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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오 칼럼] 느낌을 생각으로 막을 수 없다

김선오의 시와 농담 마지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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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세계라는 이미지와 다르지 않으며 그 사실은 시의 화자에게 언제나 문제적이다. (2024.07.25)

장마철이다. 장마는 여름의 기상현상이지만 한국어는 장마 곁에 계절을 뜻하는 접미어 ‘철’을 붙여서 장마를 하나의 작은 계절로 간주한다. 그래서인지 장마가 여름에 속한다기보다 장마라는 레이어가 여름을 한 겹 덮고 있는 것 같다. 장마는 어떤 종류의 정전이라서 장마철의 습기와 희박한 빛은 사물의 윤곽을 무너뜨리고 도미노처럼 마음의 모서리도 함께 뭉개지고는 한다. 가끔 날이 개면 며칠 굶은 사람처럼 빛으로부터 탐욕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는, 빛 아래에서만 활발해질 수 있는, 보기라는 행위와 보기의 대상이 상태와 움직임의 양상을 결정하는 신체를 지닌 유기체의 일원으로서 빛은 나에게 항시적인 화두이자 애착 관계에 놓인 물질이었다. 나의 시에는 ‘빛’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나는 빛이라는 기호가 실제로 시 안에 빛을 드리우는 광원으로써 기능하기를 바라며 써 왔던 것 같다. ‘빛’은 말에 불과하지만 이 말이 시적 대상들에게 온기를 건네고 그들을 밝음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시에 빛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이 ‘빛’이란 나에게 모종의 진실을 품고 있는 단어였던 셈이다.

『투명도 혼합 공간』의 첫 낭독회를 위트앤시니컬의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관람하였는데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 중 하나는 ‘빛’에 관한 질문에 대한 김리윤 시인의 답변이었다. 시에 빛이 자주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는데, 자주 등장하는 것이 나쁜가 싶습니다. 저에게 빛은 쓰면 쓸수록 모름이 더 깊어지는 대상이며 빛을 씀으로써 이어지는 탐구 역시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혀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이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이 순간은 나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는데 문학에서, 특히 현대시에서 주제나 소재의 반복은 어떤 의미의 정체나 복제처럼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기에 그러한 편견에 반하는 대답이 멋지게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했고, 시에서의 빛을 기호가 아니라 물질로서 대하는, 눈앞에 들이닥치는 빛의 이미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에 그 무너짐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시인의 태도가 나의 것과 유사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비가 오다니 정말 여름인가 봐

 

창문을 열면 실내로 들이치는 빗방울은 차갑고 축축하다

온도와 촉감의 속도

피부는 마음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다

 

오늘 아침엔 처음으로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저녁엔 뭐 먹을까

메시지를 보내며 집을 나선다

 

돌로 만들었다는 종이* 위에 먼 곳의 바다와 커다란 돌 사진이 인쇄되는 것을 본다 이 종이는 돌가루로 만들어 방수성과 내수성이 탁월합니다 매끈한 돌 같은 표면 감촉을 가졌습니다 희고 평평한 돌 위에 반짝이는 수평선이 새겨진다

 

모든 풍경은 점의 집합일 뿐이다

점과 점 사이로 언제든 무엇이든 추락할 수 있다

 

요즘 내 삶은 정전이 끝나지 않는 것 같아

버스 앞자리의 여자가 전화기에 대고 말할 때

사거리 전광판에는 전기가 없는 마을의 고요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다

 

쌓인 장작 위에서 피어난 자그마한 불이 자라는 것

장작불 위에서 끓는 수프의 표면에 어른거리는 달빛

식탁 위의 촛불은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비추고

둘러앉은 사람들의 뽀얗게 흐려진 얼굴

 

거리의 사람들은 그 이미지가 아름답다고 느낀다

느낌을 생각으로 막을 수 없다

 

창문에 맺힌 빗방울은 비와 닮지 않았다

유리에 맺힌 물방울을 관찰하는 동안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는 없다

흔들리고 깜빡이는 물방울들이 있다

작은 불씨처럼 반짝이는 물방울의 이미지를 본다

 

건너편 초등학교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은 철벅 철벅 물웅덩이를 뛰어다니며 돌 던지기에 열중한다

그 애들이 던진 돌은 순식간에 회색 수면 아래로 사라진다

 

너는 눈가에 매달린 채로 계속 커지기만 하는 눈물방울 때문에 곤욕을 치른 우주비행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방에서 포스터 한 장이 떨어진다

