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전시] 이토록 다채로운 회화의 세계
현대 회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전시가 서울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며, 관객들에게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과 깊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전시들이다.
글 : 안동선 (미술 전문기자)
202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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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의 캔버스 


《좋은 밤(Good Night)》 전시 전경, 가고시안 서울, 2025. 이미지 제공: 작가, 가고시안. 촬영: 전병철


벨기에 출신으로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헤롤드 앤카트의 한국 첫 개인전 《좋은 밤(Good Night)》이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프로젝트 공간 ‘캐비닛’에서 개최 중이다. 이번 전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갤러리로 손꼽히는 가고시안이 서울에서 선보이는 두 번째 기획이다. 앤카트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 구도와 대담한 색채를 결합한 풍경화로 주목받아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제목이 암시하듯 밤의 풍경을 주제로 한 신작 회화 5점을 선보인다. 전시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작가는 “화가에게 색은 자녀와 같아서 모두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유독 파란색을 짝사랑해왔다”며 “실제 밤의 풍경을 그렸다기보다는,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고 밝혔다. 전시 공간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원래 한강대로를 조망하던 통창 대신 캔버스 질감의 베이지 커튼으로 둘러쌌다. 이지영 가고시안 서울 디렉터는 “이를 통해 관객이 더욱 친밀하고 몰입도 높은 환경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5월 16일까지. 

 

회화의 본질을 향한 여정 


《손과 얼룩 HANDS AND STAINS》 전시 전경, 갤러리 조선, 2025. 이미지 제공: 작가, 갤러리 조선. 촬영: 양이언


갤러리 조선에서 열리고 있는 안상훈 작가의 개인전 《손과 얼룩 HANDS AND STAINS》은 관객을 80여 점의 대형 캔버스로 감싸며 작가의 열정적인 작업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안상훈의 작품은 자유로운 색채와 질감, 선을 통해 추상적 흔적과 내면의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회화를 단순한 재현 수단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과 실험의 장으로 인식하며, 끊임없이 회화의 본질을 탐구한다. 이번 전시는 50세를 맞이한 작가가 불확실성 속에서도 지속적인 회화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자리다. 4월 27일까지. 


회화라는 피부를 상상한다 


《두 번째 피부》 전시 전경, 원앤제이 갤러리, 2025. 이미지 제공 : 작가, 원앤제이 갤러리. 촬영: 아티팩츠. 


원앤제이 갤러리에서는 노충현, 서동욱, 이동기, 정수진, 홍수연 다섯 명의 중견 회화 작가가 참여하는 단체전 《두 번째 피부》가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인 ‘두 번째 피부’는 회화가 단순한 표현 방식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확장된 신체로 기능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노충현은 도시 풍경 속에서 기억과 흔적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서동욱은 다양한 인물들의 초상을 통해 고독과 멜랑콜리의 뉘앙스를 표현한다. 기호와 언어의 변형을 회화로 실험해온 정수진과 한국적 팝아트의 아이콘 ‘아토마우스’를 창조한 이동기의 작품을 오래만에 감상할 수 있는 점도 반갑다. 또한, 지난 30년간 추상 회화에 헌신해 온 홍수연의 신작도 함께 선보인다. 4월 30일까지. 


회화로 감싸는 자연의 기억 


강명희 작가

서울시립미술관은 2025년 첫 전시로 강명희 작가의 개인전 《강명희-방문 Visit》를 개최한다. 2023년 남서울미술관에서 김윤신 작가의 개인전을 통해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간과된 여성 원로 작가를 발굴했듯이, 이번 전시 또한 강명희 작가의 예술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난 강명희 작가는 1970년대 초 한국을 떠나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해 왔고, 1980년대에는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60년대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총 125점의 회화를 선보이며, 작가의 작품명에서 차용한 제목처럼 한 곳에 완전히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며 작업해 온 그녀의 유목적 삶의 방식과 일시적 만남에서 비롯된 예술적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미 파타고니아, 남극, 인도 등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로 홀연히 떠나 생생한 풍광을 화면에 담은 강명희 작가의 작품은, 한편으로는 잔잔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자연과의 치열한 대화의 결과물로, 오랜 시간에 걸친 이루어진 무수한 붓질로 완성되었다. 전시의 마지막 파트는 2007년부터 제주도에 거주하며 제작한 최근의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6월 8일까지. 

 

회화를 통한 초월의 가능성 


《의식과 즉흥: 헤르만 니치의 후기작》 전시 전경, 페레스프로젝트, 2025.


페레스프로젝트에서는 지난 50년간 현대미술의 지형을 변화시킨 헤르만 니치(1938-2022)의 개인전 《의식과 즉흥: 헤르만 니치의 후기작》이 열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헤르만 니치는 1960년대에 등장한 급진적인 예술 운동 빈 행동주의(Viennese Actionism)를 이끈 주요 인물이다. 그는 회화, 드로잉, 판화 뿐 아니라 퍼포먼스, 작곡, 무대 디자인에 걸친 과감한 행위예술과 그 행위의 궤적을 담은 액션 페인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물감을 캔버스에 붓고 번지게 하며 흩뿌리는 역동적인 움직임과 즉흥성을 보여주는 니치의 후기 회화를 선보인다. 그가 신체의 연장으로서 회화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며, 풍부한 색채 사용을 통해 불러일으키는 고양감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다. 5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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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 (미술 전문기자)

15년간 패션 매거진 <하퍼스 바자> 등에서 일했다. 현재는 미술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미술 에세이 『내 곁에 미술』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