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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를 끝내던 날, 서재가 있는 남한강가에는 진눈깨비가 뿌렸다. 그 눈발 속을 걸었다. 처음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나가사키를 찾았던 것이 1990년 여름이었다. 긴 세월이었다고 허망해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포기했었고, 때로는 예정 없이 미뤄놓기까지 했던 시간들이었다. 건너야 할 강 하나를 이제 건넜다는 무심함으로 눈발 속에 서 있었다. 고맙습니다. 이제 끝냈습니다. 그 말뿐 가슴에 떠도는 것은 없었다. 해낼 수 있었음에, 다만 감사했다.” - 작가 후기 중에서
작가 한수산은 처음에는『까마귀』와 같은 소재로 중앙일보에 소설을 연재했다. 1993년부터 시작된 연재는 7000매 정도 씌어졌으나 1996년 작가의 사정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이 7000매의 원고를 일단 다 버려버리고, 인물과 구성 등을 다시 짜서 새로이 쓰기 시작했다.
패자가 품고 있는 희망과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
그는 1990년 여름에 취재차 나가사키를 찾아갔다. 그전부터 원폭 관련 자료를 보다가 한 번 현장을 가봐야 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작품의 완성까지는 거의 15년이 걸린 셈이 되었다. 처음에는 왜 70~80만 명이나 되는 많은 한국인이 일본에 살게 되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자의로 이민을 간 것도 아닌 사람이 대부분인데 말이다. 일본에 가보니 우리말을 전혀 모르고 아주 일본화되어 있는 재일동포 3세들인데도 모여 사는 걸 보면 어딘가 한국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단다. 재일동포 3세들에 대한 취재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작가는 3세들은, 3세들의 할아버지는 왜 일본에 남았나 하는 것을 들어보다가 피폭자에 대한 얘기까지 듣게 되었다. 원폭투하는 일본에서 벌어진 비극이었지만, 그 참상의 와중에 조선인들은 더한 것을 겪어야 했다.
원자폭탄은 지상 500미터 정도 높이에서 터진다고 한다. 지상 500미터에서 폭발하면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하나는 2만도 이상의 열. 돌이 녹아서 구멍이 뻐끔 생기고, 전철이 한 순간에 새까맣게 타버리고, 병이 녹아서 흐물흐물 늘어져 내린단다. 두 번째는 집이 다 날아가 버릴 정도의 폭풍이고, 세 번째는 방사능이다. 원폭이 근처에서 터져서 박살이 난 지역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사람들이 다치는데, 예를 들어 멀리서 뭔가 번쩍 해서 고개를 돌려본 사람은 원폭이 터진 방향의 뺨만 화상을 입어 다 타버리는 식이다. 등에 아이를 업고 있으면 아이의 뒤통수와 아이를 받치고 있던 팔이 탄다거나 하는 식.
“그러니까 신음을 하고 살려주세요,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가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도 ‘그들은 모국어로 신음했다’고 썼는데, 일본어를 좀 할 줄 안다 하더라도 팔 다리가 날아가고 하는 극심한 고통에 처한 사람들은 모국어로 아이고, 아이고 하고 비명을 지르지요. 또 어머니, 하고 신음하기도 하구요.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조대가 들것에 옮겨가다가 아이고, 하고 신음을 하면 이거 조선놈이구나, 하고 버려요. 일본사람만 옮겨가는 거예요. 방공호에서도 조선 사람들은 내쫓겼어요. 구조되었으면 다 살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이 내쫓기고 버려졌지요. 8월의 들끓는 태양 아래 죽어가는 몸 위로 까마귀 떼가 덮치는 거예요. 어딘가에 까마귀 떼가 막 날고 있으면 일본사람들이 보고 조선인 시체가 있구나 하는 거예요. 이렇게 일본 사람들은 죽음까지도 차별했어요.”
