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주로 침대에서 읽습니다. 독서란 왠지 매우 개인적이며 업무와 관련이 없어야 할듯해서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보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난해하고 지루한 책은 좋은 자장가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자장가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벌떡 깨게 만드는 책을 만나게 되면 필시 졸음으로 그 다음 하루를 망치게 되지만 다른 세상, 다른 인생을 만난 뿌듯함은 숙면과 바꿀 만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운명과 유한함에 맞서는가? 그 해결책은 과학, 예술, 또는 혁명으로 이름을 달리하며 나오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항상 경이롭습니다. 모더니즘은 이에 대한 전반적인 인류의 응답이었으며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힘을 갖고 밀린 숙제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에 관한 독서는 항상 흥미롭죠. 책 한권을 읽는 것은 기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험과 같습니다. 도시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오가는 여정이 더 기억이 남을 때가 있죠. 지나는 풍경에 생각이 마를 때까지 넋을 놓고 있거나, 책을 읽거나, 낯선 동행에게 수작을 걸거나… 책으로 얻는 지식이 목표이기도 하지만 과정 또한 놓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독서가 기차를 타고 다른 세상과 만나는 것과 같다면 서재는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기차역마냥 반갑고 유혹적입니다. 서재라 부르기엔 민망하게 책꽂이 몇 개뿐인 간이역이어서 더 정겨울지도 모릅니다.
최근 펴낸 『못된 건축』은 인간문명의 궁극적 실체를 도시로 보고, 이를 물리적으로 구성하는 건축이 갖춰야 할 조건에 관한 해설서입니다. 요즘 어떤 식으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고민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자신이 사는 공간과 건축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어디 나가서 건축과 교수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은 늘 어떤 건축이 좋은 건축인지 물어봅니다. 평소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전문가들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거죠. 이런 경험을 토대로 건축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한 가지 시선을 안내하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 건축은 예술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겐 생활공간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도시에서 살아가고 건축물 대부분도 도시에 있습니다. 그러니 건축은 당연히 도시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게 요지입니다. 예를 들어 DDP가 좋은 건축인지 생뚱맞은 나쁜 건축인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각자의 미적 취향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이 건축이 서울이란 도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도시를 풍요롭게 하는지 이야기해보자는 것입니다.
장 코르미에 저/김미선 역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는 시 구절처럼 체 게바라는 한 사람의 일생뿐만 아니라 한 대륙과 역사를 유럽을 넘어 우리나라에까지 와서 영원히 살아 있다. 젊은이들의 티셔츠에 박혀 있는 그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쿨한 인생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이념을 떠나 혁명의 의미와 가치가 소설보다 더 흥미롭게 펼쳐지는 것은 원문의 수려함과 번역의 매끄러움 덕택이다.
진휘연
모더니즘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먼저 접하게 된 세대에게 모더니즘은 뿔난 괴물 같은 존재였다. 현학적이고 사변적이며 무모해보이기도 했다. 20세기의 회화운동은 모더니즘의 이상이 성공적으로 체화된 매우 드문 경우이다. 끝없는 실험으로 이어지는 무협지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이 이야기는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꿈틀되는 현실이다.
신형철 저
한국영화의 성공의 비결은 비평에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비평이 과학적이며 예리할 때 성과를 만들어낸다. 목침 두께의 이 책을 읽노라면 현대 한국 문학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대상이 분명한 비평의 글들이지만 문장이 살아 있어 또 하나의 문학을 만든다는 점이다.
김희경 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걷는다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는 이미 수없이 들었지만 모두 남의 이야기로 남았었다. 허나 이 책은 별다른 수고 없이 순례의 고행에서 느껴지는 경험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수작이다.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려 본적은 있지만 책을 읽으며 우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엉엉 소리까지 내며 펑펑 울게 된다. 메마르고 퍽퍽한 세상살이에 울고 싶어질 때 꺼내서 읽게 되면 수도꼭지는 여지없이 터진다.
임정섭 저
나의 작문 훈련은 초등학교 때 끝났다. 이후로는 논문이나 시답잖은 연애편지가 내가 쓴 글의 전부였으므로 글로서 소통하는 방식에 매우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결국 성인이 되어서 글쓰기가 절실해지면 독학으로 다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에 좋은 지침이 되는 책이다. 그리고 그 지침의 시작은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무능과 무지에 대한 인정으로부터이다.
위화 저/문현선 역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위화의 신작. 주인공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 그 이후 이승은 떠났지만 저승으로 넘어가지 못한 주인공이 겪는 7일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환상과 실제를 넘나들며 인생의 여러 기로와 희로애락을 서사로 품어낸 위화의 이번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처럼 나의 지난 삶을 재구성해보게 된다.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중간 중간 마주쳤던 인연들을 떠올려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이 책은 잠시 꿈을 놓쳤거나 인생이 무미건조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테리 길리엄
시간여행과 공간을 다룬 영화는 항상 매력적이다. 이 영화는 둘을 모두 만족시킨다. 전작 <브라질>에서 보여주었던 감독의 조형감각은 뒤죽박죽된 시간과 함께 촘촘하게 건축되고 운명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시간표에 따라 점점 완성되어간다. 건축가가 참여해 만든 미래 공간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제로(핑크) 슬립케이스 한정판) : 블루레이
감독:웨스 앤더슨 출연:랄프 파인즈, 토니 레볼로리
이 영화를 읽는 방법은 관객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나는 감각적인 화면의 미장센에서 인류사를 관통하는 우아함과 이를 파괴하는 폭력에 대한 아름답고 세밀한 관찰로 읽었다. 원근법보다는 투상법에 의거한 건축도면 같은 화면구성이 특유의 색감과 어우러지면서 매우 인상주의적인 화면을 선사한다.
지구 온난화로 지구는 그야말로 물바다가 된다. 거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집단생활을 하거나 양서류로 변이한다. 풀 한 포기 없는 망망대해가 배경이므로 영화는 마지막 10분을 제외하고는 물과 인공의 환경뿐이다. 여기에서 건축은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지어진다. 폐기물을 끌어 모아 건물을 지었으니 딱히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상상력이 그 간극을 메우며 오히려 더 큰 영감을 불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