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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때 - <추락의 해부>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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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친한 친구 둘이 심하게 싸웠을 때 그 사이에서 서로의 말을 들은 뒤 하여튼 누가 옳은 지, 혹은 어떻게 둘 사이에 오해가 생겼는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려 애쓰지 않는가? 들은 건 고작 당사자들의 말뿐인데도 말이다. (2024.04.05)

영화 <추락의 해부> 공식 포스터


<추락의 해부>를 다 보고 나서, 당신께는 미안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버렸다. '이성애자 비장애인들에게 영화를 맡겨두면 절대 안 되겠구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덧붙이건대, 이는 전적으로 상영 직후 극장 엘리베이터에 다른 관객들과 함께 탔기 때문이었다. 그 안의 어떤 사람이 말하길, "그래서 엄마가 레즈야? 아니 근데 어떻게 결혼도 하고 변호사랑 썸도 타?"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길, "아들이 시각장애인인 줄 몰랐어! 처음엔 안 그래 보이지 않았어?" 이렇게 '일반적인' 관객들의 감상을 필터링 없이 듣고 있으니 그 안에서 나 혼자 한참 심각해지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산드라가 최소한 양성애자이며, 다니엘이 시각장애인이리라고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뷰 따위 안중에 없는 듯한 산드라의 능글맞은 태도와 그에 대한 부담스러운 클로즈업은 섹슈얼한 힘으로 가득 차 있으며, 강아지 스눕을 씻기면서 스눕을 직접 보지 않는 다니엘의 시선은 단순히 고개를 돌린 것 이상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대체 어떻게 이런 것도 캐치를 못하지? 한데 곧 이어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내가 양성애자이며 말년에 시각장애를 앓은 어머니를 간병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나의 경험과 그에 따른 지식이 먼저 있기 때문에 앞서 거론한 제스쳐들을 어떤 의미값의 '기호'로서 곧장 받아들일 수 있던 게 아닌가? 물론 당연히 그렇다. 한데 중요한 건, 이런 생각이 이 <추락의 해부>가 던지는 핵심적인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에서 어떤 정보들은 자꾸 나중에야 명시적으로 제시된다. 산드라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은 인터뷰어였던 조에가 나중에 법정에서 증인으로 섰을 때에야 아웃팅의 방식으로 '말'해지며, 다니엘이 시각장애인이란 것도 나중에 경찰 조사 도중 '말'해진다. 또 중간에 판사가 법정에 들어섰다가 어떤 사정으로 인해 잠시 돌아가는 장면도, 우리는 이게 다니엘 때문이란 걸 그 당시에는 짐작만 할 뿐 구체적으로 무엇이 용건인지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하나 이는 흔한 드라마들이 취하는 폭로적인 방식("예나, 선정이 딸이에요")과 달라서, 폭로 자체에서 어떤 스릴이 창출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쥐스틴 트리에(와 공동 각본가인 남편 아르튀르 아라리)가 염두에 둔 건 대체 무엇일까? 이는 '일반적인' 무지한 관객들이 어떤 제스쳐가 사실 '기호'였단 걸 나중에 알아차릴 때의 시차적 효과가 아닐까. 즉 유보된 유추 속에서 경험이란 게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내기인 것이다.

좀 어려운 얘기일 수 있으니 같은 맥락에서 다른 지점을 짚어보자. 이 영화의 또 다른 이상한 점은, 디제시스 밖의 주관적 숏인지 디제시스 안의 주관적인 시점 숏(POV)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자꾸 제시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가 당장 보고 있는 화면이, '객관적인' 영역에 있는 감독이 특정한 묘사를 위해 카메라를 일부러 티가 나게 움직인 결과인지, 아니면 영화 속 캐릭터가 든 카메라라는 설정에 따른 결과인지 헷갈리곤 한다. 몇 가지 예시. 초반부 현장 검증 씬, 즉 부모의 대화 소리 크기를 들었다는 다니엘의 증언을 확인하는 장면을 복기해 보면, 디제시스 속 경찰의 '주관적인' 카메라와 그걸 찍는 '객관적인' 카메라가 예고없이 계속 뒤섞이고 있다. 게다가 카메라들의 화질에 큰 차이가 없어서 둘을 구별하는 게 적잖이 어렵기까지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정된 카메라가 갑자기 핸드헬드로 움직일 때 좀 놀랐었다.

