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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안전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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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작가이자 연구자 이융희가 소개하는 매달 한 편의 웹소설. 직장 생활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거예요.

『김대리가 이렇게 일을 잘했다고?』

왕십리글쟁이 저 | 스토리위즈

판타지 소설에 대한 강연을 다니다 보면 많은 예비 창작자들이 마음속에 저마다의 환상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성과의 끝내주는 데이트에 대해서 쓰겠다는 분이 계시고, 어떤 분은 수백억 자산가가 되는 꿈을 꾸시는 분도 계시지요. 또 어떤 분은 신기한 생물과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는 분도 계십니다. 용과 함께 하늘을 날아다니고, 여행을 떠나시는 분들이지요.

그리고 저는 이런 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드립니다.

“선생님. 이것은 분명 아름다운 상상입니다만, 웹소설의 판타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수강생분들은 제 이야기에 당황해하십니다. 판타지에 종류가 있나요? 아니, 웹소설의 판타지와 일반 판타지는 뭐가 다르기에, 자신들이 꿈꿔온 환상을 판타지라고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럼 저는 몇 가지 예시를 들어드리지요.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그런 분들에게 가장 많이 예시로 드는 작품입니다. 바로 왕십리글쟁이 작가님의 『김대리가 이렇게 일을 잘했다고?』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토요일.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주인공 김정훈은 몇 년 만의 화이트크리스마스지만 특근에 야근까지 하며 회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이제 막 대리를 달게 된 말단 사원인걸요. 이런 김정훈 대리를 위로해 주는 건 탕비실에 구비된 라면 한 그릇밖에 없습니다.

참치나 파, 고기 같은 부재료는 언감생심, 물과 라면, 그리고 스프만 넣고 보글보글 끓인 라면이 다 완성된 찰나 갑자기 장한얼 부장이 휴게실로 들어옵니다. ‘오우 라면 끓였네, 맛있겠어’라는 질문에 김대리는 이야기하지요. ‘부장님 좀 드시겠습니까?’

부장님은 한 차례 겸양의 말을 건네지만, 그렇다고 물러나진 않습니다. 아직 안 쓴 젓가락까지 곱게 바치니 옳다구나, 김부장이 모든 것을 가져가지요.

그렇게 이 소설의 프롤로그는 김대리의 안타까운 회사 생활로 끝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김부장이 ‘그나저나 라면에 뭐 넣었나? 라면 맛이 아주 훌륭한데 팔아도 되겠어?’라고 칭찬을 건넸거든요.

김대리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고작 라면 하나가 맛있다는 인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었으니까요. 아니, 심지어 장부장에게는 처음 듣는 칭찬이었습니다. 장부장이 빈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젓가락을 멈추지 않고 라면을 먹어 치웠거든요.

그런데 이게 어쩐 일입니까? 그때부터 김대리의 모든 일이 다 술술 풀어지기 시작합니다. 『김대리가 이렇게 일을 잘했다고?』의 소제목들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혼밥도 잘하고, 출판제의 쪽지도 잘 보내고. 커피도 잘 내리고, 결혼 축하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고, 옷도 잘 입고 금연도 잘하고 낚시도 잘하며 생일을 잊지 않고 글씨도 잘 쓰고 예비군 훈련도 잘하죠.

김대리가 잘하는 일엔 그 어떤 특별한 환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회사 근무를 하다 보면 저렇게 만능 같은 인물들을 한 번씩은 마주하게 되거든요. 웹소설에서는 이러한 작품들까지 ’판타지‘라는 장르 속에서 품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렇게 김대리가 일을 잘하게 되는 계기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가호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아예 마법적인 환상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소설들조차 있거든요.

핵심은 마법적이고, 이 세계의 법칙과 질서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웹소설의 판타지라는 것은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그때부터 주인공이 원하고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는 희망이거든요.

세상은 무척 복잡다각하고, 개연성도 다양한 원인들이 교차하며 만들어집니다. 김대리가 할아버지의 가호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냉엄할 수 있어요. 고작 자잘한 일들을 좀 잘하는 것과, 그래도 업무를 잘하는 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해 볼 때 직무직능 평가에서 별다른 가점을 받지 못할 가능성도 많죠.

하지만 그 사소한 일들을 잘 하면, 나는 성공하고 안전하며 안락한 삶을 즐길 수 있다는 희망. 어떻게 보면 소시민적이고 중산층적인 욕망이지만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우리의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희망. 그것이 웹소설에서 ’판타지‘라고 하는 장르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이자 주제, 그리고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여러분들이 각자 저마다의 공간에서 다양한 일들을 진행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업무에 맞는 루틴과 징크스가 있으시겠지요. 저는 업무를 하기 전, 가벼운 게임 두어 판에서 좋은 결과를 내면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답니다.

웹소설의 환상은 이런 징크스 같은 것이지요. 모든 것이 잘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만들어주고 일상을 버티고 나아가게끔 만들어주는 작은 위로. 오늘은 여러분들의 직장생활을 위로해 주는 따뜻한 웹소설 한 편 읽으면서 시작하시는 것 어떠신가요.



*필자 | 이융희

장르 비평가, 문화 연구자, 작가. 한양대학교 국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2006년 『마왕성 앞 무기점』으로 데뷔한 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장르문학을 창작하고 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웹소설 창작학과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장르 비평 동인 텍스트릿의 창단 멤버이자 팀장으로 다양한 창작, 연구, 교육 활동에 참여했다.현재 콘텐츠 제작 기업 지티이엔티 콘텐츠제작본부 소설 파트에서 웹소설 기획, 제작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웹소설 보는 법』  『웹소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판타지 #게임 #역사』 『비주류선언』(공저) 『악인의 서사』(공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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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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