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여성이 아플 때, 과학은 뭐라고 말할까?
내 몸이 건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 건강과 질병에 가장 큰 목소리를 내야 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보세요. 우리의 몸에 대한 어떤 편견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거예요.
여자의 몸으로 산다는 건 까다로운 일입니다. 여자가 아닌 몸으로 살아본 적은 없지만 4n년을 여자로 살았고 한의사로 숱한 주위 여자들을 관찰하고 또 치료해 본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도 거의 확신에 가까운 명제입니다. 여자의 몸을 움직이는 기전이 복잡하다는 건 이미 옛날옛적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의학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동의보감』에도 ‘남자 열 명을 치료하는 것보다 여자 한 명을 치료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문장이 있거든요.
그런데 『동의보감』의 저 문장 뒤에는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부연설명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부인의 병이 남자보다 배나 더 많은데 … 생각이 지나칠 뿐만 아니라 고집이 많아 제 마음을 자신이 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병의 근원이 깊은 것이다.” 서양의학에서도 여자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질병과 통증에 대해 심리적인 불안이나 건강염려증이 원인이라 판단했던 역사가 있지요. 신체 증상에 대한 여성의 호소에 대해 그리스어로 ‘자궁’을 뜻하는 ‘히스테라(hystera)’로부터 ‘히스테리(hysteria)’라는 단어를 가져와 붙인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동서양의 관점이 엉뚱한 지점에서 대통합을 이루었던 셈이지요.
과학이 발달하기 전의 기록에 허무맹랑하고도 차별적인 시선이 남아있는 것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진짜 놀라운 것은 다른 모든 황당한 스토리들이 과학으로 후두려 맞은 뒤 차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동안에도 이 케케묵은 시선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는 겁니다. 여성의 병을 진단할 때 더 깊이 원인을 파악하려 노력하기보다는 호르몬의 작용, 혹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쉽게 결론 내리는 관행은 여전하고 상대적으로 여자에게 더 흔한 질환은 같은 이유로 아예 연구조차 시도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가장 소름 돋는 지점은 이것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편견의 문제라는 인식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지요.
마야 뒤센베리 저 | 한문화
저널리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마야 뒤센베리가 쓴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는 이러한 관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입니다. 남성 중심의 의학계가 여성의 몸에 대해 어떤 편견을 심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이고도 풍부한 사례와 연구 결과들이 (참고문헌을 제외하고도) 4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촘촘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자궁내막증처럼 최근에야 정체가 인정된 여성질환부터 딱히 여자만 앓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가 주로 앓는 자가면역질환이나 섬유근육통같은 증상에 대한 무지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지요. <뉴욕 타임즈>에서 추천사로 ‘놀랍도록 위협적’이라고 평가했을 만큼 제목과 주제는 자극적이지만, 에필로그에 저자가 붙인 다음의 제목은 간절한 호소에 가깝습니다. “여성이 아프다고 말하면 믿어주길!”
사라 메케이 저 | 갈매나무
여성 건강을 호르몬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는 책은 한 카테고리를 이룰 정도로 많고 저도 여러 책을 참고할 때가 있습니다. 다만 호르몬으로 모든 증상을 다 설명하려 하거나 호르몬 치료에 대한 맹신이 와 닿지 않을 때, 블로그 수준의 흔한 얘기들이 지겨울 때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신경과학자 사라 매케이가 쓴 『여자, 뇌, 호르몬』을 추천합니다. 의사가 아닌 뇌과학자가 바라보는 호르몬과 여성 건강의 상관관계를 생애주기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호소하거나 딱히 여자를 편드는 느낌이 아닌데도 사춘기나 산후 우울증, 엄마의 갱년기 등 여자 고유의 이벤트를 겪으며 힘들었던 기억을 과학 혹은 팩트로 위로 받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저자가 과학자라 그런지 전문 용어가 어려운 부분이 좀 있는데 적당히 스킵하면서 읽어도 상관없어요.
임소연 저 | 민음사
민음사 탐구 시리즈의 ‘여성과 과학 탐구’ 편으로 출간된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과학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아이러니를 페미니즘의 눈으로 보여줍니다. 서문 맨 첫 머리에 난자와 정자의 수정 과정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흔히 알고 있는 ‘경쟁적인 정자와 조신한 난자’ 스토리가 1970년대부터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퇴출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입니다. 과학이자 팩트라 여겼던 스토리에도 편견이 깃들 수 있다는 것, 과학이 성차별적인 시선 아래 여성의 적이었으나 이제는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 과정에 몰입해 새로운 관점을 개발하는 여성 연구자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이 작고 빨간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갈 동력을 얻게 됩니다.
최혜미 저 | 푸른숲
어떤 일을 하든 ‘여자의 삶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 직업인으로서 제 지향점인데, 한의사가 되고 보니 한의학이 여성의 건강을 지키는 데 생각보다 활용도가 높아 10년째 신나게 파고 있습니다. 한의사가 되어 가장 크게 덕 본 사람이 제 자신이라 생각할 정도로 평소 제 반려질환들을 관리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기도 하고요. 단 한 명이라도 덜 괴롭게, 더 나은 삶의 질로 데리고 가기 위해 어렵고 고리타분한 한의학적 개념을 요즘의 쉬운 말로 바꾸어 설명하기 위해 늘 고민하는데 그 과정에서 쓴 책이 『서른다섯, 내 몸부터 챙깁시다』입니다. 우선 내 몸이 건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건강과 질병에 대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내야 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몸에 대한 어떤 편견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필자 | 최혜미
한의사. 달과궁한의원 대표 원장.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졸업 후 〈더블유코리아〉 창간 멤버로 입사해 패션 에디터로 일했다. 자신을 비롯한 주변 여성들이 겪는 몸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 에디터 4년 차에 한의학도의 꿈을 안고 퇴사, 같은 해에 한의과 대학에 진학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진료하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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