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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의 잃어버린 편집을 찾아서] 출판 담론 실종 사건
김영훈 칼럼 - 3화
정치인이 이토록 출판기념회를 사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출판은 지지리도 돈이 안 되는데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돈이 된다. (2024.04.08)
지금 출판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김영훈 편집자가 말해주는 출판 이야기. 격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
바야흐로 산만하고 심란한 선거의 계절이다. 명색이 출판문화의 중심(!) 채널예스에서 연재하는 칼럼이 아닌가. 중앙 정치에 매몰된 기성 언론을 대신하여, 지역구 후보자와 정당들의 출판 관련 공약을 소개해 보면 어떨까?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도착한 선거공보물을 펼쳤다. 와장창. 야심 찬 포부가 박살이 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이제껏 책과 출판이 선거에서 담론과 현안으로 주목받은 전례가 없다는 사실을.
출판도시 파주라면 다를까? 선관위 홈페이지에서 파주 출판도시가 자리한 파주갑 후보자들의 공약집을 살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출판도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출마한 두 후보가 지역 현안으로 꼽은 GTX 개통과 수도권 지하철 3호선 연장이 만성적 교통 문제에 놓인 출판도시와 그나마 관련은 있어 보인다. 출판진흥원이 위치한 ‘출판문화도시’ 전주, 문학창의도시 부천과 원주···. 평소 ‘책의 도시’라고 핏대 세워 홍보하던 지역들 역시 출판 이슈가 실종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떠오르는 ‘출판 1번지’ 마포을은 달랐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국민의힘 함운경, 녹색정의당 장혜영 세 후보 모두 출판 관련 공약을 내놓았다. 출판문화예술인 지원 및 출판거리 조성(정청래), 디자인·출판·인쇄 스마트 앵커 조성(함운경), 작은 도서관 확대, 마포출판문화센터 및 홍대 출판·디자인 특구에 국비 지원을 통한 일자리 마련(장혜영)이 그것이다. 멀쩡히 있는 것도 하루아침에 없애는 마당에 새로 무언가를 만들겠다는 어떤 공약은 다소 엉뚱하지만, 지금은 언급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지경이다.
출판계에 놀라울 만큼 관심을 주지 않는 정치권과 언론이 이번 총선 국면에서 딱 한 번 ‘출판’을 주목한 적이 있었다. 지난 1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출판기념회 형식을 빌려 정치자금을 받는 관행을 근절하는 법률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한 직후였다. 곧바로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21대 현역 국회의원 77명이 91회의 출판기념회를 열었고, 다른 예비 후보자들도 줄지어 출판기념회를 가졌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한몫 챙길 사람은 다 챙긴 이후의 ‘뒷북’ 공약이라는 비판이 제기된 건 당연지사였다.
기실 정치인 출판기념회의 메커니즘은 꽤나 공공연하다. 대필 작가 섭외 단가는 1,000만 원에서 시작하고 의뢰인의 중량감과 결과물의 완성도에 따라 4,000만 원까지 오른다. 인터뷰 등 기초자료가 풍부하면 한 달, 구술 작업 진행 시 서너 달 만이면 책을 만든다. 만들어진 책은 출판기념회 현장에서 권당 현금 5~10만 원에 판매되는 것이 ‘관행’이고, 비서실에선 구매자의 직급별 적정가를 안내한다. 대필작가에게 고료, 출판사에 제작비를 지급하고도 수익금은 통상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에 이른다.
그렇다. 정치인이 이토록 출판기념회를 사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출판은 지지리도 돈이 안 되는데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돈이 된다. 정치 후원금과 달리 출판기념회 수익금이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탓이다. 출판기념회 관련 법규는 후보자가 선거일 90일 전부터 선거일까지 출판기념회를 열 수 없다는 공직선거법 103조 5항이 전부다. 말인즉슨 모금액과 기부금에 제한이 없다. 선관위에 신고할 의무도 없다. 정치인에게 이보다 매력적인 모금 방법이 또 있을까?
분류 | 공식 후원금(국회의원) | 출판기념회 |
1인당 모금 한도 | 1억 5,000만 원 | 없음 |
1인당 기부 한도 | 500만 원 | 없음 |
후원 불가 대상 | 법인 또는 단체 | 없음 |
세액 공제 여부 | 최대 10만 원 | 없음 |
중앙선관위 보고 의무 | 내역 신고 의무 있음 | 없음 |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경구를 고쳐 쓰자. 책은 국회의원이 만들고, 국회의원은 책이 만든다. 하지만 책 팔아서 금배지 단 정치인 가운데 출판계 현안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책임을 다하는 이는 가뭄에 나는 콩처럼 드물다. 정치인들에게 책과 출판은 곶감 항아리쯤 되는 게 분명하다. 당 떨어지면 스리슬쩍 다가와 곶감만 챙긴다. 출판기념회를 개최한 정치인에게 출판계와의 대화를 정례화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을 강제하고 싶은 마음이 콩 싹처럼 고개를 들어 올린다.
정치권에서 책과 출판이 진지하게 다뤄지는 날이 올까? 모르긴 몰라도 다음 국회에는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지금껏 그래왔듯 출판계 현안은 ‘우리’ 안에서만 촌각을 다투는 시급한 문제로 남을 공산이 다분하다. 하지만 잊지 말자. 우리에게 돈이 없지, 투표권이 없나. 「2021 출판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출판산업 종사자는 약 4만 명에 이른다. 출판계가 담론 형성에는 실패했으나 투표로 당락을 결정지을 수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책 읽는 국회의원’에게 기대지 말자. 그건 책 만들고 읽는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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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서너 곳의 출판사에서 책을 편집했다. 만들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한결같이 타이완과 홍콩을 사랑한다. X(트위터였던 것) @bookeditor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