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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호정의 옛 담 너머] 돼지풀 요정

현호정 칼럼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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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엉터리 농부지만, 내가 여기 되찾지 못할 흰콩을 묻어 저 아래 누군가에게 별로 반짝이게 할 수 있는 건 언젠가 “더듬거리며 길을 찾아야만”했던 “텅 빈 공간”을 오래도록 주물러 진창으로 만들어 둔 덕임을 안다. (2024.08.06)

pexels.옛날 옛적에 아일랜드 서부 바다 기슭 마을에서 한 소녀가 사라졌다. 어느 밤의 예배 도중 일어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요정의 소행이라 생각했고, 경찰은 집집마다 탐문 수사를 벌이며 소녀가 사라진 들판에 난 돼지풀을 모두 불살라 버리라 권했다. 돼지풀은 요정들에게 바쳐지는 풀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바닷가 들판에서 밤새도록 신비가 피어올랐다. 이웃들은 횃불을 휘두르며 걸었고 경찰은 반복해서 주문을 외웠고 아침이 되자 소녀가 발견되었다. 어린 여자아이는 홀로 들판을 헤매고 있었다.

윌리엄 예이츠의 『켈트의 여명』1 에 실린 이 짧은 이야기는 「믿음과 불신」이라는 제목을 앞세워 등장한다. 글쎄, 내가 예이츠의 담당 편집자였다면 제목을 당장에 「돼지풀 요정」 같은 것으로 바꾸자고 제안했을 텐데. 하지만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저 엄숙한 제목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이는 예이츠가 자기 제목을 자기 글로 책임졌기 때문이다.

『켈트의 여명』은 예이츠가 직접 체험하거나 채록한 신비한 이야기를 모은 책인데 단순히 나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야기마다 자신의 숨과 생각을 불어넣어 생동감 있게 엮었다. 「믿음과 불신」의 감동도 돼지풀 요정 이야기 자체보다는 예이츠가 뒤에 덧붙인 문장들에서 온다. 예이츠는 처음에는 “어쩌면 경찰이 옳았는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마음을 꺼내 놓는다. 그 조심스러움은 그의 확신에서 기인하는데, “진실과 불합리를 똑같이 거부하기보다는 엄청나게 불합리한 사실과 약간의 진실이나마 믿는 것이” 위안이 된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설득은 아름다움을 획득하고 구체적인 풍경으로 공간화되어 우리는 어느새 실종된 소녀로 거기 외롭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생채기 난 맨발로 돼지풀 들판을 헤매는 동안 바람이 예이츠의 말을 나레이션처럼 실어온다. “우리가 진실도 불합리도 모두 거부한다면 우리에게는 발길을 안내하는 골풀 양초 하나, 우리 앞의 늪지 위에서 춤추는 희미한 반딧불 하나조차도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 텅 빈 공간 속에서 필히 더듬거리며 길을 찾아야만”하지 않겠습니까?

문학평론가 인아영은 평론집 『진창과 별』 서문에서 책 제목의 바탕이 된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 “우리는 모두 진창에 있어요. 하지만 그중 누군가는 별을 보고 있죠”2 를 소개하며, 이제는 “별이 총총한 하늘이 인간에게 가야만 하는 길을 밝혀주는 시대(루카치)가 지난 시대도 오래되었”고 “세계는 완전하지 않고 인간의 지향은 쪼개져 있다는” 점을 짚는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대기오염과 인공조명으로 밤하늘에 더 이상 별이 없어진 탓이라는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됐는데 이는 그가 뒤이어 제시한 “현실이 시궁창이라는 인식이야 얻기 어려울 것 없다. 하지만 별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3 하는 물음과 줄곧 꼬리를 물었다. 답을 내려는 생각도 없이 “다만 문학은 진창과 별의 관계를 사유하게 한다”4 는 문장 주변을 빙빙 돌다 하루는 작가로서의 짧은 답글을 지어 두기도 했는데 올해 2월 5일 일기에 아래와 같이 남아 있다.

“힘든 때일수록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빛이 있다면 말갛게 하고 소리가 있다면 둥글리고 암석이 나오면 차지게 빚고 기꺼이 주물럭거려 벼는 몰라도 콩 자랄 터는 만들어 두고서 막상 콩 심고 기다리기 하냥 갑갑해 이그저그 잡히는 대로 주워서 배 채우고 와앙 울다 잠들었다 오밤중 지나 깨어나면 밤하늘에 듬성듬성 박힌 별들 보이고 ‘아 그래 저게 다 내 콩이다’ 해도 먹는 시늉마저 귀찮아 혀만 한번 내밀었다가 엎드려 누워 흙에 콧물 부벼 닦으며 여기도 어딘가의 하늘이라 이 지난한 농사 나약해 빠진 일꾼이 끝내 한 톨도 도로 거두지 못할 이 콩들 누군가의 별이라도 되었으면 그랬으면 그런 기도를 중얼거리다 다시 잠들지는 못하고…”

나는 엉터리 농부지만, 내가 여기 되찾지 못할 흰콩을 묻어 저 아래 누군가에게 별로 반짝이게 할 수 있는 건 언젠가 “더듬거리며 길을 찾아야만”했던 “텅 빈 공간”을 오래도록 주물러 진창으로 만들어 둔 덕임을 안다. 새로운 인간들의 “쪼개진 지향”이 향할 새로운 별들은 새로운 밤하늘에 뜰 수밖에 없고, 그 밤하늘은 어쩌면 진창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일랜드 소녀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을 수 있다. 집을 나갔든, 납치를 당했든,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길을 잃었든 그 애가 영영 사라질 뻔한 그 밤,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낸 배경은 사실 까맣게 타버린 들판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밤하늘이었는지 모른다. 캄캄한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몇 개의 붉은 빛, 별인지 반딧불인지 골풀 양초인지 모를 그것을 향해 소녀는 공포의 진창에서 한 발씩 걸어 나왔을지도. 빛이 점점 커다래지며 마침내 횃불과 그 아래 선 이웃들의 얼굴이 분간될 때까지 말이다.

끝나가는 이야기를 깨 가는 꿈 삼아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마지막 순간 독자를 향해 예이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난로와 영혼 속에 작은 불을 피우고 (…)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우리의 불합리가 다른 사람의 진실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난로와 영혼에서 불을 쬐어 따뜻해졌고, 그리하여 그 속에서 진리의 야생벌들이 벌통을 만들어 달콤한 꿀을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세상으로 가자, 야생벌들, 야생벌들아!”

 <윙->


1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음, 서혜숙 옮김, 『켈트의 여명』, 펭귄클래식, 2008.

2 “We are all in the gutter, but some of us are looking at the stars.” Oscar Wilde, Lady Windermere’s Fan, Bloomsbury, 2014, 인아영, 『진창과 별』, 문학동네, 2023년 12월, 5쪽에서 재인용.

3 같은 책 5쪽.

4 같은 책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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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현호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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