터로 받게 되는 것인가?
아직은 잘 모른다. 8월 30일 일요일 앙코르 공연을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돌아간다. 학기가 바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 논문을 쓸 계획이다. 논문의 주제에 따라 톤마이스터 또는 테크놀로지로 구분될 것 같다. 졸업 논문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인터뷰: 임진모, 옥은실
사진: 김현이
정리: 옥은실
2009/09 옥은실 (lameta@gmail.com)
하지만 그는 “서로 충돌하는 양상의 ‘자신의 음악적 견해’와 ‘기존에 형성되었던 대중의 감성’이 닿을 수 있는 접점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번 6집 앨범이 그 접점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주류에 편승해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되 대중과의 영역 또한 구축하는 음악가로 남고자 하는 욕구를 읽을 수 있다. 지난 8월 20일 상상마당에서 그동안의 행보와 최근 발표한 앨범 <그땐 몰랐던 일들>에 대해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4집 <이사> 앨범을 발표하면서부터 서서히 제3세계 음악이나 일렉트로니카 장르에 주력해왔다. 다소 생소한 장르의 앨범이 발표되어 오다 이번 앨범은 기존의 청취자들에게 코드나 멜로디가 초반 음악을 연상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윤상 1집은 대중적 시도였다. 이후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발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유학 기간 동안에도 영화 음악이나 작곡을 배우기보다는 뮤직 테크놀로지나 전자 음향과 같은 이론을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6집 앨범을 발표하기 전까지 몇 차례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앨범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첫 단추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음악을 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배우고 이런 것을 떠나 피아노와 통기타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 대신 아직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어차피 반주는 전자 악기로 가야했다. 스트링을 녹음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예산도 없었고, 학교와 집, 녹음실 등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아마 조금은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반주는 전자음악이지만 안에 있는 곡은 거의 처음 감수성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음악을 이해하면서도 이전의 내 모습을 끄집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 뒤늦은 질문이긴 하지만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5집 발표하고 곡이 안 나와서 유학을 갔다. 특별할 것은 없지만 대중음악 안에서는 내 욕심껏 했다고 생각했다. 솔로 음반을 한다는 것 자체에 막연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음반을 발표하면 평이 나빴던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상업적인 측면을 생각했을 때 내가 또 판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화가 났다. 당시 국내에서는 들을 만한 곡이 없었다고 판단했고, 내가 가진 영역 내에서도 새로움을 찾기가 어려웠다. 곡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 음악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난다고 하면 가장 먼저 작곡을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유학 기간 동안 곡을 작업할 때 난이도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이 놈이 유학까지 했으니 어떤 곡을 내놓을까?’ 하는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감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유학을 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음악을 하면서 남들이 하지 않는 실험을 하다가 한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시작했고 작년 말 모텟(Mo:tet)으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모텟에 대한 주위의 반응은 어땠는가.
사실 모텟 앨범을 작업할 때는 사무실에서도 만류하는 분위기였다. 일부에서는 ‘윤상의 악취미’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사실 팀을 결성하게 된 것은 나 혼자의 의지로만 가능했던 일이 아니다. 이전부터 관심 있던 장르였지만 비대중적인 음악을 해 본적이 없었던 나 혼자 힘으로는 모든 작업을 하기는 힘들었다.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관심이 있었던 다른 멤버들 덕분에 기존에 해오던 내 음악으로부터 일탈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텟은 온전히 윤상 음악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전자음악의 음색과 윤상의 멜로디 워크 간의 조화는 고려했어야 할 것 같다. 전자음악을 가지고 자기 본연의 멜로디 패턴을 결합시키는 데 충돌하는 부분은 없었는가. 팬들 입장에서는 윤상의 고급스러운 멜로디를 기대했을 것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전자 음악과 이전의 음악을 분리해 듣느라 힘들었다. 전자음이 걸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그렇게 들으셨다는 부분에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곡 자체는 예전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자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번 앨범을 작업하면서 이런 정서에 이런 신시사이저를 쓰는 것이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윤상표 팝, 가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작업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원래 덩어리와 모던한 전자음이 콘트라스트(대조)가 강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 점이 나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이번 앨범에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다.
이 앨범을 만들면서 ‘이건 건진 것 같다’ 하는 곡이 있었는가.
그런 곡은 없다. 앨범 자체가 ‘아, 내가 한 번 더 앨범 작업을 끝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다. (음악적 갈등이 많았던 것 같다고 했더니 ‘최대한 밝게 작업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아까 곡이 안 나온다고 했다. 그 개념은 무엇인가. 단순히 상업적인 면인가. 음악적 한계에 부딪친 것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음악작업에 동물적인 쾌감을 못 느낀 것인가.
