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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시절 리뷰] 마지막 유리천장
이슬기 칼럼 7화 - 영화 <셜리 치점>
그는 인생 전반에 걸쳐 반문했다. “순서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의 여정은 곧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 삶이다. (2024.06.13)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이슬기 기자의 콘텐츠 리뷰.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
멕시코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마초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멕시코에서의 여성 대통령 당선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좌파 집권당인 국가재생운동(MORENA) 소속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은 승리 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 “여성 대통령 탄생은 나 혼자 해낸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조국을 물려준 여성 영웅들, 어머니들과 딸들, 손녀들과 함께 이뤄낸 것이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추미애 의원이 낙마했을 때 소셜미디어상에는 ‘마지막 권력은 여자에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다. (우리는 2012년 이미 여성 대통령을 맞이했지만, 그가 여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대통령이었는지는 상당수 사람에게 의문이었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공고한, 그 마지막 유리천장을 깨려고 분투한 이가 더러 있었다. 그 가운데 셜리 치점(1924~2005)은 여성이면서 흑인이라는 교차 차별의 상태에 놓였던 정치인이다. 지난 3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셜리 치점>은 1968년 흑인 여성 최초로 미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셜리 치점(레지나 킹)의 대선 도전기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온통 중장년 백인 남성뿐인 당선인들의 행렬, 지역구인 뉴욕 브루클린에서 열린 당선 기념 파티에서 여성과 흑인, 히스패닉계 미국인들의 온갖 당부를 듣는 초반의 두 신에서 셜리가 처한 위치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선출 의원 435명 가운데 유일한 흑인 여성이었다. (여성은 11명, 흑인은 5명이었다.)
영화는 교사 출신이면서 교육 행정가였던 셜리의 의회 입성 이후부터 시작된다. 그는 웬 흑인 여성이 자신과 같은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을 고까워하는 백인 남성에 둘러싸여 있지만, 거침이 없고 타협도 없다. 그는 다선 의원들에 치여 농업위원회에 배정되는데, 그의 지역구 브루클린은 농업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는 동료 의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원 의장에게 당당히 요구한다. “전 뉴욕 제12선거구를 대표해요. 일자리와 집이 필요한 곳이에요. 그래서 저를 뽑은 거고요.” 계속되는 어필 끝, 그는 농업위원회 대신 보훈위로 배정된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겁박 따위, 그에게는 통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그는 인생 전반에 걸쳐 반문했다. “순서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의 여정은 곧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 삶이다. 대권 도전도 마찬가지였다. 정치 자금 5천 달러를 모금하면, 대통령 경선 예비선거 후보로 이름을 올리겠다고 공언했던 그는 1971년의 크리스마스 무렵 참모들로부터 “1만 달러를 모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이길 수 없다’는 참모의 전언에 그는 답한다. “그런 태도로는 당연히 못 이기죠. 왜 못 이긴다는 거예요. 내가 흑인 여성이라는 사실 빼고요.” 여기에 덧붙여 역사학자 엘런 피츠패트릭이 쓴 책 『가장 높은 유리천장 깨기』에는 그가 백인 남학생에게 받았던 질문이 대권 도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적혀 있다. 대선 출마 질문을 에둘러 피해 온 셜리에게 한 남학생이 물었다. “그런 전통(백인 남성들의 대통령직 독식)은 언제쯤 깨질 수 있을까요?” 고심 끝 그의 답은 이것이었다. “지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절대 깨지지 않겠죠.”
영화는 셜리의 어린 시절부터 전 생애를 포괄하지 않기에, 시청자가 ‘셜리 치점’이라는 인물을 파악하는 데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게다가 우리와 다른 미국의 선거 룰은 복잡하고, 당대의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인 글로리아 스타이넘, 베티 프리단, 벨라 앱저그와의 관계(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모두가 셜리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중요한 부분들을 자료 화면으로 휘리릭 넘기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중간중간 놓친 부분을 다시 보기 위해 앞으로 돌리고,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가며 등장인물들을 검색하다 보면 감정선이라는 게 쉽사리 생기지 않는다. 셜리로 분한 레지나 킹의 외모가 실존 인물과 매우 닮기도 했거니와 뭉클, 분노 같은 감정의 고조가 없어 극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처럼도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셜리의 생애가 딴 나라 얘기로 보이지 않는 까닭은, 여성 정치인의 행보란 것이 나라나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경선 완주를 목표로 하는 셜리에게는 ‘다른 진보 후보들의 표를 깎아 먹을 것’이라며 중도 포기하라는 요구가 쇄도한다. 진보 여성 후보들의 완주를 방해하는 이런 식의 마타도어는 50년 세월과 태평양을 건넌 우리도 흔히 접하는 일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의 개별적인 공약 모두에 찬성표를 던질 순 없어도, 적어도 저것이 셜리 치점의 최선이라는 데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는 민주당 내 ‘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가 총격을 입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문안을 간다. 여러 차례 살해 위협에 시달렸던 그로서는 숨 쉬듯 당연한 처사이자 ‘정치’였다. 훗날 월리스는 셜리를 도와 가사 노동자 임금 보호를 확대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그는 당시 쟁점 사항이었던 강제버스통학제(학생들을 버스에 태워 다른 지역의 학교로 통학시키는 것)에 찬성하기도 했다. 주거 개방을 통해 인종 구성을 고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궁극적 지향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미봉책이 낫다는 것이었다. 진보 정치에서 더러 문제가 되는 이상과 점진적 발전 사이, 그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택했다.
누구나 알 듯 셜리의 대선 도전은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지금 여기서의 최선’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의 도전은 남들 눈에는 차선이거나, 무모한 시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50개 이상의 법안을 발의한 7선의 하원의원으로서, 여성이자 흑인이라는 정체성 정치에 더해 사람들 사이 ‘다름’을 연결하는 정치인이라는 자각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다른 정치인들의 레퍼런스가 된다. 직접적으로는 그의 선거 캠프에서 일했던 바버라 리 또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꿈꿨던 힐러리 클린턴이 모두 그의 자장 안에 있다.
멕시코는 ‘첫 여성 대통령 탄생’이라는 경사를 맞았지만 여성 정치인 두 명의 피살 소식도 연이어 맞닥뜨려야 했다. 한국의 국회에서 여성 의원 비율은 사상 처음으로 20%를 돌파했지만 (그마저도 미미하지만), 민주당 인선 상임위원장직 11개 가운데 여성에게는 단 하나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정치인들 얘기라니, 나와는 관련 없는 일 아니냐고? 그들이 피땀 흘려 산산조각 낸 천장의 유리를 보며, 우리도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유리천장을 깬다. 또 우리의 매일이, 그들의 레퍼런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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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말하며 사는 기자, 칼럼니스트. 1988년 대구 출생, 창원 출신. 한양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에서 9년간 사회부, 문화부, 젠더연구소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오마이뉴스》에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를 연재 중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일에 관심이 많다.
<엘런 피츠패트릭> 저/<김경영> 역14,250원(5%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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