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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의 잃어버린 편집을 찾아서] 편집이란 무엇인가?
김영훈 칼럼 - 4화
한국의 편집자는 비슈누의 얼굴과 천수관음의 손을 가진 존재다. (2024.04.22)
지금 출판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김영훈 편집자가 말해주는 출판 이야기. 격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
‘편집자는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지금도 이런 질문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아득하다. 편집(編輯)의 사전적 의미를 빌려 ‘책 만드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곧바로 다음 질문이 날아든다. ‘그러니까 책을 쓰는 건가요?’ 아차차, 오해의 소지가 있었나. 원고는 저자가 쓰고, 편집자는 저자에게 원고를 받아서 책을 만든다고 부연한다. 상대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아, 그러니까 인쇄소에서 일하는 거죠?’
‘편집자의 일’을 명쾌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편집자가 무엇이고 또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기 특히 어려운 이유는, 속한 출판사나 팀의 규모·형태·성격에 따라 그 일의 범위와 내용이 엿가락처럼 변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천태만상 편집세상 편집 일도 가지가지다. 출판사라고 다 같은 출판사가 아니다. 디자인팀·제작팀·저작권팀을 모두 갖춘 100명 내외 규모의 출판사와 협업할 동료가 턱없이 부족한 10명 이하의 출판사는 전혀 다른 세계다. 이런 탓에 편집자의 업무 범위와 양은 때와 장소에 따라 쉽게 널뛴다.
다만 전 세계 모든 편집자의 일이 이토록 모호하고 (그로 인해) 과중한 것은 아닌 듯하다. 영국 펭귄 출판사의 편집장 리베카 리가 쓴 『편집 만세』는 영국 출판계의 일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리베카 리는 함께 일하는 이들의 인터뷰도 수록해 ‘한 권의 세계를 만드는 일’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판권 너머에 존재하는 그림자 노동의 실체를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덕분에 흔히 편집자 한 사람의 몫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꼭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그렇게 일하는 것도 아니란 사실 발견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 중 하나. 영국 펭귄 출판사에선 뒤표지와 책날개 문안을 편집자가 쓰지 않는다. 과거에는 ‘블러브(blurb)’라 불리는 부서가 작성했고 이후엔 한 사람이 도맡아 작성한다. 보도자료만큼이나 편집자를 고달프게 만드는 ‘찾아보기’는 전문 색인가가 제작한다. 영국에는 무려 색인가 협회가 색인 제작의 적정 단가를 정하여 권장한다. 본문 편집은 교열자와 교정자 각각 참여하고, 이때 교정자는 대조 교정자와 블라인드 교정자로 구분된다. 전자가 소위 원본을 가지고 ‘적자 대조’를 한다면, 후자는 대조할 원본 없이 교정을 본다.
“양질의 색인을 만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예요. 작은 책은 15시간, 정말 두꺼운 책은 무려 100시간 상당의 비용이 청구돼요. 또 아무래도 좋은 색인은 전문 색인가와 저자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질 때가 많아요.”
- 『편집 만세』, 237쪽
“2019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색인가 협회는 시간당 약 4만 2000원, 페이지당 4800원, 혹은 단어 1000개당 약 1만 3000원이라는 색인 단가를 권장한 바 있다.”
- 앞의 책, 237쪽
편집을 세분화하고 그에 따른 편집자의 역할 구분이 비단 영국만의 문화는 아닌 듯하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는 ‘현장 기반의 체계적인 편집 매뉴얼’이라는 이름 아래 펴낸 『편집자란 무엇인가』에서 편집자는 크게 기획 편집자·개발 편집자·본문 편집자 세 가지로 나누고, 경우에 따라 원고를 전문적으로 다듬는 윤문 편집자와 관리와 경영 비중이 큰 관리 편집자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구분과 정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출판계 전체로 보면 편집자는 주요 업무와 기능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저자와 원고의 입수를 다루는 기획 편집자, 본문 개발을 담당하는 개발 편집자, 원고의 교정·교열을 담당하는 본문 편집자다.
- 『편집자란 무엇인가』 개정판
한국의 편집자는 비슈누의 얼굴과 천수관음의 손을 가진 존재다. (많은 편집자가 경험으로 인지하듯) 대개 한 사람의 편집자가 기획―개발―윤문―교정에 이르는 전 과정을 담당한다. 색인 역시 전문 색인가가 아니라 담당 편집자가 제작한다. 뒤표지와 책날개 문구를 작성하는 담당자가 따로 있다는 출판사는 들어본 적 없다. 외서 검토비를 줄이기 위해 AI 번역기를 쓰는 마당에, 편집 과정이 단계별로 전문화되어 있고 각 단계에서 전문가가 참여하는 영국의 사례는 그저 별세계의 일처럼 들린다.
대다수 출판사는 부재한 인력 공백을 유재한 직원을 마른걸레처럼 쥐어짜서 채운다. 외서 검토는 AI 번역기와 편집자에게 배속하고, 카드뉴스와 상세 페이지는 가내수공업으로 해치운다. 에이전시와 인쇄소 소통 역시 편집자가 전담한다. 부족한 자원을 편집자의 노동으로 대체하는 시스템. 물론 사정과 필요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환경적 어려움을 해결할 책무는 오롯이 편집자 개인에게 부과하면서 그럴싸한 결과를 대놓고 독촉한다는 점이다.
편집자는 무엇이고 편집이란 또 무엇일까? 스티븐 킹은 “글쓰기는 인간의 일이고 편집은 신의 일”이라 말했다. 편집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 이해하면서도, 이따금 이 말이 무섭게 들린다. 한국에서 편집자는 초인이 되길 강요받는다. 하지만 편집자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초인적 결과를 위해 퇴근을 미루고 주말을 반납하기 일쑤다. 여전히 편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이 모든 걸 감내하는 것이 편집이고 그것이 바로 신의 일이라면, 2024년 대한민국에서 신은 멸종위기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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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서너 곳의 출판사에서 책을 편집했다. 만들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한결같이 타이완과 홍콩을 사랑한다. X(트위터였던 것) @bookeditor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