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 술로 모두 잊어버려요 - 과일로 향을 낸 스페인 와인펀치 샹그리아
2009.01.23
작게
크게
공유
“그때 제가 마시라고 주시던 것이 무엇이었지요?”
“언제? 여기서? 그때는 여러 가지를 마구 마시지 않았던가?
“아니, 여기가 아니고요, 첫날 밤에 말이에요.”
“생각이 나지 않는데, 꼬냑이 아니었던가?”
“아녜요. 꼬냑 같기는 했지만 다른 거였어요. 그것을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질 못했어요.”
“왜 그것을 마시려고 그러지? 그게 그렇게 좋았었소?”
“그런게 아니고 그런 훈훈한 술은 처음 마셔보았기 때문이에요. 개선문 근처의 조그만 비스트로였어요. 계단을 내려갔었지요. 택시 운전수와 여자들이 몇 명 있었어요. 웨이터가 팔뚝에다 여자의 문신을 했고요.”
“아, 이제야 알겠어. 아마 칼바도스였을거야. 노르망디에서 나는 사과로 만든 브랜디야.”
- 에리히 레마르크(E. Remarque), 『개선문(Arc de Triomphe)』
나치의 강제수용소로부터 간신히 도망쳐 파리에서 숨어살고 있는 외과의사 라비크는 애인이 비참하게 죽은 처참한 기억이 있다. 언젠가 애인과 자신을 수용소로 몰아넣은 비밀경찰을 찾아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파리에서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돌팔이 의사들의 수술을 도맡아 해주면서도 파리에 숨어 살고 있다는 이유로 보수는 형편없이 받아야만 한다. 그는 파리의 뒷골목에서 술과 여자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지낸다. 그런 그 앞에 역시 애인을 따라 파리로 흘러들어 온 혼혈인 여가수 조앙 마두가 나타난다. 수용소 시절의 기억 때문에 인간관계와, 특히 사랑과는 다시는 이어질 일 없을 거라 생각한 그는 곧 그녀와 순간적이면서도 정열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온전히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에는 증오로 인한 복수심이 더더욱 강했던 그는 결국 오랜 수소문 끝에 비밀경찰을 납치해 살해한다. 그가 복수를 하는 사이 다른 배우와 관계를 가졌던 조앙은 그가 쏜 총에 맞아 라비크 앞에서 허무하게 죽고 만다. 복수와 사랑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의 희생들이 있었음에도 계속 전쟁은 심해져만 가고 사람들은 다시 자신이 살고 있던 터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망명하거나 도망가는 삶을 계획하지만 라비크는 의술을 가진 자신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강제수용소로 들어간다.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한 삭막한 도시에서 만났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죽은 조앙이 그래도 그를 조금은 변화시킨 것이다.
세계 명작이라고 문고판으로 어렸을 때 읽었지만 도통 뭔 이야기인지 감정이입이 안 되다가 나이 들어 다시 봤을 때 넋 놓고 읽는 책들이 종종 있다. 실은 어린이 세계 명작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세계 명작이 그런데, 특히 레마르크의 『개선문』은 어른이 되어서 읽어도 불안함과 정체성을 고민해보거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을 해보지 않고, 사랑이 사랑인 줄 모르고 놓쳐버린 뒤에 괴로워 해 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 정말 많다. 특히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을 애써 무시하려 애쓰며 털어 넣는 술 한잔의 느낌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듯하다.
물론 술 이야기라면 정말 많은 책에서 다양하게 나오지만, 개선문에서만큼 소설 한 페이지 건너 한 번씩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책이 또 있을까? 아르마냑Armagnac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꼬냑과 아페리티프Aperitif 의 한 종류인 페르노Pernod, 보르도 와인 쎙떼밀리옹St.Emillion과 보드카까지 나오지만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술은 칼바도스Calvados, 애플 브랜디이다.
|
노르망디의 몇 십 종이 넘는 다양한 사과를 혼합해 만든 사과주를 기본으로 2년 정도는 오크통에 숙성시켜야 칼바도스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다른 술들이 그렇듯, 오래 묵은 칼바도스도 더 부드럽고, 독하고 값도 비싸다. 애플 사이더를 이용해 만든 술로는 미국의 애플잭Applejack도 있지만 애플잭은 애플사이더를 눈이 오고 추운 겨울에 얼려 농축시켜 만드는 것으로 방법이 많이 다르다.
|
|
그는 두 개의 잔에다 술을 따랐다.
