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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국화 위에 국화가 쌓였다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11편
바로 이 ‘반복’이 하나의 저항이다. 네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내는 것. 네가 우리와 함께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환기시키는 것. (2024.04.17)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백지에 써두고 이상하다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 말은 사랑하는 누군가(대상)를 지시하는 말이 되기도 하고, 사랑을 발휘 중인 사람을 뜻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 혼동이 묘하게 아름다웠다. 같은 말이 능동성(사랑을 수행하는 사람)과 피동성(사랑의 대상)의 차원으로 혼동될 수 있다는 게 ‘사랑’ 같았다.
그러니까 사랑은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함부로 뒤섞어 세상에 놓는 일
받은 것을 주게 하는 아름다운 되풀이. 주면서 하게 되는 이상한 되풀이.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그렇게 함으로써 받고 받음으로써 해내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면 이 중의성*은 차라리 사랑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나를 키운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어떻게 나를 사랑해 줬는지 기억한다. 찐 감자를 후후 불어서 식혀주거나 나란히 걸을 때 아이의 보폭을 배려해 주거나 뒷사람을 위해서 문을 잡아주거나 탁상 모서리를 손으로 감싸 쥐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보통 ‘이불 덮어주기의 명수(?)’들이다. 잠든 이의 무방비인 배 위에다 도톰하게 이불을 덮어주는 사람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사랑의 방법이 ‘반복’으로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방법은 사실 그들 각각이 이미 누군가로부터 받았던 것들이다.
만일 일정한 간격으로 북을 두드리면, 리듬은 동일한 양으로 나누어진 시간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와 유사한 추상성을 기호적 표상으로 나타내면 ― ― ― ― ― ― ― ― ― 같은 선의 나열이 될 것이다. (…) 이러한 도식으로 환원될 때조차도 리듬은 측량 이상의 어떤 것이며, 양으로 나누어진 시간 이상의 어떤 것이다. 타격과 휴지(休止)의 연속은 어떠한 지향성intencionalidad, 즉 방향과 같은 어떤 것을 드러낸다. 리듬은 기대를 유발하며 어떤 바람을 떠받치고 있다. 리듬이 중단되면 우리는 어떤 충격을 받게 된다. 무언가가 깨진 것이다. 리듬이 지속되면 우리는 정확히 이름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을 기대하게 된다. (…) 운율은 시계나 달력과는 반대되는 기능을 실현한다. 시간은 추상적인 측량이기를 멈추고 있는 그대로, 즉 구체적이고 방향성을 갖는 어떤 것으로 돌아간다.
-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중에서 (김홍근, 김은중 옮김, 솔출판사)
“리듬은 기대를 유발하며 어떤 바람을 떠받치고 있다.” 그러니까 시와 삶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리듬’을 빚어내는 ‘생산적 반복’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행하는 숱한 친절과 세세한 사랑의 방식들은 앞선 이들에게서 받은 것들을 되풀이하는 행위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이 생의 구간을 만들고 어떤 귀한 기억을 빚어낸다. 이 기억이 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모시 스카프를 내게 둘러주었지. 그 요철 같은 기억을 떠올려 어린 나는 동생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이 반복은 죽은-반복 행위가 아니라, 살리는 반복, 사랑하는 반복, 만들어 내는 반복이다. 그래서 시에는 ‘리듬’이 있다. 이 반복은 리듬을 빚고 생기를 빚어 우리 삶에 “구체적이고 방향성을 갖는 어떤 것”을 실현해낸다.
내 책상 위에 국화가 있었다
국화 위에 편지가 있었다
편지 위에 국화가 놓였다
국화 위에 국화가 쌓였다
줄 세워진 우리들 손에 들린 국화를 잊는
선생이 들어온다 활자 가득한 칠판
국화를 들고서 말이 없었다
말을 못했다 오늘 당번 누구지
선생은 말하고
당번은 죽었어요 말을 못했다
국화를 들고서
우리는 우리의 차례를 기다린다
편지가 놓였다 내 책상 위에
당번은 읽어라 선생은 말한다
읽지 못했다 당번이 죽었지
슬픈 일이다 그래도 수업은 해야지
선생은 말한다
너는 교과서를 읽어라 종이 울릴 때까지
읽지 못했다 책상 앞에 앉아
얘가 죽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너의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흔들리는 등 위에 흰 손이 놓였다
흰 손 위에 흰 손이 놓였다
흰 손 위에 흰 손이 쌓였다
흰 손이 계속되었다
송승언, 「내 책상이 있던 교실」 전문 (『철과 오크』, 문학과 지성사)
그러니까 세상에 죽은 반복만이 가득할 때, “읽어라”라는 명령만이 반복될 때. 시는 ‘사랑의 반복’을 기어코 해낸다. 이 시를 매년 사월에 꺼내 읽는다. 반드시 “계속되”어야 할 일이 우리에게도 있다.
중학교 때 한 친구가 세상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한참 동안 친구의 죽음을 알지 못했는데 학교에서 이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다. 당시에 선생님들은 그 친구가 여행을 갔다거나, 몸이 심하게 아프다는 둥, 자꾸만 다른 핑계를 대며 친구의 죽음을 숨겼다. 그리고 이후 (그것도 소문으로 겨우) 진실을 알게 된 뒤에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왜 진작, 솔직하게 죽음을 말해주지 않은 거지? 왜 장례식에 갈 기회조차 주지를 않았지? 친구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걸 속일 수 있지? 왜 수업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진행되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한 사람이 떠났는데 이렇게나 멀쩡히 학교가 돌아가다니.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정말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시를 읽고 그 과거를 조금 넘어설 수 있었다. 이 시는 묵과하는 어떤 사건 앞에서 이루어지는 조용한 저항을 그리고 있다. 시 속에서 학생들은 모두 수동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줄 세워진 우리들”, “말을 못했”던 우리들은 순번이 지정된 “당번”으로 “우리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결국 학생들에게는 예전(일상)과 같은 죽은-반복(수업, 당번제, 학교)이 강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참으로 아름답게도 학생들은 “흰 손 위에 흰 손을” 놓는 ‘사랑의 반복’을 통해 ‘죽은 반복’을 어떻게든 넘어서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계속되는 말과 행위를 통해 “얘가 죽었어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아무리” 말해도 들어주지 않는 어른들 앞에서 “우리는 너의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얼굴을 묻었으니 울고 있겠지. 울다 보니 등이 흔들렸겠지. 그 “흔들리는 등 위에” 올려지는 손. 국화꽃처럼 손 위에 쌓이는 손. 결국 이 시는 첫 연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편지 위에 국화”와 “국화 위에 편지”들. 너에게 전할 이야기(편지)와 너의 아름다움(국화).
바로 이 ‘반복’이 하나의 저항이다. 네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내는 것. 네가 우리와 함께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환기시키는 것. 이 반복을 통해 화자는 “어쩔 수 없”다거나, “그래도 수업은 해야지”라고 말하는 기성의 ‘무의미한 반복’을 멈춰 세운다. 그래서 기억 투쟁을 하는 그 숱한 사람들이 지속, 계속, 끝없이 라는 말을 반복하고는 한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다 읽고 난 뒤에 첫 연으로 돌아가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반복적 읽기 역시 ‘사랑의 읽기’일 것이다.) 이 시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면 아주 이상한 진실이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국화가 올려진 책상이 바로 “내 책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너의 책상”은 사실 “내 책상”이다. 너의 죽음은 나의 죽음만큼이나 (나에게) 긴밀한 사건이다. 앞서 말했듯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하는 사람인 동시에, 받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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