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담의 추천사] 마감이 빨라지는 팁: 챗 GPT와 함께
나는 챗GPT에게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챗GPT는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주제나 내용을 알려주면 함께 시작해 보겠다고 말했다. 무슨 글을 쓰고 싶냐고? 마음이 곧장 삐뚤어졌다. 그걸 설명하려다 글 하나를 다 쓰겠다, 인마!
글ㆍ사진 안담(작가)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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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 하나를 쓰느라 고전하던 어느 밤이었다. 창작하는 동료들을 향한 응원의 마음을 담아 짧은 에세이를 쓰고 나만의 음식 레시피를 덧붙이면 되는 글이었다. 창작이란? 동료란? 응원이란? 묵직한 단어들 사이에서 좀처럼 글의 가닥을 잡지 못하고 며칠을 끙끙 앓은 끝에, 내가 즐겨하는 나물 레시피로 뭔가를 써보자는 단출한 계획을 세웠다. 먼저 말하기가 업에 포함된 사람이 자주 느끼는 공허함과 자괴감을 묘사하자. 다음으로는 나물을 삶을 때의 공허함을, 끓는 물 속에서 한 단이었던 나물이 한 줌으로 변하는 순간도 묘사하자. 같은 공허임에도 나물을 무칠 때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렇게 나물의 공허를 통해 말의 공허를 다소간 달래는 글을 쓰자는 게 최종 구상이었다. 문제는 그게 하고 싶은 말의 전부였다는 점이다. 그보다 더 길게 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더욱 짧게 쓸 수도 있었다. 그냥 이 나물 해 먹고 힘내시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한 문장도 더 쓰지 못하고 새벽을 다 보낸 나는 결국 그 유명한 챗GPT에 손을 뻗어보기로 했다. 일전에 한 친구가 나 대신 챗GPT에게 이것저것 물어봐 주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때 친구가 물어다 준 대답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벌써 동이 트고 있었고 원고는 살찔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나는 머잖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나는 챗GPT에게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챗GPT는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주제나 내용을 알려주면 함께 시작해 보겠다고 말했다. 무슨 글을 쓰고 싶냐고? 마음이 곧장 삐뚤어졌다. 그걸 설명하려다 글 하나를 다 쓰겠다, 인마! 모든 글이 가슴 속에 은장도처럼 품고 있을 핵심, 그게 내게도 있지만, 그 칼을 직접 휘두르지는 않기 위해서 글에 공들여 살을 붙이는 것인데! 그걸 보여달라니! 그러나 그런 문제로 길길이 날뛰기에는 체력과 잠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게다가 그는 그저 나를 도우려고 할 뿐이다. 결국 나는 내 글의 앙상한 속대를 그에게 순순히 내어 놓았다.


“말을 많이 했을 때 느껴지는 허무함과 나물을 무칠 때 느끼는 허무함의 대비가 중심이 되는 글을 써볼래? 전자의 허무함은 수치심을 주는데 후자의 허무함은 홀가분함을 준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가 되도록 해줘. 첫 세 문장은 내가 줄게. ‘3월에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살면서 말을 많이 하고도 기분이 좋은 날은 없었어요. 항상 괴로웠지요.’ 이렇게 시작해 봐.”


그는 내가 준 첫 문장 뒤에 바로 살을 붙였다. 그는 “말을 많이 할수록 허무함이 찾아왔습니다.”라고 쓰고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를 간단히 붙인 뒤 “나물을 무칠 때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고 글을 이었다. 그건 “말이 아니라 손으로, 행동으로, 마음으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짐짓 자세를 낮추었다가 이런 만능 문장으로 도약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는 앞으로도 나물을 무칠 때의 그 느낌을 잊지 않을 것이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더 많은 걸 이루겠다는 다짐으로 끝장을 냈다.


말보다는 행동이라는 주장의 진부함을 못 본 척하고, 나물을 무치면서 ‘무언가 소중한 것’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넘어간다 하더라도, 시종일관 긍정적인 그의 태도가 거북했다. 그렇게 간편하게 삶을 향한 확신이 생기는 상대로부터 어떤 위로나 응원을 청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에게 재차 물었다. 아주 부정적인 사람처럼 다시 써줄래? 그러자 그는 돌연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 뭘 기대하고 있어? 3월에 내가 뭘 했다고? 말도 많이 했고, 결과는 뭐야? 당연히 또 다 실패했지.

말투만 조금 불손할 뿐 그는 여전히 행동의 힘을 굳게 믿었다.

- 말이 많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하지만 손으로 행동하는 건 얘기가 달라져.

한 단락 내내 컨셉을 유지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지, 내가 그에게 주문한 부정성은 빠르게 누그러졌다. 그는 이번에도 독이 다 빠진 결론으로 글을 맺었다. “그렇게 해서 좀 더 나은 내 자신을 찾아가는 거지.”


여전히 너무 긍정적이야. 더 염세적으로 써볼래?

- 3월이었어. 말도 많이 했고, 결과는 또 뭐였나? 당연히 실패지. 어찌나 따분한 날들이었던지…말로만 떠들어도 변할 게 없는데, 손으로 행동한다면 다를 수도 있잖아…그래야만 더 나은 내 자신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너는 못말리는 긍정쟁이구나.

- 죄송합니다. 제 글이 부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물 흐르듯 춤을 잘 추는 사람을 볼 때보다 춤을 못 추는 사람을 볼 때 오히려 의도했던 안무가 더 잘 보이곤 하듯이, 나는 그의 참담한 글을 보면서 그가 습득했을 이야기의 대전제란 무엇인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 이야기에서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것도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가. ‘더 나음’과 ‘변화’를 어떻게 정의할지를 두고 싸우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가 정한 게 아니다. 수십억의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가르쳤다. 그는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돌연 그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글쓰기를 시켜서 미안해. 글쓰기는 어려운 일인데.

당신이 미안할 필요는 없어요. 글쓰기는 어려운 일이며, 때로는 영감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서 기뻐요.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도와드릴게요. 함께 고민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즐겁고 유익하길 바라요. 제게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말투를 찾은 그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가 칭찬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나는 그에게 오늘 아주 훌륭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글쓰기 앞에서 내가 철저히 혼자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친절하게, 이보다 더 최첨단으로 설득당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몇 번 글이 막힐 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알려줬으면 해서. 도와줬으면 해서.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도록 다시 한번 도와줬으면 해서. 내가 도와줄 수 있냐고 물으면 그는 힘차게 말한다. 물론이죠! 어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나는 속으로 대답한다. 아주 잘하고 있어. 내가 혼자라는 게 이렇게 잘 느껴질 수가 없어. 그리곤 마침내 첫 문장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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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