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다, 라고 말할 때의 ‘시’란 문예지에 발표되는 시작품이 아니라 사람들 가슴에 상상력의 불꽃을 지피는 시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죽고 싶은 괴로움, 견딜 수 없는 소외감, 혹은 황사가 불어 닥치는 봄날의 어떤 허허로움 속에서 정처 모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사람들은 시인이 된다.
200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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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시인이다, 라고 말할 때의 ‘시’란 문예지에 발표되는 시작품이 아니라 사람들 가슴에 상상력의 불꽃을 지피는 시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죽고 싶은 괴로움, 견딜 수 없는 소외감, 혹은 황사가 불어 닥치는 봄날의 어떤 허허로움 속에서 정처 모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사람들은 시인이 된다.
시인 자체가 시적인 연상의 소재가 되는 존재들이 있다. 파울 첼란, 딜런 토머스, 엘뤼아르, 랭보… 이들은 그 이름이, 생애가 바로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한 편의 시와 같다. 그런 이름이 존재하는 사회는 실제로 많이 읽혀지는지 여부를 떠나서 갑갑한 일상에서 초월을 꿈꾸는 시적 지향이 살아 숨쉰다. 그들이 있으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이름들이 있다. 기억이 나는 시점까지 거슬러 가보자면, 1970년대는 단연 김지하를 떠올려야 한다. 그는 미성숙한 한국사회에서 진보를 향한 거대한 상징이었다. 1980년대는 ‘민중과 해체’라는 상반된 양극단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고속성장의 열매를 분배해달라는 욕망에서 비롯된 ‘민중’의 목소리는 신경림, 고은 혹은 김남주로 대변될 수 있었고, 봉건적 집단성을 넘어 자아의 영토를 희구한 ‘해체’의 몸부림으로 이성복, 황지우를 들 수 있다. 이 1980년대는 한국시사 전체를 들어 가장 시가 왕성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1990년대. 화산이 폭발하듯 솟구쳤던 시의 위세가 수그러들고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장르로 이동하던 시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시를 안 읽는 듯하다. 대중 시, 낙서 시로 불리는 시 이전의 미숙한 글줄들만 청소년들에게 애호되고 본격 시는 더 이상 읽히지 않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에 어떤 새로운 시인이 은밀한 암호처럼, 혹은 남모를 은어처럼 영혼이 외로운 사람들 사이에 읽혀나가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시인의 이름이 기형도다.
KBS 프로그램에서 기형도 13주기 기일을 맞아 특집을 마련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제목. 많은 오해와 억측을 자아낸 그 돌연한 죽음 때문에 제작팀에서는 애초에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제작상 여러 난점에 부딪쳐 스튜디오 대담과 병행하기로 했는데 거기에 연세대 정과리 교수와 내가 패널로 불려 나가게 되었다. 심야극장에서의 사망과 그 죽음이 낳은 문학적 파장을 다큐멘터리로 추적하면서 군데군데 패널의 대화가 이어지는 형식이었다.
기형도는 1960년생, 연세대 정외과 79학번으로 1989년 3월 7일 사망 당시까지 중앙일보에 근무하던 기자였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이후 각종 사화집과 계간 《문학과 사회》에 작품을 발표했다. 다작은 아니지만 고도로 집중된 고딕 건축적 언어구조로 인해 발표되는 작품 하나하나가 크게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의 사람됨이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낳았다. 분명 가슴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낭떠러지를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평소 태도는 약간 건들건들하면서 유쾌한 친구였다. 노래를 잘했던 그의 주변에는 늘 흥겨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던 젊은 그가 어느 봄날의 새벽녘 파고다 극장에서 뇌출혈로 갑작스레 죽었다. 그가 남긴 가방에는 잘 정리된 시집 초고가 있었다. 그후 간암으로 죽음의 날을 기다리던 문학평론가 김현의 「영원히 닫힌 빈 방의 체험」이라는 해설과 함께 문학과지성사에서는 기형도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유고작 『입속의 검은 잎』을 황급히 출간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63쇄, 기형도가 한 시대의 시적, 문화적 기호로 변모하는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죽음의 장소 때문에 기형도가 게이였느니 무슨 불치병이 있었느니, 혹은 자살한 것이니 하는 억측이 사정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와 붙어 지내던 친구들이 다 생존해 있는 판인데 황당하고 기가 막힐 일이다. 특히 가족들이 많이 상처받았다. 시의 각광도 죽음의 센세이셔널리즘 때문이라는 말도 많았다. 독자의 환상도 존중받아야겠지만 없는 사실의 창작은 좀 곤란한 일이다.
에서 집중한 사항은 그의 생애 추적과 더불어 그의 작품이 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는가 하는 데 있었다. 나 역시 그 점을 설명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기형도가 죽은 비슷한 시기에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의 이연주 시인이 목을 매달아 죽었고, 풍요의 시대에 결핵과 영양실조라는 어이없는 병으로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의 진이정도 죽었다. 하지만 왜 기형도의 시가 특별히 지속적으로 애호받고 있는가.