곡이 안 나온다는 의미는 ‘재미가 없어서 못 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음악 할 맛이 안 났다고 할까. 그래서 현실적으로 공부나 하자 하는 생각이 들어 유학길에 올랐다. 이번 앨범을 제작하기 전 만들어져 있던 데모가 대략 300개는 됐다. 현대 음악에 가까운 사운드를 만들려고 했던 부분도 있었고 일단 곡의 수가 많았다. 다시 말해 결국 내가 음악을 한다는 것은 내 안에 에너지가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모텟, KBS 다큐 <누들 로드>, 6집 앨범 등 음반 작업을 상당히 많이 했다. LG아트센터에서 한 콘서트도 그렇고. 30일에는 앙코르 공연까지 있다. 그럼 올해가 음악적 에너지를 되찾은 해라고 볼 수 있겠는가?
그렇다.
신보 수록곡 가운데 본능적으로 어떤 곡이 당기는가.
「영원 속에」라는 곡이다. 곡의 앞부분을 만들어 둔 지 약 6년쯤 됐다. 처음 곡은 지금 앨범에 실려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앨범 작업을 하며 편곡이 조금 달라졌다. 나머지 곡들이 모두 일렉트로니카가 되다 보니 이 곡만은 그렇게 하기 싫어졌다. 스트링을 넣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번에는 그냥 피아노 하나로만 가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원래 있던 곡과 완전히 다르다. 원래 만들었던 상태에서 앞부분은 거의 신시사이저와 아기자기한 리듬 머신이 들어가 1980년대의 신스 팝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머지를 만들고 보니 피아노 하나만 가지고 심심하게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래 얘기 좀 하자. 자신의 보컬을 어떻게 생각하나. 흔히 이야기하는 가창력으로만 따질 때, 그리고 본인의 편곡이나 프로듀싱 지향을 감안할 때 노래는 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왜 노래를 하나. 말씀하신 대로 나는 ‘카시오페아’와 같이 순수한 창작곡으로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가장 나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악기는 나다. 그래서 노래를 한 것 같다. 잘한다는 일반적인 기준과는 물론 다를 수 있다. 녹음실 경험 등을 통해 알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맞는 것을 내 식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나는 노래를 하는 것이다.
이번 앨범은 형식적으로 일렉트로니카 앨범이다. 돌이켜보면 대중적 팝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고로 월드 뮤직으로 넘어간 것 같다. 그럼 일렉트로니카로 넘어간 것은 어떤 계기인가.
월드 뮤직으로 넘어간 한 가지 이유는 수많은 보사노바가 대한민국에 있었지만 사실 그것을 듣고 겉핥기식 편곡으로 보사노바라고 하는 점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해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보사노바 음악을 한다고 하면 원주민들이 쓴 악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오리지널에 가까운 장치들을 가지고 와 음악을 해야 한다는 의지였다.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한쪽에는 악기에서 오는 뉘앙스를 내 식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예술적인 이유였다. 동경이라고 할까. 그 음악들을 가져 올 때는 최소한 한국에서 어떤 사람이 했던 것보다 이해를 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한국의 당시 보사노바 흐름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들의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싶었고,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곡 자체를 고민하는 것보다는 전반적인 편곡이 이루고 있는 것이 음악이다. 그게 재미있어서 음악을 하는 것이다. 신스 이전에 내가 좋아한 음악으로 클래식도 있고, 이지 리스닝의 곡도, 아바(ABBA)라는 큰 산도 있고 후반기로 갈수록 이들은 신스 팝이 되는데 나는 그 것이 부러웠다. 클래식 못지않은 곡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하나의 ‘자기 오케스트라’가 탄생한다는 가능성이 맘에 들었다. 적어도 내가 오케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음악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 저에게는 매력적인 것 같다.
본인의 일렉트로니카나 월드 뮤직에 개인적으로 만족을 하는가.
아니다. 나는 지속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박창학 씨의 가사가 많은 위로가 되고 있다.
박창학 씨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이어가자. 윤상에게 박창학이란 어떤 존재인가.
「배반」이라는 곡을 좋아하는데 나는 질감과 사운드적인 텍스처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기에 박창학 씨의 가사가 업혀지면 그때 윤상이라는 가수가 그리고 밴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수 윤상은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박창학과 함께했을 때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는 나의 반(半)인 것이다. 내 편곡은 한 시대의 고민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가사가 내 편곡 위에 앉으면 그때서야 ‘노래 곡’으로서 마침표가 찍힌다.
오늘날 윤상을 만들어 준 음악가는 누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때 존 테일러를 좋아해 ‘윤테일러’라고 불렸다고 하던데…….
