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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 “찢어질 때 우리는 저 깊은 곳에서 변화한다”

『나쁜 책』 김유태 저자 서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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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런 위험하고도 불온한 시도를 통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의 지평을 확장했습니다. 저 금서 작가들에게서 공히 발견되는 윤리란 ‘경계 넘기를 통해 타인으로 확장되는 세계의 구축’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024.06.10)


김유태의 『나쁜 책』은 인류의 역사에서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형된 후 널리 알려진 책 30권을 골라 여행을 떠난다. 여행(혹은 탐험)이라고 한 이유는 30권 모두 독자를 우선 작가의 모국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 책은 그곳에서 찢기거나 방화되거나 국경 밖으로 내쳐졌기에 그 내력을 찾아 독자는 작품이 발표된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대부분이 픽션인 이 순수문학 작품들은 허구의 산물로 대우받지 못하고 현실 법정의 피고인석에 세워졌다. 상상은 늘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걸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왔다.

이 작품들은 겉으로는 사회를 위반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 한 시대를 추동하는 정신이 심어져 있다. 그것들은 몇 겹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저자는 중첩된 구조 속으로 독자와 동행하며 상징과 알레고리 등을 손에 만져지는 것처럼 감각적으로 들려준다. 그 안에서 문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예술 그 자체임을 입증하는데, 문장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우리 생을 충분히 떠받칠 만한 상판裳板으로서 역할하고 있다.



‘금서’ 하면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에 의해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한 책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조차 읽지 못하는 금서의 현재성에 초점을 맞춘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금서기행을 쓰기로 한 가장 큰 동기나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두려움과 배반背反은 평생 나와 동행할 것이다.” 중국 소설가 옌롄커가 『침묵과 한숨』에 남긴 문장이에요. 중국 최다수 금서 작가인 옌롄커는 이 산문집에서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하면서 “두려움과 배반을 오가는 글쓰기”가 본인의 문학이 되리라고 확언했습니다. 저는 옌롄커 작가를 정말로 사랑하고 그의 책을 오래 읽어왔습니다. 특히 장편 『사서四書』에서 보여준 그의 치열한 문학세계를 진심으로 동경합니다. 2018년 11월 옌롄커가 광주에서 열린 한 문학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책을 오래 번역해오신 김태성 선생님을 통해 인천국제공항에서 작가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날 이후로 옌롄커뿐만 아니라 세계의 금서를 향한 관심이 저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쁜 책』은 옌롄커와의 첫 만남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2019년 난징 출장에서의 경험입니다. 당시 여정에 동행해주신 한 선생님께서 중국계 미국인 논픽션 작가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한국어판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리스 장이란 존재도 알지 못할 만큼 무지했어요. 당시 중국 출장은 15개 도시를 육로로만 이동하는 고된 여정이었는데, 그날 난징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이리스 장의 삶과 죽음에 관해 들었고,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숭고함에 매료됐습니다. 늦은 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전자책을 구매해 밤새워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난징대학살기념관(난징대도살추모관)을 방문했어요. 중국판 아우슈비츠 같은 난징대학살의 ‘어둠의 터널’인 그 기념관을 혼자 걸으면서, 금서의 작가와 논쟁작이었던 작품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되돌아보니 제가 금서이거나 논쟁적이었던 작품에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켄 리우, 팡팡, 비엣 타인 응우옌처럼 금서로 지정된 작가의 작품을 유독 관심 있게 읽었고, 기자로서의 욕심에, 또 문학 기자로서 제게 주어진 달란트를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인터뷰를 청하기도 했습니다. 『나쁜 책』 출간을 염두에 두고 진행했던 것은 결코 아니지만 독자인 저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금서임을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금서의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란 확신이 들었고, 이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여정을, 또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느낀 숭고한 감정을 독자분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긴 여정의 결과물이 바로 『나쁜 책』입니다.

금서를 지정해야 한다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에게서도 나오고, 이런 논쟁이 한국이나 미국에서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은 인간이 타인의 가치관과 존재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금서 지정은 과거에 더 많았을까요? 아니면 현시점에서도 그런 혐의는 과거와 동일한 빈도와 강도로 씌워진다고 보는지요?