이런 내용을 그는 일본인의 증언을 통해서 알았다. 알고 났을 때 그는 써야 한다는 의무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1996년부터는 일체의 연재를 중단하고 마칠 때까지는 다른 장편소설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 작품에 ‘덤벼들게’ 되었다고.
그는 전체 5부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이번 작품을 쓰면서 ‘패자가 품고 있는 추상명사’에 주목했다. 일제 시대는 분명 어둡고 슬프고 억울한 시기였고, 우리 민족은 사실상의 패자였지만 패자에게도 사랑과 눈물, 희망, 약속 같은 추상명사들은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아주 중요한 것은 절망적인 이야기, 패배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걸 통해서 몰랐던 민족의식을 깨달아가고, 우리가 조국을 잃는다는 게 이토록 참혹한 것이었나 하는 것을 깨달아가고, 그럼으로써 조국을 되찾으리라는 약속과 희망을 얘기한다는 점이에요.”
그는 이 작품을 쓰고 고치는 데만 7년의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포기하고 몇 달을 내버려둔 적도 있었고, 맡고 있는 교수직 때문에 강의를 할 때는 또 기약 없이 버려두기도 하면서 세월을 훌쩍 건너온 것이다.
지나온 길, 앞으로 갈 길
그는 자신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3단계 정도의 변화를 거쳤다고 생각하고 있다. 1기는 개인적인 감성의 세계를 그렸던 시기로 데뷔작인 「4월의 끝」을 비롯하여 『회선』 『해빙기의 아침』 같은 작품들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단계는 한 서커스단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는 것을 그린『부초』이다. 어떤 의미에서『부초』는 제1기를 마감하는 작품이라 한다. 3대에 걸친 가족사를 그린 『유민』 역시 2기의 작품.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한국의 농촌사회가 변해온 모습을 그린 『유민』. 그는 전통사회의 와해를 그리면서 사회적 관심으로 폭을 넓혀갔다. 중편들을 묶어놓은『4백년의 약속』에는 남과 북을 모두 거부하고 제3국인 인도로 간 반공 포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인도까지 가서 50여 일 동안 직접 취재하면서 썼다고 한다.『4백년의 약속』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도공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이렇게 역사적인 이야기에 주목한 시기가 제2기이다.
3기는『까마귀』가 시작이다. 앞으로 이어질 작품들로는 감추어진 역사 속에 묻혀버린 한국인들의 역사를 들춰내 쓸 계획이라고. 정말 훌륭하고 고결하고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살았던 한국인, 자꾸 잊혀지고 묻혀져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낼 생각이라고 한다. 그가 준비한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다. 그중 하나가 식민지 시대에 대한 청산의 일환으로 피폭자 문제를 다룬『까마귀』였고, 두 번째는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올 때의 박해와 순교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세 번째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일하게 외세에 항복했던 인조 시절의 병자호란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비록 진 전쟁이지만,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감히 중국을 치겠다는 북벌 계획까지 세웠다는데, 그 장엄한 드라마를 만들 계획에 있다.
작가는 지나간 역사를 패배의 역사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다른 진실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패배의 역사로 보자면 두 번 다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을 역사적 사건이 많지만 그 안을 낱낱이 살펴보면 참 고결한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작가는 다음 작품들은 이런 부분에 더욱 주목할 계획이다. 그는 역사에서 이야기를 빌려올 때 그냥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쓰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문제의식을 가져다주기를 바라고 있다. “슬퍼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그려내자, 아름다워서 더욱 슬픈 영혼들을 그려내자”는 생각을 늘 가슴에 품고.
“패자에게도 추상명사는 있어요. 사랑, 우정, 의리, 국가에 대한 충성, 약자를 향한 희생… 이런 게 다 추상명사 아니에요? 이런 추상명사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거든요. 보통 명사만 가지고 옷 있으면 입고, 밥 있으면 먹고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추상명사를 얼마나 고귀하게 아느냐가 인간의 척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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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