존 테일러(John Taylor)의 베이스 톤을 좋아하고 듀란 듀란(Duran Duran)의 프로듀싱을 좋아한다. 특히 그들의 후반기 음악보다는 1, 2집에서의 음악적 자세와 성향에 영향을 받았다. 존 테일러의 베이스 라인이 나에게 크게 와 닿았다. 유학 갈 때 가장 큰 목표는 사운드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비틀스 음악을 만들어 낸 프로듀서 조지 마틴(George Martin)은 실로 과학자이자 예술가이다. 그 사운드를 애비로드에서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비틀스와 조지 마틴이 말해주듯 음악은 스튜디오 엔지니어링, 어레인징, 프로듀싱과 아티스트들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김현식이 부른 「한 여름 밤의 꿈」으로 작곡 데뷔를 했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와 황치훈의 「추억속의 그대」를 통해 윤상을 알았다. 당시 제작자인 김광수 사장은 윤상의 무엇을 보고 가수로 데뷔하게 만들었다고 보는가.
단순히 멀쩡하게 생겨서 그러지 않았을까? (웃음) 눈, 코, 입 다 있고 베이스를 비롯해 악기도 조금씩 다룰 줄 알고, 작곡도 할 줄 알았으니까. 반주도 만들 수 있었고. 두루 크게 모 나는 구석은 없었던 것 같다. (웃음) 참, 키도 크다. 그러니까 ‘대략 해볼 만한 애구나’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나 싶다. 사실 그때는 매니저를 통해 훈련받고, 좀 다듬어지고 그러면 음악계에 입문하기가 쉬웠을 때였던 것 같다.
5집까지는 팝 앨범을 만들었다. 물론 <이사>에서도 어느 정도 실험을 하기도 했지만. 이후에 일렉트로니카나 월드 뮤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런 음악은 대중적인 측면에서는 어려운 접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윤상의 팬이 포진해 있다. 여전히 팬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그 이유는 모르겠다.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지금까지 해온 음악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모텟에서 했던 음악도 그렇다. 한동안 곡이 나오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이건 에너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초창기에 「이별의 그늘」, 「한 걸음 더」를 할 때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그때 얻은 성공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람들이 내 음악보다는 외모를 가지고 또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에 사실 약간의 부담이나 반감이 있었다.
조금 식상한 질문이지만 윤상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유일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취미도 없다. (웃음) 아! 물론 나도 술 마시고 책보는 거 좋아한다. 가정을 갖기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았다. 작업할 때는 작업에만 몰두하고, 사람들 만나고 대부분 원하는 일만 하며 살아 온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한 가지 구원을 받는 점은 가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 학생 신분으로 위장을 해서 건실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정말 천재로 타고난 사람들이 스스로의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얻었을지언정 그 외적인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고 또 비참하게 죽어갔는지를 볼 때 나는 천재는 아니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가정이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최근 재밌게 들은 음악은 무엇이 있나.
영미 팝보다는 유럽피안 팝을 들을 때 재미있다. 아오키 다카마사라고 최근 알게 된 전자 음악가가 있는데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의 음악관이 아 이 사람은 진정한 히피구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오는 음악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또 브라질이나 쿠바 음악들은 내게 영혼의 치료제와도 같다.
들어보니 영미권의 팝 음악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 이전에는 영미 팝도 열심히 들었다. 또 현재도 상업적 작곡가로써 전체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듣고는 있다. 하지만 이런 음악에서보다는 앞에서 말한 쿠바나 브라질 음악 등에서 좀 더 많은 영감을 받고 마음에 와 닿는다.
음악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이 음반만은 꼭 들어봤으면 하고 추천하는 음악을 꼽는다면.
마이클 잭슨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자. 현재 공부하고 있는 톤마이스터 과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분야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부하는 것인가?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
톤마이스터(tonmeister) 과정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학과다. 톤마이스터를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자면 지휘자의 위치와 비교할 수 있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전두 지휘하는 역할에 놓여있지만, 톤마이스터는 레코딩 시대에 접어들며 녹음과 음악적 노하우를 접목시키는 좀 더 다양할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는 우리나라에서는 덜 보편화되어 있지만 향후 음악 작업에서는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학위를 톤마이스터로 받게 되는 것인가?
아직은 잘 모른다. 8월 30일 일요일 앙코르 공연을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돌아간다. 학기가 바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 논문을 쓸 계획이다. 논문의 주제에 따라 톤마이스터 또는 테크놀로지로 구분될 것 같다. 졸업 논문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인터뷰: 임진모, 옥은실
사진: 김현이
정리: 옥은실
2009/09 옥은실 (lameta@gmail.com)
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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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앙ㅋ
2011.10.31
로엔그람
2010.03.29
뮤지션의 자세와, 그리고 상업적으로도 꾸준하고, 기대받는 진짜 아티스트!
*유치뿡*
200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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