『나쁜 책』이 금서를 다룬 첫 책은 아닙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금서’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제 책과 비슷한 색을 지향하는 책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습니다. 베르너 풀트의 『금서의 역사』, 주쯔이의 『단 한 줄도 읽지 못하게 하라』와 같은 것입니다. 또 오래전 김삼웅 작가의 『금서의 사상사』처럼 20세기의 한국 금서를 다룬 연구서도 적지 않습니다. 이 책들을 극히 일부 참고하기도 했지만 깊이 읽진 않았습니다. 그 책들을 관통하고 나면 알게 모르게 영향받을 것이기에 책의 존재만 인지했을 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다만 『나쁜 책』이 금서를 다룬 기존 책들과 차별화하려 했던 지점은 ‘금서의 현재성’입니다. 금서는 과거 일이 아니라 여전히 뜨거운 문제라는 점, 그리고 금서 논쟁이 2024년에도 종결되지 않았다는 점에 공감하는 독자분들께는 『나쁜 책』이 나름의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도서관협회ALA가 매년 발표하는 통계자료에 따르면, 금서는 현재적인 사안입니다. ALA 는 미국의 수많은 도서관에서 책 보유나 대출을 금지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건수를 취합해 발표합니다. 이 숫자는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최근 3년간 증가 추세였습니다. 미국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뉴스 몇 줄만 검색해봐도 알 수 있는데, 한국 도서관에서도 이런 상황은 엇비슷합니다. “학생들이 보게 되는 성 관련 도서의 대출을 금지해달라”는 논란은 꾸준히 반복 중이고 앞으로 더 확산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금서 지정이 과거에 더 많았는지 또는 현재에 더 많은지에 대한 비교 수치가 제게는 없고 구하기도 쉽지 않지만 금서 논쟁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20세기에 문학적 성취의 기준이 됐던 유명한 문학상의 다수는 금서 작가들에게 돌아갔습니다. 토니 모리슨, 카밀로 호세 셀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스마일 카다레, 밀란 쿤데라, 헨리 밀러, 주제 사라마구, 미셸 우엘벡, 나지브 마흐푸즈 등은 금서나 논쟁작을 쓴 작가들이고 그들은 문학상을 수상하며 세계문학사에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물론 문학상 수상자로 호명되었다는 오로지 그 사실만으로 그들이 남들과 비교해 더 탁월한 문학적 과업을 이뤘다고 볼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추구했던 논쟁적인 글쓰기가 골방의 언어로만 남지 않았으며 타인의 공감을 얻어 후대의 상찬을 받은 작품으로 기록됐다는 사실 역시 분명합니다. 우리는 금서 작가를 둘러싼 이런 사실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계 넘기를 통해 타인에게 확장되는 세계, 그것이 금서다

책을 읽으면서 사안을 다루는 작가님의 ‘선한’ 본성이 만져질 듯 느껴졌습니다. 반면 책 내용은 아주 격렬하고도 첨예했고요. 나쁜 책을 읽어 금서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독자들이 지녀야 할 윤리란 어떤 것일까요? 또 우리 개개인은 타인을 향한 공감대를 얼마나 확장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기억합니다. 이 책이 나온 지도 이미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난 5월 9일 열린 『나쁜 책』 북토크에서 한 청중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몰락의 에티카』와 『나쁜 책』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었는데, 질문자의 말씀처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소설의 윤리’에 대한 질문을 받고 너무 깊고 커다란 주제여서 즉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이 기회에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아무래도 거친 요약이 되겠습니다만, 『몰락의 에티카』 서문은 ‘몰락하는 자들의 표정으로서의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이 글은, 문학을 “몰락을 선택한 자들의 첫 번째 표정”으로 은유합니다. 『몰락의 에티카』를 염두에 두고 쓰진 않았지만 북토크의 질문자께서 말하신 것처럼 『나쁜 책』에서 다룬 작가들의 작품이야말로 스스로 몰락을 선택하는 자들의 표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작가들은 논쟁적인 작품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불화했고 그 충돌 이후에 개인으로서의 삶이 망가지기도 했으며 때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위험하고도 불온한 시도를 통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의 지평을 확장했습니다.