“자, 받아요. 간단하고 야만적이긴 하지만 괴로울 때는 원시적으로 해치우는 것이 제일이거든. 세련된 짓이란 여유가 있을 때나 하는 것이고, 자 마셔요.”
“그리고 다음에는 어떡하지요?”
“그리고 또 마시는 거지.”
“저도 그렇게 해봤어요. 그래도 소용없는 일이었어요. 혼자서 취한다는 ?은 그리 좋은 일은 못 돼요.”
“우선 잔뜩 취해야 되는 법이야. 그럼 잘 돼요.”
- 에리히 레마르크(E. Remarque), 『개선문(Arc de Triomphe)』
몇 개 안 되는 올 새해 계획 중 포함되어 있는 것이 ‘술은 혼자서 마시지 말자’이다.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정해 본 새해 결심인데 이런저런 생각한답시고, 글을 써야 한다는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와인이나 맥주를 홀짝대는 것을 즐기다 보니 비사회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피곤한 완벽주의자 성격에 사람들이랑 부딪히면서 속 보여주기 싫은 마음에 속상해도 집에서 음악 틀어놓고 혼자 홀짝대는 것이 버릇이 되어 지금도 마음 다치는 일 있으면 집에 틀어박힌다. 하지만 올해는 친구들과 풍류를 즐기듯이 술을 마셔보려고 한다.
여름에는 뭐니 뭐니 해도 더우니까는 땀 흘린 후 맥주가 좋겠지. 필리핀 식으로 얼음 가득 채운 머그잔에 순간적으로 부어서 거품을 넘치게 한 다음 마시면 정말 시원하다. 아침부터 삼십 도를 훌쩍 넘는 브라질에서 한낮에 마시던 시원하고 물처럼 싱거운 맥주도 참 좋았는데. 언젠가 내가 정원이 생기면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도 해야겠지. 여러 가지 향신료로 맛을 낸 신선한 재료들을 숯불 위에서 굽고 미국식 비스킷과 옥수수도, 떡시루와 같은 큰 동이그릇에 얼음을 채우고 병맥주를 꽂아 놓는 것도 좋겠다.
가을에는 술을 먹는 것도 좋지만 담그는 계절이다. 봄에 걷은 매실로 담은 술이 어떤가 맛도 보고 따닥따닥 열린 작은 사과들로 술을 담그고 늦게 나온 포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한 레드와인이 어울리는 계절이다. 떫고 무거운 벨벳 같은 레드와인. 겨울에는 뭐니 해도 따끈한 정종에 오뎅. 몸을 덥혀 주는 동태찌개에 소주도 최고고. 그리고 겨울에 제철인 오렌지를 섞어 와인 칵테일, 샹그리아를 만들어 먹어야 할 테고.
라비크는 사람들을 마취하고 수술을 하는 외과 의사다. 여권도 없이 허름한 호텔방을 돌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복수심에 멍든 마음을 매일 같이 날카롭게 세워가며 하루하루 사는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안부를 묻지만 무심하게 남처럼 그냥 스쳐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잊으려 마시는 술과 잠시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여자, 둘뿐이었을 것이다. 상처받고 갈가리 찢겨진 그도 실은 수술이, 사랑이 필요한 환자였던 것이다. 그와 조앙은 그나마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기 위해선, 서로 그어놓은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그렇게 술을 마셔댔을 것이다. 마시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그들의 괴로움들. 독한 술로 순간순간을 마취시키는 것이 누군가를 만나서 상처를 치유 받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술을 마시는 것과, 무엇인가 잊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즐거워서, 행복해서 취하는 날도 많지만 우리 대부분은 괴로움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를 마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각자의 괴로움과 사정, 그리고 불면. 가끔은 사람보다는 술잔을 마주하는 것이 편한 날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울지마 울긴 왜 울어 고까짓 것 사랑 때문에 빗속을 거닐며 추억일랑 씻어버리고 한잔 술로 잊어버려요
멀리할 수도 없고, 너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작은 잔 속에 고여 있는 단기기억상실증용 마취제. 한잔으로 잊어버릴 수 있다면 아마 인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모두 술과 스스럼없는 친구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
58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채널예스
채널예스는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플랫폼입니다. 책, 영화, 공연, 음악, 미술, 대중문화, 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물든
2010.03.31
봄봄봄
2009.03.12
skgjwo
2009.02.13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