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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의 노상비평] 눈물 콧물 산책

신림동을 산책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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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의 경계에 꼼짝없이 멈춰서서 달려오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를 마주 보며 나는 이대로 이 할머니와 함께 죽는구나 생각했다. 아니 그냥 그대로 죽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2024.05.31)


이연숙(리타) 평론가가 길에서 만난,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격주 금요일 연재.


신림역 근처 식당가의 모습. (2022년 7월 3일 촬영)


길 위를 걷는 일은 흔히 ‘산책’이라 불린다. 하지만 어딘가 유유자적한 어감의 ‘산책’은 신림동에 어울리지 않는다.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을 지은 김윤영의 말처럼, 어딜가도 “밀려나고 쫓겨난 사람들”의 흔적이 보이니까. 쭉 뻗은 대로 하나 없이 구불구불한 골목으로 산책, 아니 배회하다 보면 내가 다름 아닌 가난을, 땀과 눈물을, 실패를 (그리고 그것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희망을!) 수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착각까지 든다. 이들을 발견하는 기쁨은 슬픔과 그리 다르지 않다.

스무 살 이후 서울로 상경한 이후 나는 줄곧 관악구 신림동에만 살았다. 신림동이라고 하면 으레 2호선 신림역이 위치한 지역 일대를 떠올리기 쉽지만 관악구에서도 신림동은 유난히 넓은 면적을 가진 법정동이다. 행정동만 무려 11개인 신림동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경기도 시흥군에 속하며 의성 김씨의 집성촌이었던 서원리, 신림리, 난곡리는 1963년 서울의 해방촌, 청계천, 한강 일대, 이촌동, 대방동 등에서 살고 있다 쫓겨난 철거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대책으로서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며 봉신동(몇 년 뒤 신림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1973년 서울의 인구 팽창으로 인해 현재의 관악구가 영등포구에서 분리 신설되며 신림동은 영등포구가 아니라 관악구에 속한 지역이 되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온 ‘애물단지’ 신림동은 처음부터 집을 잃은, 집이 없는 이들이 몰려드는 임시 대피소였던 셈이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1인 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에서 86%를 차지하는 신림동은 한 기사의 말마따나 “결혼도 출산도” 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 모여 사는 “서울의 미래”1 를 극단적으로 예시하는 곳이다. 비단 젊은이들만 ‘미래 없는 미래’라는 비재생산적인 시간성 속에 놓여 있을까. 가난하고 아프기는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폐지 줍는 할아버지의 박스로 가득 찬 아지트. 개업한 지 몇 개월 만에 ‘임대 문의’를 써 붙인 닭강정 가게. 낚시 의자에 앉아 일광욕하는 편의점 사장님.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다 평지를 한 뼘이라도 발견하면 주저앉아 쉬는 할머니들. 항상 같은 자리를 파수꾼처럼 지키는 야쿠르트 카트 아주머니들. 한 사람 몫의 삶을 꾸역꾸역 감당하고 있는 얼굴들 사이로 훅 끼치는 살냄새. 길 위에서 도시 빈민들의 운명이 곧 내게 속한 것임을 알아보지 않기란 쉽지 않다.

“도시에서 길을 잘 못 찾는 일은 흥미로운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다. 길을 잘 모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 도시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간판들, 도로의 이름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집들, 노점들, 술집들로부터 메시지를 듣는 방식은 숲속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자기 발에 밟힌 잔가지로부터, 멀리 어느 황새의 요란한 울음소리로부터, 갑자기 나타난 고요한 빈터에 불쑥 피어 있는 한 떨기 백합으로부터 메시지를 듣는 방식과 비슷하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플라뇌르[Flâneur, 산책자/배회자/보행자]를 20세기 말 학문적 주제로 만든 사람”으로서 발터 벤야민을 언급한다. 그에게 산책, 혹은 배회란 사람들, 사물들, 풍경들로부터 ‘계시’를 받는 경험과 유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산책’이 ‘사건’이 되는 그런 경험이.

어느 날 새벽 글이 잘 풀리지 않아 언제나와 같은 거리를 걷다가 마주친 한 할머니가 있었다. 그는 눈물과 콧물을 동시에 흘리면서 동네에서 유난히 신호가 긴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집에 가야 한다고 거의 울부짖는 할머니는 거동이 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상태로 어떻게 집 밖으로 나온 걸까, 집으로 오는 도중에 지팡이나 휠체어를 도난당하기라도 한 걸까? 혼란스러웠지만 어쨌든 초록 불이 켜지자 나는 할머니를 부축해 천천히 한 걸음씩 이동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우리가 4차선의 중앙선에 도달했을 때 횡단보도는 빨간 불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계속해서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집에 가야 한다고,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가 없다고,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고 연신 칭얼거렸다.

중앙선의 경계에 꼼짝없이 멈춰서서 달려오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를 마주 보며 나는 이대로 이 할머니와 함께 죽는구나 생각했다. 아니 그냥 그대로 죽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 어깨는 이제 할머니의 눈물과 콧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다시 초록 불이 되자 업히라는 내 말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할머니를 끌다시피 하며 무사히 길을 건넜다. 할머니는 자꾸 조금만 더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며 어두운 골목으로 나를 끌고 갔다. 갑작스럽게 무서워진 나는 대충 할머니의 집이라 추정되는 곳에 그를 떨궈 두고 집까지 잰걸음으로 빠르게 도망쳤다. 집에 돌아온 나는 당연하지만 한 글자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할머니의 눈물과 콧물, 나의 땀으로 범벅된 티셔츠를 무슨 방사성 물질이라도 되는 양 세탁기에 황급히 던져 넣을 기력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나는 왜 그를 끝까지 배웅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나는 할머니가 처음 보는 젊은이에게 눈물과 콧물을 묻히는 걸 좋아할 뿐인 미치고 아프고 가난한 노인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애초에 집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나에게 신림동을 산책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외상을 입는 일이다. 눈물과 콧물을 흘리는 할머니들이 매일 같은 길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알면서도 매일 같은 길목으로 산책하러 나간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우리 도시 빈민들이 눈물과 콧물로만 함께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한다. 서로에게 진득하게 눈물과 콧물을 묻히면서 우리는 제발 다시 만날 일 없기를 기도한다. 이 단 한 번의 헤어짐 속에서 발생하는 무한한 연민. 이게 내가 산책을 그만둘 수 없는 유일한 이유다.


1   정시행, “"설, 나 혼자 쇤다" 1인 가구의 성지 신림동 블루스”, 2024.02.17, 「조선일보」, //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4/02/17/WK574RLRRFFGFEEWZBJKPTHB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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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연숙(리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들의 존재 양식에 관심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 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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