저 금서 작가들에게서 공히 발견되는 윤리란 ‘경계 넘기를 통해 타인으로 확장되는 세계의 구축’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금서를 쓰고 읽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경계 넘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철조망에 살점이 뜯겨나갈 수 있고 어딘가에 찔려 피를 흘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금서를 쓰고 우리가 금서를 읽는 이유는 경계 너머의 세상이 궁금하기 때문일 겁니다. 금서는 한 세계를 옹위하는 울타리를 깨부수는 일이기에 권력자들은 국민이 이를 접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금서의 작가는 그 위험한 시도를 통해 ‘좀 더 나은, 좀 더 많은’ 타인에게 다가섰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닐까요. 금서 작가들이 금서를 집필함으로써 몰락의 길을 ‘선택’했고 그 몰락의 과정을 문학이라는 형태로 담아냈기에 우리는 지금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금서가 없는 이상적인 세상보다는 금서가 꾸준히 쓰이는 세상이 좀 더 윤리적인 인간들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책은 인간의 내면을 정말로 변화시킵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의 첫 장을 펼치기 전에 비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책』 서문에서 “책장의 목록은 그 사람의 인생을 말해준다”고 썼는데, 그건 그 사람의 내면에 그 책이 여진이나 환부처럼 남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흔들림과 찢김의 과정이 독자의 심부를 변화시키는 것 같아요. 이것이 책의 본질적인 힘이고, 소설이 가야 할 윤리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때로 강한 심장을 요구합니다. 작가님도 『나쁜 책』에서 독자에게 충격을 줄까봐 자세한 묘사나 언급을 삼간 부분이 있습니다. 날것 그대로의 세상이 주는 충격 때문에 문학과 예술은 우회의 기법을 쓰기도 합니다. 많은 독자가 끔찍한 진실과 삶의 적나라함을 직면하길 기피하는데, 그런 독자들이 여기 소개된 30권의 금서를 더 잘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의 독자가 있고, 이들 독자 곁에는 더 많은 작가와 작품이 자리합니다. 따라서 『나쁜 책』에서 다룬 작가와 작품만이 참된 문학이라고 누구도 주장할 순 없을 거예요. 여기서 다룬 30편의 작품도 세계 비교문학사의 거대한 물줄기에서 본다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할 만큼 적은 숫자이니까요. 어떤 문학(가)도 자신을 ‘최선의 문학’이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문제입니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말씀드리건대, 안온한 책이 주는 변화의 진폭이나 파동은 위험한 책이 건네는 변화의 진폭이나 파동에 비해 작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에 공감하는 분들은 좀 더 적극적인 변화의 계기를 위해 ‘날것의 진실’이 담긴 책을 펼치시게 되겠지요.

프란츠 카프카가 1904년 1월 27일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글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문장인데 옮겨 적어볼게요.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무딘 칼로는 세계를 해부할 수 없고 고무망치로는 얼음산을 조각낼 수 없을 겁니다. 충격을 주는 문학만이 참된 문학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충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독서는 문장의 안온함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유리알 유희’일 뿐이지 않을까요.

다만 덧붙여 말하자면, 여기서 말씀드리는 ‘충격’은 선정적인 표현과 선정적인 장면의 묘사를 독자가 수용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독자에 대한 작가의 일방향적인 ‘정중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여기서의 충격은 ‘단 한 문장이라도 독자를 찌르는 대목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나쁜 책』 서문에서 “영속적으로 읽히는 책들, 시간이 지나도 회자되는 책들의 문장 사이에 숨어 있는 칼날 같은 진실은 무섭도록 단순하다. 독자를 충격하지 못하면 그 책은 이미 죽은 책이다”라고 쓴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충격’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독자분들의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세상이 좋은 책을 금서로 낙인찍을 때, 그 세상은 바뀌기 시작한다 

젊어 한때 금서를 쓸 만큼 저항정신과 용기를 지녔지만, 훗날 체제와 타협하는 작가가 있다면 이들의 문학과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박제해 문학적 위상을 매겨야 하는지, 혹은 작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하는 것인지요? 작가와 작품은 기본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지, 작가의 윤리성이라는 게 작품의 윤리성과 분리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나쁜 책』에서 다룬 한 논쟁적인 작가와 작품을 염두에 두고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둘러 가지 않고 말씀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오해한 게 아니라면, 아마도 「필론의 돼지」를 쓰신 이문열 작가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일 겁니다.

