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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의미 너머의 해변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1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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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시는 이해보다도 앞서 닿는다. 시는 머리보다 가슴에 먼저 닿는다. 그것은 결승선 앞에서 가슴을 내미는 육상 선수의 마지막 한 줌의 ‘전력(全力)’과 같다. 그러니까 시는 “풀”이고 마음의 직통 열차다. 시는 머리가 아닌 우리 영혼에 닿는다. (2024.05.17)


고명재 시인이 매달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를 전합니다.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중에서 (『김수영 전집』, 민음사)


아니, 풀이 어떻게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누울 수 있지? 김수영의 시는 언제나 수수께끼였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둥,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는 둥. 선문답처럼 쓰인 이 시의 뜻은 알지 못한 채 연거푸 읽으며 좋아하고는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를 ‘작용의 시’라고 생각했다. 흐린 날 불어오는 바람이며, 초원에서 쓰러질 듯 휘청이는 풀.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 걸 보면 바람도 점점 거세졌겠지. 속이 쾌청하도록 율동하는 초원의 이미지. 이런 풍경을 혼자서 상상하면서, 나는 이 시가 “풀”과 “바람”이 서로를 눕히고 일으키는 ‘작용과 관계의 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최근, 이 시가 전혀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거나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경우가 있잖아? 그건 바로 시를 쓰거나 읽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우리 내면에서는 일어난다. 그러니까 만약 이 시의 “풀”이 ‘시詩(의 작용)’를 뜻하는 거라면? 이 시가 김수영의 ‘메타 시’(시에 대한 시)라면? 전혀 다른 해석의 장이 열린다. 시는 다 이해되거나, 해석되기도 전에(“빨리 눕”고 “빨리 울고” “먼저 일어나”버리는) 사람을 꿰뚫는 힘을 지녔기 때문.

그러니까 시는 이해보다도 앞서 닿는다. 시는 머리보다 가슴에 먼저 닿는다. 그것은 결승선 앞에서 가슴을 내미는 육상 선수의 마지막 한 줌의 ‘전력(全力)’과 같다. 그러니까 시는 “풀”이고 마음의 직통 열차다. 시는 머리가 아닌 우리 영혼에 닿는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이해(의미화)되기도 전에 우선 닿고 보는, 쨍한 시들을 읽어보고자 한다.


모든 국은 어쩐지

괜히 슬프다


왜 슬프냐 하면

모른다 무조건


슬프다


냉이국이건 쑥국이건

너무 슬퍼서


고깃국은 발음도 못하겠다.


고깃국은……


봄이다. 고깃국이.


- 김영승, 「슬픈 국」 전문 (김영승, 『화창』)


이해되기도 전에 심장부터 무너뜨리는, 그런 시들을 종종 만날 때가 있다. 대학 수업 시간에 처음 이 시를 봤을 때 ‘이해 이전의 이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떤 시들은 머리를 통과하지 않고도 직통으로 마음 가장 안쪽에 닿는다. 모든 국은 슬프다는 이상한 정의(定意). 화자는 어떤 근거나 논리적 인과도 덧대지 않고 그저 “냉이국이건 쑥국이건 / 너무 슬퍼서” 말을 끝맺지 못하고 여백만 남긴다. 이 멀겋고 물이 가득한 음식의 한 형태. 간간이 씹고 대부분은 넘겨야 하는 “국”. 게다가 “고깃국은……” 슬퍼서 “발음도 못하겠다”. 그렇게 화창한 봄이 눈앞에 왔는데 화자는 “고깃국”이라는 말만 한참 들여다본다.