혹은 앞서 거론한, 판사가 법정에 들어섰다 다시 돌아가는 장면도 복기해보자. 안정적으로 패닝(좌우 회전)하던 카메라가 잠시 심하게 흔들리는 숏이 하나 있는데, 이는 판사가 들어간 문 쪽에서 누가 잠시 보였다 말았다 하는 순간이다. 아마 이 카메라를 든 누군가는 그게 판사인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 걸까? 디제시스 안인가 밖인가, 혹은 촬영 감독인가 법정 취재를 나온 기자인가. 이렇듯 <추락의 해부>에는 이미지의 위상이 근본적으로 교란되는 순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후반부에 산드라에게 무죄가 선고됐을 때만 빼면) 영화 속 기자들이 들었을 카메라로써 만들어진 이미지들에 흔히 뉴스에서 쓰일 썸네일이 안 붙는 것도 퍽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영화 <추락의 해부>의 한 장면


'진실(Truth)은 모호하며 사실(Fact)은 항상 주관적으로 주어진다'는, 흔히 라쇼몽 효과라 불리는 명제는 오늘날 점점 더 구태의연해지고 있다. 한편으론 이 명제를 아주 게으르게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작가들이 세상에 즐비하기 때문이며, ― 내게 당장 떠오르는 건 <아바타> 이후 한국 최초의 풀 3D 영화인 성인영화 <나탈리>와, 최근 한국에서 적잖은 인기를 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이다 ― 다른 한편으론 탈진실이나 대안적 사실 같은 낱말들이 유행했듯 그것이 SNS 이후를 사는 우리네 생활에서 이미 다층적이고도 광범위하게 자연화되었기 때문이다. 감각(되는 것)과 진리 사이의 불명료한 관계를 직시하고 대응하는 게 아니라 자포자기하듯 수용하고 유희한달까? 그리고 당신께서도 짐작하듯, <추락의 해부> 역시 이런 흐름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영화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속에서 <추락의 해부>를 굳이 봐야 할 필요가 과연 무엇인가?

앞서 나는 이 영화를 두고 "유보된 유추 속에서 경험이란 게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내기"라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지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완벽하게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걸 넘어서, 그럼에도 주체가 둘 중 하나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으며 또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신도 친한 친구 둘이 심하게 싸웠을 때 그 사이에서 서로의 말을 들은 뒤 하여튼 누가 옳은 지, 혹은 어떻게 둘 사이에 오해가 생겼는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려 애쓰지 않는가? 들은 건 고작 당사자들의 말뿐인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픽션적인 위상을 정확히 분간할 수 없는 카메라의 시점을 보는 우리 관객들과, 부모의 추접스러운 싸움 속에서 나온 파편들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관철해야 하는 다니엘은 거의 비슷한 내기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추락의 해부>는 (이중의 의미에서의) 주체가 교란된 '기호'들 속에서 판단을 내려야만 할 때의 책임을 육화한 영화인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이 영화를 두고 '산드라가 사뮈엘을 죽였나 안 죽였나 따지는 건 무용한 짓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일 게다. 바보거나 거짓말쟁이거나. 영화가 그것을 직접 알려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판단을 내리려 애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산드라가 아닌 다니엘이라 해야 한다. 산드라 휠러의 굉장한 퍼포먼스와 별개로, 디제시스 안에서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누구보다도 다니엘이니. 이렇게 생각하면, 다니엘이 처음 증인으로 섰을 때 그를 중앙에 두고 추가 움직이듯 좌우로 트래킹하여 어른들(변호사와 검사)의 소리만 들리도록 한 숏은 마치 양자 모두 다니엘에게 같은 무게의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뉘앙스를 전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우리 관객들은 다니엘과 함께 이런 질문들을 속에 품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확신하기 위해 정말로 무언가를 꼭 봐야만 하는가? 보이고 들리는 걸 온전히 믿을 수 있는가? 사람들은 판단의 공백이나 유보를 견디기 위해 어떤 지식을 동원하는가? 요컨대, 제스쳐는 언제 어떻게 왜 '기호'가 되는가? 이런 질문들을 야기하는 <추락의 해부>의 방법론에 있어 계보를 영화 안에서 찾는다면, (영화 제목에서도 인용된) <살인의 해부>(1959)의 오토 프레밍거에서 <원초적 본능>(1995)의 폴 버호벤으로 이어지는 모던 시네마적 스릴러를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설적인 코드를 통해 기존의 가치체계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려 드는 영화들.

다만 보다 미시적인 '재현'의 문제계에 접근하여 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책임질 주체의 고민과 그 고민에 대한 고민을 포괄해 제시한다는 점에서, 쥐스틴 트리에는 선대들의 영향력에 짓눌리지 않는 탁월함과 예리함을 갖추고 있다. 물론 아쉬운 지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무엇보다 그런 책임의 주체를 다니엘에게 맡기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소란을 비판하는 마지막 증언을 그의 '소년성=순수함'에 지나치게 기댄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게 제일 큰 불만이다. 법정이란 장소와 이런 정치적 올바름의 코드가 결합될 때, 대부분의 영화들은 논쟁의 여지 자체를 거부해버리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프랑스에서 진행 중인 미투 운동을 염두에 두면 아주 이해 못 할 선택도 아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정말 간만에 황금종려상이란 이름값에 걸맞은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아직 조너선 글레이저의 <관심 구역>을 못 봤고, 나는 여전히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당시 경쟁 부문의 최고였으리라고 믿지만, 쥐스틴 트리에는 더더욱 첨예한 영화들을 만들어낼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리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일종의 지지 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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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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