『나쁜 책』 출간 뒤 호평도 받았지만 이런저런 비판도 받았고, 독자분들께서 남겨주신 글은 모두 읽었습니다. 온라인 서점의 독자평, 소셜미디어와 포털사이트에 실린 평들은 단 한 문장도 빼놓지 않고 읽었습니다. 그중 한 비판이 제 심장을 찔렀는데, “어떻게 금서를 다루는 책을 쓰면서 이문열 작가는 담고 황석영 작가는 다루지 않을 수 있느냐”는 날선 지적이었습니다. 이문열 작가의 「필론의 돼지」는 수록하면서 왜 황석영 작가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포함하지 않았느냐는 게 비판의 요지였습니다. 한 권의 책이 그 책을 펼치는 독자 모두의 균등한 호평을 누릴 수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소 황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는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문열 작가의 「필론의 돼지」는 전두환의 신군부와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서셨던 1980년 광주 시민분들 양측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던 논쟁작입니다. 당사자가 세간에서 ‘보수 문인’으로 평가받고 작가 본인도 그렇게 자처해왔는데도 과거 이 작품으로 체제의 권력자(제5공화국)로부터‘도’ 비판받았다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저는 주목했습니다. 만약 「필론의 돼지」가 제5공화국으로부터 환대받고 광주 시민분들께만 비판받는 작품이었다면 『나쁜 책』에 수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새로움’이 전혀 없으니까요.

황석영 작가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나쁜 책』에 포함한다면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작품뿐일까요.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들여다봐야 옳습니다. 그러나 이 책들을 비롯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나 『태백산맥』을 둘러싼 금서 지정의 역사,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한국 독자들이 이미 숙지하고 있는 역사입니다. 『나쁜 책』에 포함한 책의 선택은 오직 새로움, 즉 세간에 덜 알려진 이야기인가가 유일한 기준이었지 그 작품을 남긴 작가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와는 무관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문열 작가와 그의 과거 작품 「필론의 돼지」를 구분할 수 있느냐, 즉 질문하신 대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사실 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외람되지만 좀 더 강한 어조로 말씀드리자면, 소설이든 예술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인간의 모든 행동과 지적 활동의 결과물을 좌우 이념 대결의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래서 그대는 어느 편인가’라고 묻는 무례함을 우리 사회가 극복하기를 저는 소망합니다.

이 답변을 드리면서, 1987년 11월에 출간된 이문열 작가의 『구로九老아리랑』에 수록된 작가 후기를 다시 펼쳐 읽었습니다. 「필론의 돼지」가 금서로 지정되고 7년 뒤 『구로아리랑』에 이 작품을 실으면서 쓴 글인데,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하나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어쩌다 보니 이번 작품집에 나답지 않게 무슨 항변이나 변혁에의 희미한 열망 같은 게 엿보이는 작품들이 여럿 끼게 되었다.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따라 뛴다는 식으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변화에 내가 부화附和하고 있다고 여겨질까봐 겁나고 또 겁난다. 명백히 밝혀두거니와, 나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이 사회의 변화에는 이렇다 할 지분이 없다.” 이에 따르면, 이문열 작가는 훗날 체제와 타협하면서 본래의 윤리적 지향을 전환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 그 시절’부터 이미 자신의 정치적 방향을 내내 보여줘왔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지향은 『나쁜 책』과 무관합니다. 굳이 ‘그 시절’의 그의 작품(「필론의 돼지」)에 제가 관심을 뒀던 이유는 작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한 작가가 겪은 사건의 우연성이었음을 첨언해둡니다.