그러니까 시는 이렇게 곧장 슬프다. 의미가 파악되기도 전에 닿는다. 왜 국이 슬픈 걸까. 우려내기 때문에? ‘우려냄’이 ‘울음’으로 연상된 걸까. 차를 마실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다. 어떤 존재를 가장 온전하게 섭취하는 방법은 탕이나 국, 혹은 차처럼 시간을 들여서, 우려내는 방식이 아닐까. 예(禮)를 다해 존재를 취해내는 방식. 한 존재의 죽음으로 나를 일으키는 일. 물에 푹 담근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지. 국은 살점의 물. 존재의 물. 냄새의 물. 퉁퉁 불어버린 몸과 형체의 물. 이것은 가난이 만들어 낸 조리법이기도 하다. 제한된 식재료로 최대한 많은 이들이 나눠 먹기에 국보다도 좋은 조리법은 없다. 그러니 훌훌 넘기며 (울음처럼) 삼켜야 하네. 아픈 사람들이 곧잘 이것을 마시곤 했네. 이런 생각 끝에 어쩌면 이 시가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는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어떤 해석이든 번다할 뿐, 이 아름다운 시는 해석보다 빠르게 우리를 슬픔으로 인도한다.


울 때 나는


소금으로 이루어진 칼

부레를 지닌 얼음

가난한 수도

깨지고 싶은지 버티고 싶은지

모르겠는,

금간 도자기


파열음을 돌보는 개가 사는 언덕에선 나를 이렇게 부른다


아침엔 바보 점심엔 파도


저녁엔 따귀 까마귀 푸성귀


밤엔

카오스 피안

카오스 피안


그곳에서

내 미래 직업은 아지랑이

내 둥근 식탁은 아지랑이

내 굳은 슬픔은 아지랑이


바보 파도 따귀

푸성귀


소리 없이 리듬만으로

울 때, 나는


동물 소리


아침엔 바보

점심엔 파도 새벽엔


우는 강

우는 탑


푸성귀


푸성귀


우는 탑


- 박연준, 「울 때 나는 동물 소리」,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문학동네)


도무지 해석하고 싶지 않은 시들이 있다. 너무 좋은 시들은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박연준의 이 시는 해석을 미루고 계속해서 읽고만 싶게 만든다. 그것도 입으로, 숨으로, 나의 발성 기관으로, 한땀 한땀 피륙을 짜듯 읽고 싶다. 그렇게 소리 내서 읽다 보면 ‘언어적 의미’가 아닌 ‘음성적 힘’으로 이 시는 온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직접 읽어야 한다. (연주되어야 온전해진다는 점에서) 이 시는 ‘말로 이루어진 악보’가 아닐까. 성대를 마찰시키고 혀와 입술의 굴곡을 거쳐 간신히 탄생하는 소리의 통로. 내가 “깨지고 싶은지 버티고 싶은지” 나조차도 “모르겠는, / 금간 도자기” 같을 때, 노래하듯 이 시를 읽어보자. 그러면 나의 슬픔이 또렷해질 것이다. 그것은 결코 말로 전달될 수 없고 “따 까마 푸성”처럼 온갖 ‘귀’들을 통해 간신히 전해질 수 있는 울림에 가깝다. 그러니 이 시는 직접 입으로 읽어야 한다. (덧붙여 나는 여러 사람과 한자리에 모여서 시를 낭독하는 걸 참 좋아하는데 그건 포유류 생명체인 우리가 목숨(목과 숨)을 이용하여 생존과 무관한 행위를 하는 것이 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노래도 ‘목-숨의 다른 사용’이 아닐까. 시와 노래는 생명의 근원(숨)을 달리 사용한, 아름다운 사건이 아닌지.)

말 이전에 우리에겐 소리가 있다. 소리를 분절시켜 기역[g], 니은[n], 디귿[d]으로 구분한 것이 ‘언어’다. 그런데 시는 때때로 이러한 구획(분절)을 벗어나 ‘소리 그 자체’가 되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자체의 떨림만으로, 울림만으로 가닿으려는 ‘소리의 꿈’. 이것은 마치 음악과도 유사한데 박연준의 시는 이런 ‘소리-자립’을 꿈꾼다. 기존의 ‘언어-소리-뜻’의 결합 관계를 벗어나 ‘슬픔의 소리-되기’가 되어보는 것. 이것은 사실 자유의 쟁취와도 관련이 있다. 다음의 글을 함께 읽어보자.


