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특집] 엽편 <이렇게 살기로 했습니다> ② - 권아람, 오세연, 오지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쩌면 어디선가 살고 있을 어떤 가족
“이건 결혼에 가까운 거예요 아님 대체 가족에 가까운 거예요?” (2024.05.17)
제도 안과 바깥에서, 한국과 한국을 벗어난 자리에서, 혼자 그리고 여럿이, 우리는 이렇게 살기로 했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채널예스에서 다양한 가족의 의미를 묻습니다.
글 | 권아람 (영화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홈그라운드> 촬영을 위해 이태원에 있는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에 드나들던 때의 일이다.
가정의달이라는 5월이 되면 손님들이 선물과 편지를 들고 가게에 방문하곤 했다. 편지에는 애정과 감사의 마음이 눌러 적혀 있었다. 60대의 주인장 ‘명우형’과 레스보스의 손님들은 서로 의지하기도 했고, 실망하고 멀어지기도 했으며, 시간이 지난 후 반갑게 재회하기도 했다. 부모와 자식도, 삼촌과 조카도,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관계이지만, 이 ‘연결’이 어떤 순간에는 서로의 빛이 되어 주었다.
레스보스에 머물던 시간은 곁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 순간의 힘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존재들 사이를 유영하며, 돌보고 아끼는 순간들을 나누며 살고 싶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가족일 것이다.
글 | 오세연 (영화 감독)
“요즘 결혼이 너무 하고 싶어요. 진부하죠?”
“그렇긴 한데 대체 가족 이런 것도 이제 진부하죠.”
“나 원래 비혼주의자였는데.”
“최근에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되셨나봐요.”
“그런가봐요. 저는 매일 매일 다르게 살았거든요. 매일 일어나는 시간도 다르고 매일 하는 일도 다르고. 그게 좋아서 그렇게 살았는데 이젠 그런 게 너무 불안정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안정감을 찾고 싶어요.”
“안정형 인간을 만나야겠네요.”
“네, 그럴 것 같아요.”
“그럼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책 읽고 운동하고 출근하고 제시간에 집에 와서 탄단지 균형 잡힌 식단으로 밥 먹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밤 10시에 잠드는 사람 술 절대 안 마시고 담배 절대 안 피우고 재미 하나도 없는 사람이랑 결혼 가능?”
“으악. 그건 좀.”
“건강한 몸에 좋은 정신이 깃든다.“
“그런 식의 안정 말고요. 정서적인 안정. 자격지심 없는 사람. 허공에 둥둥 떠있는 내가 땅에 발 붙이고 설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 영화 보고 산책하고 대화하는 게 즐거운 사람. 같이 있으면 웃을 일이 많은 사람. 좋아하는 게 많은 사람. 아는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 친구 별로 없어서 나랑만 놀아주는 사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단점을 가진 사람. 아 그리고 싫어하는 게 비슷한 사람.
“뭐가 되게 많네요.”
“아무튼 결혼은 하고 싶은데 사람도 없고 돈도 없네요. 사람들은 무슨 돈이 있어서 결혼을 할까요?”
“감독님 저는 돈 없어요.”
“네? 저도요.”
“월세 내고 나면 쌀만 먹고 살아야 해요.”
“하. 저는 물만 먹고 살아야 해요.”
“그럼 같이 사는 거 어떠세요?”
“네?”
“월세도 아낄 겸.”
“이건 결혼에 가까운 거예요 아님 대체 가족에 가까운 거예요?”
“글쎄요. 제가 요리 할테니까 청소 하실래요?”
“설거지는 누가 해요?”
“가위바위보 해야죠.”
“설거지가 제일 싫은데.”
“저도요.”
“비슷하네요 싫어하는 게.”
“그러네요.”
글 | 오지은 (싱어송라이터)
나는 눈을 떴고 목이 마르다. 가족은 거실에서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나는 정수기 쪽으로 걸어가며 묻는다. 원두 남았어? 응. 다 떨어져서 시켜놨어. 고소한 거 왔으니까 새로 뜯어. 나는 웬일로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신 거 마시고 싶어. 남은 거 내가 마시고 새로 주문할게. 원두를 두 스푼 그라인더에 넣은 다음 냉동실을 연다. 손톱을 세워 트레이에서 얼음을 꺼내 큰 컵 가득 채운다. 원두가 따뜻한 물에 부푸는 동안 트레이의 빈 부분에 물을 붓는다. 이렇게 가득 부어 얼리면 나의 가족은 얼음을 쉽게 꺼낼 수 있겠지. 그렇게 이 집의 냉동실에는 계속 얼음이 있고 거실장에는 계속 원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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