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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승 칼럼] 당신을 닮은 그 유령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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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을 기념하는 북토크나 전시, 공연에서 돌아온 날 밤이면 나는 어째서인지 매번 같은 책을 펼치고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고대 작은 국가의 법령집에는 이런 법이 명시되어 있었다. 추수가 끝난 후에는 가난하고, 불행하고, 몸이 아픈 자들을 밭에 들어갈 수 있게 하라. 따라서 지친 땅 그림자에 가려진 작은 열매들이 그들에게 돌아갔다. 어쩌다 남게 된 것일 때도 있었고, 누군가 일부러 남겨둔 것일 때도 있었다. 가난과 불행, 아픔의 요건을 충족하는 이들의 허리는 이미 한참 굽어 있었지만, 멀리서 보면 땅에 떨어진 열매들이 그들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기다리는 동물 같기도 했다. 그들의 굽은 허리가 조금 더 아래로 기울었다. 아예 주저앉아 올리브를 한 알씩 주워 담는 이도 있었다. 금이 간 석류는 괜찮아도 터진 포도알들은 디오니소스도 마다하리라 중얼거리면서.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오기 전까지 굽은 허리들이 몇 차례 오고가다보면 그런 말들이 노래가 되기도 했다. 그들이 한참을 머물다 떠난 땅에도 남은 것들이 있었다. 뭐가 됐든 동물의 차지였다. 그런 후에도 남겨진 것들은 땅과 유령의 것이 되었다. 겨울이었다. 


“배를 잃은 포구의 자리”, 유령 배, 조난자를 찾는 음성이 울리고… (사진: 유은) 

지난 여름에는 유독 첫 책, 첫 전시, 첫 결혼이 많았다. 사랑하는 작가의 생일보다는 주로 기일을 기억하는 편이지만(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예외다. 그의 기일 다음 날이 그의 생일이란 걸 잊기란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어떤 ‘첫’은 가능한 몸과 마음을 움직여 축하한다. 여름 내 나를 움직이게 했던 자리들은 내가 그 ‘첫’에 닿기까지의 기억 중 결정적이진 않더라도 작은 조각이나마 공유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조각이 초대장이었다. ‘첫’을 기념하는 북토크나 전시, 공연에서 돌아온 날 밤이면 나는 어째서인지 매번 같은 책을 펼치고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였다. 이걸 해내려고, 이 유령들을 불러오려고 앞서 그 쓰기의 시간을 견뎌온 건가, 뭉클해지는 작품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초기작부터 차례차례 전집을 읽어온 끝에 다다른 “하나의 구절, 불완전한 구절” 1 이었다. 상의는 외출복을 하의는 잠옷을 소신껏 입고 앉아 몸의 상하를 다른 세계에 보내놓은 사람처럼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날의 ‘첫’에서 본 유령이 파도에 휩쓸리게 두었다. 하나 같이 오래 참은 표정으로, 그렇지만 이 순간 조금 흥분된다는 듯이 그들 곁에 있던 유령들. 유령에게 표정을 뺏긴 채 나와 마주선 ‘첫’의 주인공들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오로지 자신에게만 반응하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들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령이네요.

웃긴 사람 눈에만 보일 텐데요.

이름이 뭐예요? 

있었는데 부르지 않아서 지금은 없어요, 이름.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하얗고 빈 허공을 바느질한 작품으로 첫 전시를 채운 작가는 꼭 알려주고 싶다는 듯 말했다. ‘시차’입니다. 유령의 이름. 그가 스스로 진짜라고 느끼는 아주 드문 순간에만 사라진다는 그 유령의 이름이 시차를 두고 마음에 들었다. 바느질한 허공의 덩어리들 안에는 여러 세계에서 채집해 불어넣은 소리들이 혈관 속 피처럼 돌고 있었다. 어떤 형태의 기록이든 결국 시차를 견디는 일 같아요. 나는 유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물었다. 언제 과거 시제를 처음 썼는지 기억나요? 질문의 답을 자기 첫 책에 긴 편지를 써서 내게 준 사람 앞에서 떠올렸다. 그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유령을 그는 ‘콜론(:)’이라고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내 첫 번째 과거 시제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을 보자마자 떠올랐어요. 엄마 몸에서 빠져나와 처음 토해낸 숨에 답이 있었다. “아, 살았다! 미래를 발굴하기 위한 최초의 과거 시제. ‘콜론’이 웃었다. 아래 위 두 점의 사이가 벌어졌다가 가까워졌다. 두 점이 멀어지기를 기다려 내가 아는 콜론 이야기를 전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즐겨 썼던 콜론을 두고 엘렌 식수가 “마침표를 취소하는 마침표”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중단을 취소하는 또 다른 중단…

파도처럼요?

네. 쓰기처럼요.


하루만에 다른 계절이다. 다른 몸이 도착한다. 잠깐 멈춤. 정지된 순간이 리듬을 만든다. 진짜 거짓말을 기다린다. 어떤 행위 이후에 주어지는 힘이 있는데, 내게는 기다림 이후에 오는 힘이 제일 강력하다. 거절 이후에 오는 힘은 새삼 야비하고, 줍기 이후의 힘은 쓰기를 부추긴다. 아녜스 바르다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줍는 일을 지적 활동에 비유하기도 했다. 세계의 정기적인 생산 리듬이 멈춘 다음에 남은 것들, 어딘가 조금 상하고 깨지고 빈 이미지와 언어를 줍는 일. 줍고 나면 쓰게 될 것이다. 물이 새는 천장 아래 커다란 그릇을 놓는 것처럼 위아래를 뒤집으면 줍기는 받기이기도 하다. 줍는 게 나면 받는 건 유령이다. 그 반대일 때도 있다. 문득, 작가와 쓰레기 수거인을 함께 떠올린다. 많이 다른가? 제임스 조이스와 테레사 학경 차가 ‘letter(편지, 문자)’를 ‘litter(쓰레기)’라고 의도적으로 철자를 바꿔 유희한 걸 보면 글쎄. 내 옆의 유령이 질문을 바꿀 준비를 한다. 그의 이름은 ‘유보’다. 누군가는 영원히 판단을 유보하기 위해 쓴다. 시차를 견디고, 투명 콜론을 움직이면서. 여름에 중요한 ‘첫’을 잃게 된 그들도 내 옆의 유령을 보았을까? 겨울도 그리 멀지 않았다. 

   

1 버지니아 울프 저, 박희진 역, 『파도』, 솔 출판사, 2019,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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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승

읽고 쓰고 연결한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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