야콥슨은 그가 “극치의 옹알거림 die Blüte des Lallens”이라고 부른 것, 즉 옹알이하는 아이의 음성학적 능력에는 한계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조음에 관한 한 아기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기들은 눈곱만큼도 힘들이지 않고 인간 언어에 포함돼 있는 어떤 –그리고 모든- 소리라도 낼 수 있다. (중략) “모든 관찰자들이 크게 놀라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전前언어 단계에서 처음으로 말을 깨치는 단계,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언어의 첫 단계로 넘어가면서 아이들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거의 전부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 대니얼 헬러-로즌, 조효원 옮김, 『에코랄리아스』 문학과지성사 중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언어를 습득하기 전에는 누구나 어떤 소리든 낼 수 있다. 우리에게 소리는 무한한 가능성이었고, 무한한 조음적 자유가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특정한 언어를 본격적으로 습득하기 시작할 때 아기들은 무한히 낼 수 있었던 소리의 가능성을 잃는다. 즉 ‘가,갸,거,겨’와 같은 특정한 틀 속의 소리만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소리의 감옥인지도 모른다. 굳고 고정된 소리의 쇠창살인지도 모른다. 박연준은 이 ‘의미화의 감옥’ 밖을 향해 노래한다. “파도”처럼 “아지랑이”처럼 형체를 넘어 흐름으로 율동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시의 제목(「울 때 나는 동물 소리」)은 참으로 묘하다. 이 제목은 두 가지 뜻을 아우르는데 첫째, 울 때 (입에서) 나(오)는 동물 소리라는 뜻을 내포한다. 즉 울 때 나는 ‘정돈된 언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동물 소리’처럼 다양하고도 자유로운 소리를 낸다는 것. 둘째, ‘울 때 나(의 정체성)는 동물 소리가 된다는, 존재 규정에 관한 의미로도 읽힌다. 즉 울 때 ‘나’는 분절되거나, 한 가지 의미로 고정되는 게 아니라, ‘동물 소리’라는 ‘흐름-존재’가 되는 것이다. ‘움직이는 존재’ 즉 ‘동물(動物) 소리’가 되는 것. 그래서 이 시의 나는 “소금으로 이루어진 칼”도 될 수가 있고 “가난한 수도”도 “바보”도 “파도”도 될 수가 있다.

그나저나 “푸성귀”라니. (그것도 연거푸) “푸성귀 // 푸성귀”라니. 이 시를 읽는 순간 반해버렸다. 이제 푸성귀는 ‘사람이 가꾼 채소나 저절로 난 나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이 아니라 듣는 순간 귀가 푹푹 내려앉을 것만 같은 슬픔의 소리가 되었다. 이 시를 읽은 뒤 “푸성귀”는 다듬지도 못할 것 같다! 시는 이렇게 의미를 벗고 소리를 해방시킨다. 내 슬픔은 한 자리에, 하나의 뜻으로만 정박(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푸성귀-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친구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해볼 것이다. 어제 몸이 너무 아프고 시가 안 써져서, 요즘 나… 푸성귀 푸성귀.

“리듬만으로” 또렷해지는 마음이 있다. 의미 너머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가 있다. 그게 나는 시라고 믿고 싶다. 그나저나 이 시의 끝은 왜 “우는 탑”일까. 왜 이 시의 행갈이-연갈이가 탑(의 모양)처럼 보일까. “새벽”까지 울다 보면 알 때가 있다. 울면서도 스스로를 곧추세워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 어쩌면 시라는 소리-세계도 덧없이 무너질 줄 알면서도 기어코 쌓아보는 “우는 탑”인지 모른다. 그 위태로운 돌쌓기의 아름다움. “내 미래 직업은 아지랑이”. 시인은 그렇게 “카오스”처럼 흔들리면서도 기어코 소리의 척추를 바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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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명재(시인)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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