그 까닭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단히 훌륭한 시’이기 때문이라는 좀 바보 같은 진단이 사실은 가장 정확하건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단 기형도 시의 특징을 들자면 고전적인 이미지 통일성이 남다르게 뛰어난 점, 작품 안에 서사가 존재하고 있으며, 영상으로 치환될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 구현이 1990년대의 문화 풍토와 잘 부합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사후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작품 전편에 무겁게 흐르고 있는 타나토스적 충동(죽음 애호, 죽음 지향)의 치열성과 아울러 존재의 생기를 완전히 무화시키는 어둡고 막막한 이미지들이 독자 가슴에 내밀하게 와 닿은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더 읽히고 유례없이 많은 평론이 씌어졌듯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다. 더불어 한 죽음이 문화적 자산으로 성장해서 연극, 영화, 소설의 소재로까지 뻗어나가고 있는 형국이다. 생전의 그와 약간의 교류가 있었다. 광화문에 있던 내 자취방에 집이 먼 그가 몇 차례 자고 간 인연, 새벽에 그가 남기고 간 메모를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는 치열한 영혼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레테의 강가에서 머리칼을 부여잡고 새벽을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젊은 영혼이 있다면 기형도를 읽으시라. 그의 시가 더 아프게 만들 것이다. 그 모든 아픔이 다할 때까지.
시인 자체가 시적인 연상의 소재가 되는 존재들이 있다. 파울 첼란, 딜런 토머스, 엘뤼아르, 랭보… 이들은 그 이름이, 생애가 바로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한 편의 시와 같다. 그런 이름이 존재하는 사회는 실제로 많이 읽혀지는지 여부를 떠나서 갑갑한 일상에서 초월을 꿈꾸는 시적 지향이 살아 숨쉰다. 그들이 있으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이름들이 있다. 기억이 나는 시점까지 거슬러 가보자면, 1970년대는 단연 김지하를 떠올려야 한다. 그는 미성숙한 한국사회에서 진보를 향한 거대한 상징이었다. 1980년대는 ‘민중과 해체’라는 상반된 양극단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고속성장의 열매를 분배해달라는 욕망에서 비롯된 ‘민중’의 목소리는 신경림, 고은 혹은 김남주로 대변될 수 있었고, 봉건적 집단성을 넘어 자아의 영토를 희구한 ‘해체’의 몸부림으로 이성복, 황지우를 들 수 있다. 이 1980년대는 한국시사 전체를 들어 가장 시가 왕성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1990년대. 화산이 폭발하듯 솟구쳤던 시의 위세가 수그러들고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장르로 이동하던 시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시를 안 읽는 듯하다. 대중 시, 낙서 시로 불리는 시 이전의 미숙한 글줄들만 청소년들에게 애호되고 본격 시는 더 이상 읽히지 않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에 어떤 새로운 시인이 은밀한 암호처럼, 혹은 남모를 은어처럼 영혼이 외로운 사람들 사이에 읽혀나가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시인의 이름이 기형도다.
KBS 프로그램
기형도는 1960년생, 연세대 정외과 79학번으로 1989년 3월 7일 사망 당시까지 중앙일보에 근무하던 기자였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이후 각종 사화집과 계간 《문학과 사회》에 작품을 발표했다. 다작은 아니지만 고도로 집중된 고딕 건축적 언어구조로 인해 발표되는 작품 하나하나가 크게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의 사람됨이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낳았다. 분명 가슴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낭떠러지를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평소 태도는 약간 건들건들하면서 유쾌한 친구였다. 노래를 잘했던 그의 주변에는 늘 흥겨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던 젊은 그가 어느 봄날의 새벽녘 파고다 극장에서 뇌출혈로 갑작스레 죽었다. 그가 남긴 가방에는 잘 정리된 시집 초고가 있었다. 그후 간암으로 죽음의 날을 기다리던 문학평론가 김현의 「영원히 닫힌 빈 방의 체험」이라는 해설과 함께 문학과지성사에서는 기형도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유고작 『입속의 검은 잎』을 황급히 출간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63쇄, 기형도가 한 시대의 시적, 문화적 기호로 변모하는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죽음의 장소 때문에 기형도가 게이였느니 무슨 불치병이 있었느니, 혹은 자살한 것이니 하는 억측이 사정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와 붙어 지내던 친구들이 다 생존해 있는 판인데 황당하고 기가 막힐 일이다. 특히 가족들이 많이 상처받았다. 시의 각광도 죽음의 센세이셔널리즘 때문이라는 말도 많았다. 독자의 환상도 존중받아야겠지만 없는 사실의 창작은 좀 곤란한 일이다.
그 까닭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단히 훌륭한 시’이기 때문이라는 좀 바보 같은 진단이 사실은 가장 정확하건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단 기형도 시의 특징을 들자면 고전적인 이미지 통일성이 남다르게 뛰어난 점, 작품 안에 서사가 존재하고 있으며, 영상으로 치환될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 구현이 1990년대의 문화 풍토와 잘 부합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사후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작품 전편에 무겁게 흐르고 있는 타나토스적 충동(죽음 애호, 죽음 지향)의 치열성과 아울러 존재의 생기를 완전히 무화시키는 어둡고 막막한 이미지들이 독자 가슴에 내밀하게 와 닿은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더 읽히고 유례없이 많은 평론이 씌어졌듯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다. 더불어 한 죽음이 문화적 자산으로 성장해서 연극, 영화, 소설의 소재로까지 뻗어나가고 있는 형국이다. 생전의 그와 약간의 교류가 있었다. 광화문에 있던 내 자취방에 집이 먼 그가 몇 차례 자고 간 인연, 새벽에 그가 남기고 간 메모를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는 치열한 영혼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레테의 강가에서 머리칼을 부여잡고 새벽을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젊은 영혼이 있다면 기형도를 읽으시라. 그의 시가 더 아프게 만들 것이다. 그 모든 아픔이 다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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