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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시절 리뷰] ‘팬덤 정치’에 대처하는 자세
이슬기 칼럼 3화 - 『‘팬덤 정치’라는 낙인』, 『혐오하는 민주주의』
이번 선거 결과가 잘 이해되지 않는 여러분에게, 이 두 권의 책을 권한다. ‘정치 공학 같은 걸 알아서 뭐 해’ 싶다가도 뜻밖에, 내 삶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2024.04.18)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이슬기 기자의 콘텐츠 리뷰.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
틈만 나면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틀어놓는 편이다. 특히나 설거지나 분리수거할 때. 22대 총선이 끝난 지난 14일, MBC 라디오 ‘정치인싸’에는 김준우 녹색정의당 상임대표가 나왔다. ‘창당 12년 만의 원외정당’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 들고 라디오에 돌아온 그는, 안색이 파리했다. “저희는 내각제 지향의 정당이었던 거 같아요. 국민들은 대통령제하에서 정당을 보는 거 같고, 그 당의 아이콘이 될 대선주자를 보는 것 같아요. 12년 동안은 노회찬, 심상정이라는 대선 주자를 바라봤고, 그다음 ‘넥스트’(next)가 안 보인 부분이 있는 거죠.”
녹색정의당은 이번 총선에서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1석’을 염원한 사람이었다. 나는 올 초에 낸 책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에서 30여년간 간호사로 산 노동운동가 나순자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을 인터뷰했다. 이후 그가 녹색정의당의 비례 1번이 되었을 때, 그의 여의도행은 꼭 필요한 일이라 여겼다. 내가 취재했던 여초 직업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그러나 선거 결과 녹색정의당의 비례대표 득표율은 2.14%. 22대 국회 ‘0석’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다른 의제’를 얘기하는 진보 정치의 힘을 믿는 나에게는, 이 결과가 당황스러웠다. ‘좌절’보다는 ‘당황’이었다. 성차별이 강고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성평등을 말하는 정당인데 왜 이런 것일까. ‘쌉T’인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싶었고, 가장 고전적인 방식으로 책부터 뒤져보기로 했다. (현실이 이해가 안 가면 책부터 들추는 아날로그 인간이 나다.) “넥스트가 안 보였다”는 김 대표의 말에 견주어, 근 20여년간 정치판의 화두였던 ‘팬덤 정치’에서 ‘팬덤’이 없었던 녹색정의당의 현실을 짚어보기로 했다.
지난해 3월 출간된 책 『‘팬덤 정치’라는 낙인』에서 사회학자 조은혜는 ‘팬덤 정치’에 담긴 부정적 뉘앙스를 경계한다. 그가 보기에 ‘팬덤 정치’라는 개념은 정치인 지지자를 비이성적인 집단으로 낙인찍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동시에, 그들 내부의 다양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언어다. 대신에 그는 ‘인물 지지 정치’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인물 지지 정치’는 ‘사회 변화를 추진하기 위한 시민들의 새로운 참여 행동’이며 ‘신뢰하는 행위자를 제도 정치 영역에 등장시키고 힘을 실어주려는 행위’(21쪽)다. 그는 문재인 전 대통령 지지자 13명을 심층 면접해 ‘인물 지지 정치’의 의미를 확장해 간다.
여와 야의 정책적 스펙트럼이 넓지 않은 한국의 정치 지형 하에서, 유권자들은 정당보다는 인물에 집중하고 그를 밀어 올려 그가 대표하는 가치를 부각시키는 정치 활동을 한다. 그래서 조은혜가 만난 문 전 대통령 지지자 13명 모두는 ‘비판적 지지’가 아닌 ‘절대적 지지’를 한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부터 기인한 학습 효과, 대통령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 수행 기반 마련 등을 위해 그들이 택한 전략적 사고의 결과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팬덤 정치’는 기존에 갖고 있던 부정적 의미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지난해 8월에 출간된 정치학자 박상훈이 쓴 『혐오하는 민주주의』에서 ‘팬덤 정치’는 오늘날 혐오하는 민주주의의 밑바탕이다. 정치인 팬덤들은 욕설과 조롱, 모욕을 섞어가며 상대를 악마화하고, 정당 내부의 쓴소리를 ‘내부 총질’이라는 이름으로 폄하하는데 앞장을 선다.
이번 총선도 윤석열과 이재명, 조국과 이준석 같은 인물 일변도의 선거판으로 ‘팬덤 정치’의 일환이었다. 대선이 아닌 총선인데도, 이들이 화제의 중심에서 비례대표 판세까지 적극 견인했다. 반면, 김 대표의 진단처럼 녹색정의당에는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녹색정의당은 노동, 기후, 성평등같이 거대 정당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의제에 집중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실제 사람들 삶에 발붙인 이들 의제보다, 몇몇 정치인의 흥망을 내 삶과 더욱 가까운 일로 체감해 열성적으로 지지하거나 ‘비토’했다.
지지자라는 개인의 정동에 집중한 사회학자(『‘팬덤 정치’라는 낙인』), 정당 정치의 동학에 보다 초점을 맞춘 정치학자(『혐오하는 민주주의』)의 책은 모두 정당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정당 내·외부에서 다양성과 비례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해야 하고(조은혜), 정치가들과 정당이 더 깊게 숙의해 합의된 변화를 이끄는 노력을 해야 한다(박상훈).
맞다. 정당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팬덤’이라는 이름의 열성적 지지층이 생길 만치 매력적인 정치인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 또한 정당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수·진보 구분이 잘 안 가는 한국의 정당 지형에서 다원화를 꾀하는 일은 오랜 시일을 요한다. 지지하는 정치인과 일정 거리를 두고 비판적 지지를 견지하라는 개인 차원의 해법도 마찬가지다.
그에 비하면 정당을 대표하는 아이코닉한 정치인을 길러내는 일은 비교적 시간이 덜 든다. 정당의 의제를 내재화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정치인의 존재가 정당에게도 지지자들에게도 즉각적인 정치적 효능감을 안긴다. 정당 자체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 환기시킨다. 일단은 유권자들의 정치적 지지가 있어야 정당은 살아남는 것이며, 모든 정당의 목표는 ‘집권’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자명하기에, 이러한 정치인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특히나 소수정당에게는 더욱 그렇다.
‘팬덤 정치’의 명과 암을 다룬 두 권의 책에 대한 독서 경험은, 뜻밖에 ‘팬덤 정치’를 활용도 해야 한다는 현실론으로 나를 이끌었다. 뭐라도 좋다. 이번 선거 결과가 잘 이해되지 않는 여러분에게, 이 두 권의 책을 권한다. ‘정치 공학 같은 걸 알아서 뭐 해’ 싶다가도 뜻밖에, 내 삶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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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말하며 사는 기자, 칼럼니스트. 1988년 대구 출생, 창원 출신. 한양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에서 9년간 사회부, 문화부, 젠더연구소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오마이뉴스》에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를 연재 중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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