『나쁜 책』에서 다룬 작가 대부분이 세계문학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저명한 분들입니다. ‘나쁜 책’이라는 주제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여기 소개된 이들의 어떤 작품을 가장 즐겨 읽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토니 모리슨, 필립 로스, 밀란 쿤데라,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의 작품에서 작가님이 최고로 꼽는 작품과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나쁜 책』에서 다룬 책 가운데 제가 가장 아끼는 것은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입니다. 배수아 선생님의 번역본으로 읽었고, 이 책을 얼마나 손에 쥐었던지 밑줄이 엄청나고 책이 뜯어졌을 정도입니다. 서른 권 중 손때가 가장 많이 묻은 책일 거예요. 그 이유는, 일단 문장이 좋아서이기도 하고, 주제 면에서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가장 몽환적인 방식으로 다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사실 이란 테헤란에서 많은 자살을 야기했다고 포르치스타 하크푸르 작가는 회고하는데, 사실 저는 죽음의 찬미보다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의 소설로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책에 길게 썼습니다.

또 『나쁜 책』에서 다루지 못했습니다만 살만 루슈디의 2024년 회고록 ‘KNIFE’도 언급해두고 싶습니다. 『나쁜 책』은 2024년 4월 25일에 출간됐는데 ‘KNIFE’의 출간일은 이보다 9일 앞선 4월 16일이었습니다. 사실 루슈디는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설가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금서 작가입니다. 대표 금서로는 소설 『악마의 시』가 있죠. 알라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지도자들로부터 살해 명령을 받았고, 이게 30년도 더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30여 년 만에 테러를 당한 거예요. 세상은 다들 그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살아났습니다. 그는 한쪽 눈만 가린 선글라스를 쓰고 다시 나타났어요. 그리고 새 책의 출간 소식을 발표하는데, 바로 자신을 찌른 그 칼을 주제로 회고록을 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찌른, 그 이슬람 20대 청년의 칼에 대해서요.

작년에 『나쁜 책』에 실린 글들을 온라인 뉴스로 연재하면서 살만 루슈디의 이 책이 곧 출간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슈디를 『나쁜 책』으로 다룬다면 『악마의 시』가 아닌 ‘KNIFE’로 다루고 싶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나쁜 책』 출간 이후 5월부터 ‘나쁜 책, 시즌 2’를 온라인 뉴스로 재개했고 ‘KNIFE’를 다뤘습니다. 관심 있는 독자분들은 한번 읽어보십사 링크를 첨부합니다. (“눈 떠보니 오른쪽 눈에 칼이 박혀 있었다”…암살명령 33년만에 벌어진 실제사건 [나쁜 책])

‘KNIFE’에서 루슈디가 말하는 칼은 자신을 찌른 무슬림 청년의 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언어’야말로 진짜 칼이라고 봅니다. 루슈디 자신에게, 그의 소설은 ‘(물리적) 칼에 대항하는 (언어적) 칼’이었던 거예요. 한 문장을 옮겨 적어봅니다. “칼은 도구였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의미를 얻었습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라는 칼은 세상을 열 수 있고 세상의 작동 방식과 비밀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언어는 나의 칼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뜻밖의 칼싸움에 휘말렸다면 아마도 이 칼(언어)이 내가 반격할 수 있는 칼이었을 겁니다.”

독자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인생 금서’를 꼽는다면 그중 하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욕망을 이해하려고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오해로 점철됐던 가장 논쟁적인 종교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모태 신앙을 가졌고, 그럼에도 신앙을 오랫동안 잃어버린 신자이기도 한데, 『최후의 유혹』은 종교를 떠나서 한 희생자(십자가 예수)의 인간적인 욕망을 이해하는 논쟁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함께 다룬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도 언급해두고 싶어요. 사실 기독교에서 인류는 아담의 원죄 때문에 형벌을 겪는 중인데 이 책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저지른 죄 때문에 고통받는 예수의 원죄를 다룹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원죄를 신에게 되갚아버림으로써 ‘왜 인류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지’를 도발적으로 물었습니다. 이건 거의 신을 향한 앙갚음 수준인데, 저는 신이 정말로 계시다면, 이런 질문을 하는 인간을 정죄하기보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해내는 인간을 어여삐 여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통받는 인류를 대신해 문학적으로 질문하는 소설가를 단죄하는 신은 과연 참다운 신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이건 교리적 관점에서는 비판받을 소지가 있겠지만, 제 소신이에요. 질문 없는 신앙은 참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와 대중적 글쓰기, 그 사이를 오가는 운명 

