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재미를 느꼈던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저는 사춘기를 극심하게 앓았는데요.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지 않고 혼자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초가을 소나기가 내렸는데요. 도망치듯 숨어든 곳이 도서관이었습니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오래된 책을 읽는 분들 사이에 끼어들었는데요. 그 날 제가 읽은 책이 소설가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였습니다. 오랜만에 언 손이 녹듯 마음이 녹아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부터 소설에 강하게 이끌리기 시작했어요.
책 읽는 시간은 작가님께 왜 소중한가요?
바쁘게 지내다보면 공허해질 때가 있어요. 점차 저의 테두리가 희미해져서 마치 유령이 된 것 같을 때가요. 두 발이 허공에 떠오른 것 같을 때. 쓸 말을 잃어버린 때에 서둘러 책상 앞으로 돌아옵니다. 언제든 책을 펼쳐들면 신기하게도 희미해져가던 저의 존재가 선명해지곤 해요. 책 속에 인물들이 저지르는 지극히 인간적인 실수들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진정한 ‘앎’은 미망에서 깨어나는 것이라 했는데요, 저 또한 미망에서 깨어나기 위해선 책을 펴야 합니다.
요즘 작가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관심사와 관계하여 읽을 계획인 책이 있나요?
‘나’란 테두리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방 안에서 장편에 몰입하는 동안 세상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거든요. 세상에는 살던 곳을 잃고 심지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도 있단 사실을 환기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단 하루를 살아남는 것 자체가 과제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무력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책상에는 사회학자나 경제학자들의 책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왜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 모두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해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우선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을 읽어볼 계획입니다.
최근작 『불온한 숨』 과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시면 좋겠단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소설 『불온한 숨』 을 쓰면서 제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절 사랑하는 법도 연습해야한단 걸 깨달았거든요. 우선은 미루지 않는 법을 배워보려고요. 보고 싶은 영화를 오늘 밤에 보고, 읽고 싶은 책을 적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손수 만들어보고 마음이 가는 것들에 대해 꼭꼭 씹어 음식을 먹듯 음미하는 시간을 늘리려 하고 있습니다. 『불온한 숨』 의 제인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채 춤을 추었기에 성공하고 나서도 불행했어요. 제 책을 읽은 분들이 제인의 실수를 통해서 지금 놓치고 있는 것들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한강 저
스스로 고립되어 살았던 그때. <내 여자의 열매>에 수록된 단편을 읽을 때마다 조금씩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특히 내 여자의 열매, 란 단편에는 황폐한 도시에서 한 여자가 식물이 되어가는 이미지가 묘사되어 있는데요.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되물을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서늘한 펜촉이 제 가슴에 문장을 써내려가는 것만 같았던 강렬했던 체험을 선사했던 소설이에요.
헤르만 헤세 저/전영애 역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해준 한마디의 말은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되었어요. 이 세상은 빛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어둠도 있다. 어둠이 있기에 빛도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교육받아왔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되어요. 이 세상 사람들은 결코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으로 양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조은 저
서울에 가려면 언제나 지나치는 곳이 사당동인데요, 버스 밖으로 펼쳐지는 사당동이 언젠간 재개발지구였단 사실을 알려준 책입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걸어 다니고 편리한 삶을 누리고 있는 도시가 힘없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난 뒤에 재건된 곳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 책입니다. 그리고 재개발 지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서 발로 뛰어다닌 저자들의 노력에 감화를 받았어요. 저 또한 이렇게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겨보고 싶어졌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저/조은평,강지은 공역
‘현대 사회가 유동하는 액체와 같아서 우리는 불안하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액체에 비유한 사회학자인데요. 그는 유동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에 우리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불안하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통찰력에 한참 매료되어있던 시기에 만나게 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란 책은 저에게 행운과 같았어요.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년 동안 이주에 한번 씩 독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엮은 책이거든요. 저는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때마다 그가 보낸 44통의 편지 가운데 한통을 마치 제비를 뽑듯 펼쳐 읽어보곤 해요.
마크 롤랜즈 저/강수희 역
느닷없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저를 덮쳐왔을 때 친구처럼 곁에 두고 의지했던 책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크 롤랜즈는 시종일관 따뜻하고 유머어린 문체로 우리가 ‘순간’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해줍니다. 그와 11년간 함께 살았던 늑대 브레닌은 친한 늑대의 죽음 앞에서도 슬퍼하지 않았는데요. 마크 롤렌즈는 그 이유를 늑대 브레닌이 우리 인간과 달리 순환하는 자연의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더라고요. 단선적인 시간을 살아가지 않기에 진보에 대한 집착과 집념이 없다는 것이죠. 순간의 미학을 이토록 설득력 있고 위트 있게 전할 수 있는 그의 따듯한 시선이 좋았습니다.
박영 “책을 펼쳐들면 내 존재가 선명해진다” 소설가 박영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