그것은 얇고 가벼우며 정확히 직각을 이루는 네 개의 모서리를 가진 돌이다

물웅덩이 위에 가늘게 빛나는 수평선을 가진 돌이 떠 있다

 

사람들은 휴대폰 플래시를 켜 들고 정전된 도시를 걷는다

서로를 마주 보기엔 너무 눈부신 밤이어서 우리 모두는 바닥만 보고 걸어야 했다

 

캄캄하게 젖은 아스팔트의 수면을 우리가 만든 빛들이 떠다니고 있다

 

*미네랄 페이퍼: 돌(CaCO3, 탄산칼슘)을 주원료로 하여 환경친화적 제조 공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비목재Tree-Free 종이로서 우수한 인쇄적성, 방수상, 높은 내구성 등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스톤 페이퍼Stone Paper라고도 불리는 이 종이는 1998년 TLMT에 의해 세계 최초로 개발되었으며 부단한 품질 향상을 거쳐 상업 인쇄, 문구, 출판, 지도, 포장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김리윤, 「거울과 창」 전문)

위 시에는 돌을 원료로 만들어진 포스터와 그 위에 구현된 바다와 수평선이 등장한다. 이 포스터 속 바다는 실제 바다가 아니라 바다의 이미지이며 포스터는 돌로 만들어졌지만 돌이라기보다 종이라는 사물의 이름에 속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시는 “그것은 얇고 가벼우며 정확히 직각을 이루는 네 개의 모서리를 가진 돌이다 / 물웅덩이 위에 가늘게 빛나는 수평선을 가진 돌이 떠 있다”라고 말한다. 이때 돌가루로 만든 종이는 돌이라는 말의 바깥으로 자꾸 미끄러지지만 물웅덩이 위에 가늘게 빛나는 수평선을 가진 포스터의 이미지는 도리어 눈앞에 선명하게 도래한다. “유리에 맺힌 물방울을 관찰하는 동안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는 없다 / 흔들리고 깜빡이는 물방울들이 있다” 빗방울이라는 말 역시 비라는 말의 바깥으로 끝없이 미끄러지지만 빗방울의 이미지는 종이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화자의 눈앞에 강렬하게 현시한다. 세계는 세계라는 이미지와 다르지 않으며 그 사실은 시의 화자에게 언제나 문제적이다. 물에 젖지 않는 포스터는 포스터가 돌가루로 만들어졌다는 과거적 사실을 지시하고 유리창에 매달린 물방울은 비가 왔었다는 과거적 사실을 지시한다. 이처럼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시간적 연결을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역능은 동시에 그러한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인간의 연약한 측면을 불러오고, 이때 장면은 시간과 매개하는 기호로써 작동하지만 이미지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포획할 수 없는, 언제나 부서진 기호다.

이 시의 각주는 “돌로 만들었다는 종이”인 미네랄 페이퍼의 사전적 정의를 꼼꼼하게 제공하고 있다. 그 외 시편들에서도 언제나 부서진 기호를 시의 주된 화두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각주를 통해 작업의 영향 관계를 명확히 전달하려 하는 시집의 성실한 노력은 또 다른 층위의 감동을 주는데, 그러한 드러냄은 우리가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사하는 동시에 그러한 영향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역능을 품고 있음을 동시에 선언하며, 그에 대한 증언으로서 시들이 시집 안에 현현하기 때문이다. 『투명도 혼합 공간』에서 각주를 제공하는 방식은 나무가 아닌 돌이 종이의 원료가 되듯이 자신의 범주 바깥의 자리로 시들을 옮겨 놓고, 그곳에서 새로운 읽기의 행위를 다시 재생시킨다.


이상 <시와 농담> 마지막 편이었다. 좁은 나라에 왜 이렇게 좋은 시집들이 차고 넘치는지 소개하고 싶은 한국어 시집이 백 권도 넘지만 그때그때의 우발성과 조온습에 따라 열권의 시집을 고르게 되었다. 더 많은 시집들에게 애정을 표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정말정말 아쉽다. 목록에 없는 시집들에게도 그에 준하는 혹은 그 이상의 마음과 사랑을 품고 있음을 고백하며 <시와 농담> 시리즈를 마친다. <시와 농담>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글 밖의 어디에서든 우리가 다시 조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시와 함께, 또 농담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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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선오(시인)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좋아하는 것이 많지 않지만, 무한히 변주되고 갱신되는 피아노와 시만큼은 자신 있게 좋아한다 말하는 시인. 시집 『나이트 사커』와 『세트장』, 에세이 『미지를 위한 루바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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