평소 쓰시는 기사가 널리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것에 비해 첫 단행본이 좀 늦게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자로서 쓰는 기사, 시인으로서 쓰는 시 외에 평소 어떤 글들을 더 쓰고 계신지요? 서가에 꽂힌 책들이 그 사람의 인생을 입증하는 알리바이가 돼준다면, 글 역시 쓰는 이를 매 순간 새로운 존재로 빚어내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나쁜 책』에 뒤이어 쓸 책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사실 제가 글을 쓰는 방향은 두 가지입니다. 기자로서 쓰는 기사와 시 쓰는 사람으로서의 글들. 이 두 가지 글쓰기 방식은 서로를 배격합니다. 기자는 독자의 너른 평가를 위한 대중적인 글을 지향해야 하고, 시 쓰는 사람은 독자의 평가보다는 다소 개인적인 내면으로 침잠하는 글을 써야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첫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에서 제가 추구한 방향은 절대적인 미美에 관한 글이었지만 그 사이 사이에 제 개인적인 상실감(어머니의 죽음)이 소재로 녹아들었고 그러다보니 한없이 어둡습니다. 『나쁜 책』도 밝고 투명한 글만은 아니지만 좀 더 독자에게 다가가는 글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방향 사이에서의 글쓰기를 유지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상황임을 잘 알고 있고, 저는 독자분들이 흥미를 느끼는 글과 독자분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는 글 사이에서의 글쓰기가 제가 동시에 걸어가야 하는 두 가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걸어볼 수 있는 이유는, 시를 쓸 때는 하나의 상태가 되기 때문인데요. 저는 ‘시인’이라는 말을 쓰기가 참으로 두렵고, 시인은 다만 ‘시를 쓰는 상태’일 때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시는 하나의 내면적 증상이고 시 쓰기는 그런 증상 위에서만 이룰 수 있는 무엇 같아요. 반면 『나쁜 책』을 비롯해 대중과 소통하는 글쓰기는 ‘증상 없이도’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는 여러 얼굴이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한없는 어둠 속에서 시 쓰는 사람을 숙주 삼아 발화하는 자아와 그보다는 좀 더 일상적으로 평범한 얼굴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아. 제가 늘 시를 쓰는 상태에만 거주한다면 일상을 살아내기 어려울 거예요. ‘두 자아의 드나듦’ 속에서 저는 일상을 살아가고 글을 씁니다. 둘은 서로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고, 그 사이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는 쌍둥이인 것만 같습니다.

현재 출간을 논의 중인 책은 인간의 숭고성에 관한 인터뷰집입니다. 문화부 기자로 지내면서 정말 숭고하다고 여겨질 만한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영예를 오랫동안 누려왔는데 이를 저만의 언어로 써볼 계획입니다. 문화계 인사뿐 아니라 허준이 교수 등 과거 ‘인물팀(Weekend팀)’ 재직 당시 만났던 분들에 관한 이야기도 다루고 싶어요. 이와 별도로 제가 5년 넘게 영화와 원작 소설을 비교하는 글을 써왔고, 그 책 출간도 협의 중입니다. 장르의 변용 과정에서는 반드시 두 결과물의 의미 차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그에 대한 이야기예요. 또 이미 개인적으로 원고를 쌓아둔 한 권의 책이 더 있는데, 그 책은 정말이지 ‘영업비밀’입니다.(웃음) 어떤 책을 먼저 출간하게 될지는 현재로선 미확정입니다. 저의 다음 여정은 글항아리 이은혜 편집장님의 안목과 확신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제가 『나쁜 책』에 이어 어떤 책으로 독자분들을 다시 만나든, 쉽고 안전한 방법으로 책을 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김유태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8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가 있다.


나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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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 저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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